브랜드스토리

가라지로부터 세상 끝으로, 조나단 말터스(Jonathan Maltus)

르 돔 2010 빈티지(Le Dome 2010).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M. Parker Jr.)로 부터 100점 만점을 받은 와인이다. 파커가 100점을 준 보르도의 샤토는 서른 두 곳 밖에 없으며, 특히 외부 출신이 만든 보르도 와인에 100점을 매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르 돔의 소유주이자 와인메이커 조나단 말터스(Jonathan Maltus) 씨는 100점 수상 소식에 처음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컬트 와인이나 가라지 와인이라면 일반적으로 파커를 비롯한 비평가들의 입맛에 맞추는 경향이 강한 와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말터스 씨는 사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파커를 만나 본 적 조차 없었다. 2010년 빈티지가 100점을 받은 후 파커를 만나게 되었을 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더니 ‘감사할 것 없다. 앞으로 내려갈 일만 남았으니까.’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가볍게 웃은 그는 다음 목표가 ‘파커가 틀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재치있게 이야기했다.

 

와인메이커 조나단 말터스 씨

 

르 돔을 만든 대표적인 가라지스트(Garagiste) 조나단 말터스(Jonathan Maltus) 씨를 와인메이커스 디너가 열린 서울 신라호텔 레스토랑 라연에서 만났다. 그는 현재 르 돔과 샤토 테시에(Chateau Teyssier)를 비롯한 유수의 보르도(Bordeaux) 와인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미국 나파 밸리(Napa Valley)에도 진출해 수준급 와인들을 만들고 있다. 이번 디너는 보르도와 나파에서 생산된 프리미엄 와인들이 각각 3종씩 제공되어 말터스 씨의 전반적인 와인 스타일은 물론 지역과 품종에 따른 개성까지 느껴볼 수 있었던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디너가 시작되기 전 말터스 씨의 인생과 와인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와인업계로의 입문, 그리고 샤토 테시에의 시작

말터스 씨의 경력이 처음부터 와인업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7살 이후부터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영국인이다. 가스업계 엔지니어로 일하며 한때 52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기도 했었지만 36세 때 아내를 만나면서 그의 진로는 바뀌게 된다. 아내가 잦은 출장과 격무에 시달리던 그에게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던진 것. 와인을 좋아했던 그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지친 심신도 달랠 겸 남서프랑스의 카오르(Cahor) 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우연히 참석한 와인 파티에서 호주 출신의 영국인 와인메이커를 만나는데 이것이 와인 비즈니스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그 와인메이커의 와인을 영국 시장에 판매하는 일이었는데 생산량의 50% 이상을 책임질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이로 인해 자신감을 얻은 그는 본격적으로 와인 비즈니스에 뛰어들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최종 선택은 판매가 아닌 양조. 이 역시 판매를 하느니 차라리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부인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카오르에서 5년 정도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대해 공부하며 1992, 1993년에는 말벡 와인 양조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그의 눈길은 고급 와인의 중심지 보르도로 향했다. 처음엔 좌안(Left Bank)에 관심이 있었지만 대부분 영지가 커서 상당히 큰 비용이 드는 데다 구매 과정의 여러 절차 또한 복잡한 것이 부담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우안(Right Bank)을 선택했고, 그 시작은 생테밀리옹(Saint-Emilion)의 샤토 테시에였다. 1994년 그가 샤토 테시에에 처음 입성했을 시기는 소위 가라지 와인(Garage wine)의 부흥기. 프랑스의 평론가 미셀 베탄(Michel Bettane)이 처음 가라지 와인이라는 용어를 쓴 이래 가라지 와인의 인기와 가치가 절정으로 치달은 이 시기는 ‘섹시했다’는 말터스 씨의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특히 로버트 파커라는 평론가는 가라지 와인의 융성에 큰 역할을 담당했는데, 당시의 다른 평론가들과는 달리 해당 와인의 역사와 전통, 지역, 양조자 등의 후광을 배제하고 단지 와인 그 자체만을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는 좁은 포도밭에서 관능적이고 농밀한 와인을 극소량만 생산해 마이크로뀌베(Microcuvée)로 불리던 가라지 와인들에게는 안성맞춤의 기회였다. 그 기간 동안 처음 5.5ha의 포도밭으로 시작한 샤토 테시에 또한 현재 53ha까지 그 규모를 늘렸으며 여덟 가지 와인을 생산하고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말터스 씨는 ‘2000년대 초반부터 가라지 와인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었지만 샤토 발랑드로(Château Valandraud), 라 몽도트(La Mondotte), 르 돔 등 세 와인은 현재까지도 인정받는 대표적인 가라지와인’이라며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크고 농축적이며 명료한 스타일

