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셉 펠프스 빈야드 전경]
트렌드가 형성된 배경에는 그 시작을 선도한 리더가 있기 마련이다. 현재 미국 와인산업에서 하나의 문화로 당당히 자리잡은 컬트 와인도 누군가의 혁신에서 비롯됐다. 그 발단의 주요한 역할을 한 와이너리의 이름을 하나둘 꺼내볼 때, 당시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죠셉 펠프스 빈야드(Joseph Phelps Vineyards)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어불성설일 것이다.
죠셉 펠프스 빈야드는 올해 그들의 훈장이자 플래그쉽 와인 ‘인시그니아(Insignia)’의 탄생 40주년인 2013 빈티지를 작년 말 한국 소비자들에게 선보였다. 인시그니아가 처음 등장한 1970년대는 많은 와이너리들이 대중성을 추구하며 단일 품종으로 생산한 와인에 집중하던 시기였다. 그때 창업자 죠셉 펠프스 씨는 보르도 스타일의 블렌딩, 즉 메리티지(Meritage) 와인으로 인시그니아를 선보이며 나파 밸리 와인 산업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1월 1일, 인시그니아 3개 빈티지와 함께 한 버티컬 테이스팅 세미나에서 조셉 펠프스 빈야드와 인시그니아에 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죠셉 펠프스 빈야드의 대표인 빌 펠프스(Bill Phelps)와 그의 아버지이자 창업자인 죠셉 펠프스(Joseph Phelps)]
집념과 혁신
죠셉 펠프스 빈야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두 단어는 바로 집념과 혁신이다. 집념은 다름아닌 ‘테루아’에 관한 것. 죠셉 펠프스 빈야드는 나파 밸리에 위치한 유명 가족경영 와이너리 중에서도 자가 소유한 포도밭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포도밭에서부터 모든 공정을 직접 관리하는데, 기후 조건에 따라 수확량의 차이가 큰 단점이 있지만 대신 빈티지에 따른 편차를 절대적으로 줄여 일관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 품질을 위한 와이너리의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유명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인시그니아 와인을 두고 “빈티지가 무엇이든 인시그니아는 인시그니아다(Regardless of the vintage, Insignia is Insignia)”라는 찬사를 남긴 것을 그런 노력이 와인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품질에 대한 고집을 유지하는 반면 과감한 혁신도 시도한다. 메리티지 와인이지만 블렌딩에서 결코 특정 품종에 집착하지 않는다. 일례로 인시그니아의 각 빈티지 블렌딩 비율을 보면, 매년 사용하는 5가지 품종의 비율이 크게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99년 인시그니아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상황에도 나파 밸리에서의 입지에 만족하지 않고 소노마 코스트에 위치한 프리스톤(Freestone)에서 부르고뉴 포도 품종을 이용해 새로운 시도를 거듭했다. 당시 프리스톤 지역은 포도를 재배하기에 습하고 기후 변화가 극심하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테루아를 향한 색다른 관점에서 가능성을 찾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도전한 것이다. 또 나파 밸리 지역에 시라와 비오니에 품종을 최초로 도입해 이른바 론 레이저스(Rhone Rangers)로 불리는 일군의 와인생산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의 일관된 집념과 혁신은 수많은 어워드 수상과 평론가들의 높은 점수, 그리고 소비자들에게 쌓아온 신뢰로 그 결실을 본 듯하다.
[소노마 코스트 와이너리와 나파 밸리 와이너리]
[이날 시음한 6가지 와인]
Joseph Phelps Freestone Chardonnay, Sonoma Coast 2015
2015년은 안개와 해풍 등 주변 날씨에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고 수확 시기를 앞당긴 해. 결과적으로 포도송이의 알을 작게 만들어 샤르도네 품종에 긍정적인 영향일 미쳤다. 13개월간 65% 중성 프렌치 오크와 35%의 뉴 프렌치 오크통에서 숙성시켰으며 부르고뉴 전통 기법인 전송이 압착 방식(whole-cluster pressing)을 사용했고 젖산 발효와 바토나쥬(bâtonnage)를 거쳤다. 향에서는 레몬 향과 단과자빵 브리오슈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청사과와 파인애플 등의 향이 복합적이며 입안에서는 매끄러운 질감이 좋고, 산미의 구조감도 뛰어나다. 특히 피니시에서 느껴지는 호박엿 같은 뒷맛이 매력적이다.
