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누런 가을 잎들이 날아다니는 석양 시간, 동네에 가을 이동 와인 시음장이 섰다. 벌써 몇 년째, 두 계절이 맞물려 있을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와인 문화 중 하나다. 이곳 사람들은 무엇이든 결정하기가 어렵지 한번 약속만 되면 웬만해서는 끄떡도 않는다. 그 우직함은 자신들만의 문화와 전통을 만든다.

[시음장 밖 잔디에서 크리켓을 하는 아이들]
오늘 시음장도 스포츠 클럽이다. 스포츠 클럽에서 와인 시음이라. 이방인의 눈에 보이는 이 도시의 다름은 많지만, 동네마다 있는 스포츠 클럽과 도서관은 또 다른 생각을 주는 공간이다. 낮 시간, 은퇴자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고 스포츠 클럽에서 운동 경기 후 맥주 한잔을 나눈다. 스포츠 클럽이나 도서관이 동네의 사랑방인 셈이다. 지금 시음장 밖 잔디에서 크리켓을 하며 노는 저 꼬마들은 평생 이곳을 찾을 것이다. 유년 시절의 놀이 공간을 어른이 되어서도 찾을 수 있는 것, 문화 아닌가.
시음 행사를 하는 회사는 며칠 전부터 지역 신문에 알림을 띄운다. 단골들에게는 당일 아침 이 메일로 시음 와인 차림표도 보내준다. 시음장에 함께 가기로 한 브라질 출신 와인 마니아 비센테는 퇴근이 늦어져 너무 억울하다는 하소연을 보내왔다. 아내는 혼자된 나를 시음장 앞에 내려 주며 잘 놀다 오란다. 오늘 난 혼자 마시고 놀아야 한다.

[시음장 풍경]
선발로 나선 와인은 레드 12종, 화이트 12종, 스파클링과 로제 한가지씩 총 26가지. 레드와 화이트를 각각 네 개의 테이블에 나눠 놓았다. 생산 지역은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내륙 방향이 많았고 원거리에 있는 동남 해안 쪽은 빠져 있어 살짝 아쉽다. 화이트와 레드의 대중적인 품종들은 빠짐없이 나왔고 빈티지는 2011~2015년으로 근래 것들이 대부분이다. 26가지 전부를 아무리 빨리 맛본다 해도 2시간은 훌쩍 지난다. 선선한 가을이라 레드 쪽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지난봄 시음에는 스파클링이 몆 종 더 나왔는데 오늘은 딱 한가지뿐인걸 보니 바람 부는 계절임을 알겠다.
시음 와인 전체를 세일하여 가성비는 모두 좋지만 생산자 라벨을 붙이지 않은 언라벨드(Unlabeled) 와인은 더욱 알차다. 우리가 노 네임(No name)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와인은 유니폼만 입지 않았을 뿐 라벨을 붙인 와인과 품질은 같고 가격은 절반이다. 잘 알려진 와이너리 출신을 집으면 실망하지 않는다. 레드와 화이트 한 종류씩 언라벨드 와인이 나왔다.

[주말에 친구랑 마신 언라벨드 와인]
모인 인원은 단출하다. 얼추 사십 명쯤 될까? 술잔을 부딪치는 음과 웃음소리가 더 잘 들린다. 마치 분위기 좋은 회사 파티장에 온 것 같다. 누군가 뒤에서 내목덜미를 잡는다. 바로 시음장 옆에 있는 짐(gym)에서 만난 친구 찰스다. 의사이면서도 병원에는 가지 말라고 하는 좀 요상한 의사다. 마당발인 그가 와인 전문가 수잔을 나에게 소개해 준다. 그녀는 오늘을 준비한 회사 직원이다. 나에게 남아공 와인 좋아하느냐 묻는다. 난 남아공 와인도 좋지만 이 저녁이 더 좋다 그랬다. 오늘 동양인은 미스터 김뿐이라며 제발 맛 좋고 가격 좋은 남아공 와인 좀 코리아에 더 많이 가져가면 좋겠단다.

[와인 전문가 수잔(우)]
나는 와인을 우리의 소주처럼 마시고 사는 문화 속에 10여 년 넘게 살고 있다. 그들의 와인 문화를 접할 때마다 느낌은 '와인을 대하는 자연스러움'이다. 대부분 사람은 와인에 대해 그렇게 박식하지도 빈티지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 고통스러운 용어로 와인을 분석하고 표현해 주변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와인이 없는 식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과 어떤 자리에서도 와인은 빠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 위쪽, 가장 최상위에는 '마시는 즐거움'을 놓는다. 그렇게 와인을 마시고 노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올라갔고 얼큰한 취기가 시음장을 감쌌다.
'가랑비에 옷 젖고 와인 한두 잔에 오르고' 와인 시음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와인을 보면 나도 모르게 자제력이 허물어지는 그런 날이 있다. 오늘도 그 유혹에 못 이겨 야금야금 마신 와인이 나를 푹 적셨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귀가할 시간이다. 공짜 술을 맘껏 마시고 잘 놀았으니 감사의 표시는 주문으로 대신하면 된다. 나는 화이트, 레드, 스파클링 와인을 섞어 12병 들이 두 박스를 주문 했다. 아내를 전화로 부르고 기다리는 동안 돌계단 위에 앉는다. 밤 하늘을 올려다 본다. 말똥말똥한 밤 별들이 몰려 나와 와인에 취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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