그가 추구하는 와인 스타일은 한 마디로 모던한 와인. 그리고 이를 부연하는 세 단어는 ‘규모감(Largeness), 농밀함(Concentration), 명료함(Definition)’이다. 그런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 수확량은 절반 이하로 줄이고 양조의 전 과정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와인은 신이 만든다’, ‘떼루아를 표현한다’는 표현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특히 생산자가 조절하는 양조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포도 선별부터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의 미세한 조정, 숙성하는 오크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양조자의 손길과 의사결정에 따라 생산되는 와인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르도에서는 테루아 못지 않게 적절한 블렌딩 또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실 보르도에서는 규정만 준수한다면 포도밭의 매매를 통해 각 샤토에서 소유하는 포도밭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개별 샤토의 개성은 떼루아 보다는 다양한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를 어떻게 선별하고 블렌딩하느냐의 문제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포도밭 관리를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르 돔의 포도밭은 샤토 앙젤뤼스(Château Angélus) 바로 옆에 위치할 만큼 입지가 좋으며 구획 별 특징에 맞게 철저한 품질 관리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향을 받은 양조가로 꼽은 인물은 뽀므롤(Pomerol)의 작은 포도밭에서 가라지 와인의 시대를 연 르 팽(Le Pin)의 제라르 티엔퐁(Gérard Thienpont). 그가 자신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자신의 집에도 놀러 올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그의 섬세한 양조 방법론은 물론 소신이 담긴 말 한 마디까지도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스테로이드를 주사한 슈발 블랑, 르 돔

초반에도 언급했지만 2010 빈티지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을 받은 르 돔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사실 르 돔은 파커 포인트 100점을 획득하기 전에도 꾸준히 좋은 평가를 얻고 있었다. 미국보다 먼저 호평을 얻기 시작한 곳은 영국 시장. 이미 2000년대 초반 샤토 라피트(Château Lafite Rothschild)와 동등한 평가와 가격을 형성했다고 하니 그 품질과 인기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가장 비싼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중심 와인 중 하나로 꼽힌다. 말터스 씨는 르 돔이 미국 시장에서는‘스테로이드를 주사한 슈발 블랑(Cheval Blanc)’으로 불린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단단한 구조감과 농축미를 지닌 풀 바디 와인이라는 뜻이다. 실제 2010년과 같은 위대한 빈티지의 르 돔은 바로 마시기엔 너무 어리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기대하며 오랜 시간을 인내하는 것이 옳다.

 

나파 와인들의 이름은 말터스 씨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노래에서 따 온 것이다.

If Six Was Nine은 Jimi Hendrix, Crossfire는 Stevie Ray Vaughan,

Good Times Bad Times는 Led Zeppelin의 곡이다.

 

나파에서의 새로운 시작, World’s End

그는 2000년대 초반 잠시 호주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에서 와인을 만들었다. 2002년 빈티지 와인이 파커 포인트 98점을 받았을 정도로 성공적이었지만 시장 상황 등을 고려하여 사업을 접었다. 대신 그가 눈길을 돌린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나파 밸리(Napa Valley). 나파 밸리는 그가 처음 터를 잡았던 보르도와는 다른 전통을 가진 곳이다. 포도 재배부터 와인 양조까지 모두 수행하는 생산자가 다수인 보르도에 반해 나파 밸리는 재배자로부터 포도를 사서 양조하는 전통이 우세하다. 말터스 씨 또한 토 칼론 빈야드(To Calon vineyard) 등 명성 높은 포도밭들로부터 양질의 포도를 구매하여 세심한 양조를 통해 와인의 개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메인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생테밀리옹의 메인 품종이었던 카베르네 프랑과 메를로 품종 등도 일부 재배하지만 아무래도 나파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이 잘 자란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름을 월즈 엔드(World’s End)라고 지은 이유는 (세상의 끝에서) 새로운 길을 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테밀리옹에서는 비교적 모던한 스타일을 만들었다면 나파에서는 반대로 고전적인 스타일을 추구한다. 올드 월드의 터치가 묻어나는 뉴 월드 와인인 셈인데 그렇다고 뉴 월드 스타일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차를 즐겨 마시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입맛과 코카콜라에 길들여진 미국의 입맛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말터스 씨의 생각. 따라서 조금 더 농밀하고 달콤하며 타닌이 둥글게 느껴지도록 만든다고 한다.

 

조나단 말터스에게 와인이란?

인터뷰를 마치며 당신에게 와인은 무엇인가 하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몇 초 고민한 그는 ‘정말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마셨을 때 긍정적인 긴장감이 느껴지고 처음과 중간 끝의 스토리가 있는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와인메이커라는 직업은 무에서 와인을 창조하는 직업이라 더욱 흥미롭다는 조나단 말터스 씨. 앞으로 그가 만들어 낼 더욱크고 농밀하고 명료한 와인들이 문득 궁금해 진다.

 

 

제공된 말터스 씨의 와인들을 간단히 소개한다.