Joseph Phelps Freestone Pinot Noir, Sonoma Coast 2014
소노마 코스트의 피노 누아 품종을 말할 때 2014년은 흔히 별 다섯 개, ‘5 Star Vintage’라고 불릴 만큼 이상적인 해였다. 신선하고 뚜렷한 과실 느낌이 있지만 동시에 과하지 않는 절제도 가지고 있다. 13개월간 65% 중성 프렌치 오크와 35%의 뉴 프렌치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와인으로 잘 익은 검은 체리와 붉은 과실향이 매력적이며 제비꽃과 향신료의 느낌도 엿보인다. 특히 입안에서는 미네랄리티가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뛰어난 피노 누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Joseph Phelps Cabernet Sauvignon, Napa Valley 2014
2014년은 나파 밸리에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빈티지다. 본래 햇볕이 너무 강하면 포도송이가 과숙될 우려가 있지만 적당히 선선한 기후가 유지됐기 때문. 나파 밸리 7개 지역에 소유한 밭에서 엄선한 포도를 사용하며 18개월간 45%의 뉴 오크와 55% 중성 오크에서 숙성한다. 다채로운 검은 과실과 어우러지는 제비꽃과 미네랄 노트가 두드러지고 토스트와 향신료의 힌트가 더해진 매력적인 와인이다. 20년 이상 숙성 잠재력이 있지만, 아직 이른 빈티지임에도 불구하고 타닌이 부드러워 지금 바로 즐겨도 좋은 와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84%, 멜롯 8%, 쁘띠 베르도 4%, 말벡 2%, 카베르네 프랑 2%가 블렌딩됐다.
Joseph Phelps Insignia, Napa Valley 2013
토양의 수분이 적어 포도송이에 에너지가 더욱 집중된 나파 밸리의 2013년은 가히 최고의 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상당한 숙성 잠재력이 있는 와인이 생산됐다. 24개월간 100% 뉴 프렌치 오크통에서 숙성시켰다. 진한 검은 과실과 향신료가 동시에 어우러지는데 에스프레소, 모카, 다크초콜릿의 뉘앙스도 큰 특징이다. 아직 단단하지만 입안에서 바로 느껴지는 깊이감과 웅장함이 과연 이 와인이 시음 적기에는 어떻게 변모할지 큰 기대를 갖게 만든다. 카베르네 소비뇽 88%, 쁘띠 베르도 5%, 멜롯 3%, 말벡 3%, 카베르네 프랑 1%가 블렌딩됐다.
Joseph Phelps Insignia, Napa Valley 2009
2009년 봄은 비로 인해 수분을 적절히 확보했고 서늘한 기후였다. 봄을 지나 상당히 더운 여름이 이어졌고 일교차도 커서 색과 풍미가 좋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었다. 역시 24개월간 100% 뉴프렌치 오크통을 사용했다. 말린 자두 느낌과 잘 익은 베리류의 과실향이 좋으며 허브 뉘앙스와 시가 박스의 풍미가 더해진다. 카베르네 소비뇽 83%, 쁘띠 베르도 13%, 말벡 4%가 블렌딩됐다.
Joseph Phelps Insignia, Napa Valley 2000
2000년 나파 밸리의 여름은 덥지 않고 습했다. 다른 빈티지보다 향이나 맛의 강도가 높지 않지만 세심한 양조 과정을 통해 섬세함을 얻을 수 있었던 빈티지다. 26개월 동안 100% 뉴 프렌치 오크에서 숙성시켰다. 숙성을 통해 생긴 간장과 버섯, 토양의 느낌이 인상적이며 담배, 모카, 흑연 등의 부케와 뛰어난 미네랄리티가 어우러져 섬세함이 느껴지고 밸런스도 뛰어나다. 카베르네 소비뇽 77%, 멜롯 18%, 쁘띠 베르도 3%, 말벡1%, 카베르네 프랑 1%가 블렌딩됐다.
[세미나를 진행한 나라셀라의 신성호 이사]
이날 테이스팅 도중, 죠셉 펠프스가 특히 한국에 있는 컬트 와인 애호가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이유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나라셀라의 신성호 이사는 “고급스러운 와인 레이블과 그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만들어낸 좋은 이미지가 시장에서 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매년 빈티지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꾸준한 품질이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쌓은 덕분입니다”라고 답했다.
죠셉 펠프스는 미국의 많은 컬트 와인 중 특히 신뢰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 신뢰를 이어가길 기대한다.
자료제공: 사진: Joseph Phelps Vineyards (제공: 나라셀라)Copyrights © 와인21닷컴 & 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