 

Château Teyssier 2011 Saint-Emilion Grand Cru

바이올렛, 진득한 듯 향긋한 짓이긴 붉은 꽃잎의 첫 향기. 이어지는 검붉은 체리, 커런트 등 밝고 섬세한 붉은 과일 아로마.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생생한 산미가 동반된 깔끔하고 드라이한 첫 입맛. 자두, 블랙커런트 풍미에 매콤한 스파이스와 허브의 상쾌한 피니시로 마무리되는 미디엄풀바디 와인. 인접하지 않은 다양한 토질의 구획들을 블렌딩하여 복합미를 부여했다고. 어릴 때도 비교적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스타일이지만 10년 이상의 장기 숙성 또한 가능하다. 가라지 와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연간 만오천병 정도의 비교적 많은 양을 생산하여 접근성을 높였다. 메를로 75%에 카베르네 프랑 25%를 블렌딩.

 

Château Laforge 2011 Saint-Emillion Grand Cru

섬세한 붉은 꽃, 상큼한 사과, 톡 쏘는 스파이스와 향긋한 허브 향이 만들어내는 시원한 첫 인상. 드라이하게 표현된 라즈베리, 자두, 블루베리, 블랙베리 풍미에 커런트 뉘앙스가 감돈다. 처음에는 좀 수줍은 듯 했지만 이내 높은 밀도의 향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군고구마 껍질 같은 달콤하고 구수한 풍미에 발효차 뉘앙스가 복합미를 더한다. 둥근 질감과 좋은 구조감, 균형잡힌 풍미에 긴 여운. 샤토 라포르쥬가 생산되는 포도밭은 자갈, 모래, 점토석회질 토양이 섞여 있으며 메를로 92%로 샤토 테시에의 와인 중 메를로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섬세하고 섬세하며 또 섬세한 와인이다.

 

Le Dome 2008

직화로 구운 스모키한 고기에 강한 스파이스와 민트 허브를 뿌린 듯한 첫 인상. 하지만 입에 넣는 순간 생생한 붉은 과일의 풍미로 전이된다. 산뜻한 첫 미감에 촘촘하고 잔잔한 타닌이 만들어내는 드라이한 느낌. 시간을 들여 천천히 스월링하자 말린 장미, 블랙커런트, 붉은 베리류의 향긋한 아로마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피니시에 느껴지는 초콜릿 힌트와 부정적이지 않은 철분의 느낌이 긴 여운을 형성한다. 응축미가 느껴지는 강한 바디와 강건한 골격에도 불구하고 신선함과 쾌활함이 먼저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어리기 때문일 듯. 먼 미래가 궁금한, 개성 충만한 와인이다. 르 돔을 생산하는 밭에는 카베르네 프랑이 80% 식재되어 있어 그 특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The World’s End, If Six Was Nine 2010 Napa Valley

향수 같이 화사한 바이올렛, 건포도, 프룬, 마른 허브의 첫 향기. 삼나무와 연필심, 바닐라 향 감도는 농익은 블랙베리, 블루베리 풍미의 코어에는 블랙커런트 풍미가 박혀 있는 듯 하다. 비교적 드라이한 첫 인상과 뒤를 받치는 산미에서 모던하면서도 구세계의 밀도와 깊이가 느껴진다. 풀 바디에 구수하고 달콤한 파이와 시나몬 캔디의 여운이 편안하고 즐겁다.

 

The World’s End, Crossfire 2008 Napa Valley

짙은 프룬, 블랙베리, 허브 등의 직설적인 아로마. 말린 검은 과실 풍미의 달콤함이 밀도 높게 느껴진다. 실키하지만 빽빽한 타닌, 바닐라 오크 뉘앙스가 농익은 과일 풍미와 어우러져 친근하고 쾌활한 인상. 붉은 꽃과 붉은 베리 등 신선하고 가벼운 향들은 외려 뒤늦게 드러나며 아련한 여운을 남긴다. 존재감이 느껴지는 임팩트 있는 와인을 선호하는 애호가에게 안성맞춤.

 

The World’s End, Good Times Bad Times 2008 Napa Valley

먼지 쌓인 곳간, 곶감, 매콤한 스파이스 등 예상 외의 첫 향기. 하지만 바닐라 뉘앙스가 감도는 농밀한 블랙베리와 블루베리, 베리 콤포트 등 익숙한 풍미가 뒤를 잇는다. 꽃다발 같이 풍성한 플로랄 아로마가 명확히 감지되지만 배경으로 물러서는 느낌. 풀 바디에 밀도 높은 풍미는 강하지만 과하지 않아 우아한 균형을 이룬다. 시나몬, 정향, 홍차 등 고혹적인 긴 여운 또한 매력적이다. 나파 최고의 싱글 빈야드로 평가되는 토 칼론 빈야드에서 생산된 포도로만 양조한다. 2008년은 Good Times에 속한다고. 섹시하면서도 친밀한, 평생을 함께 할 만한 반려자 같은 느낌의 와인이다.

프로필이미지김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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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4.11.11 08:22수정 2014.11.1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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