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비코 안티노리(Lodovico Antinori)는 오르넬라이아(Ornellaia)와 마세토(Masseto)를 만든 슈퍼 투스칸의 명장이다. 그는 형 피에로(Piero)와 함께 이탈리아 와인의 대명사 안티노리 가문의 26대손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 독립적인 행보를 걸어왔다. 그런 그가 오르넬라이아, 마세토에 이어 또 다시 새 프로젝트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바로 테누타 디 비세르노(Tenuta di Biserno)다.

[테누타 디 비세르노를 설립한 로도비코 안티노리]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품종으로 한 오르넬라이아, 메를로로 만든 마세토와 달리 테누타 디 비세르노 와인들은 카베르네 프랑의 비율이 높다. 프티 베르도 함량이 높은 점도 흥미롭다. 로도비코가 마치 보르도 품종을 하나씩 섭렵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카베르네 프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테누타 디 비세르노의 포도밭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테누타 디 비세르노의 밭은 토스카나 서부 해안 지방에 위치한 알타 마렘마(Alta Maremma)의 비보나(Bibbona)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티레니아 해(Tyrrhenian Sea)를 내려다 보는 이곳은 토양에 미네랄이 풍부하고 석회암과 자갈이 많으며 경사면이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토스카나의 뜨거운 태양을 피하면서 시원한 바람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서늘한 기후에서 우아한 맛을 내는 카베르네 프랑과 메를로를 기르기에 딱 맞는 지역이다.

[테누다 디 비세르노 포도밭]
테누타 디 비세르노의 연간 와인 생산량은 약 50만 병에 불과하다. 그중 대표 와인인 비세르노는 가장 높은 지대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 와인으로 16개월간 프랑스산 오크통(새 오크통 비율 70%)에서 숙성하고 12개월간 병숙성을 진행한 뒤 출시한다. 카베르네 프랑과 함께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 프티 베르도를 블렌드한 이 와인의 생산량은 연간 3만 병 수준이다.
비세르노가 담긴 잔에 코를 대면 화려하고 우아한 와인이라는 느낌이 바로 든다. 입에 머금으면 과일향이 농밀하고 탄탄한 보디감과 적당한 산도의 완벽한 조화가 느껴진다. 여기에 매콤한 향신료향은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입안을 가득 채우지만 결코 무게감이 과하지 않고, 과일향이 달콤하지만 결코 노골적이지 않다. 전반적인 밸런스가 뛰어나고 절제미가 돋보이는 와인이다.

[테누타 디 비세르노 와인들, 좌로부터 비세르노, 일 피노 디 비세르노, 인솔리오]
비세르노 바로 아래 등급으로는 일 피노 디 비세르노(Il Pino di Biserno)가 있다. 카베르네 프랑 35%, 카베르네 소비뇽 32%, 메를로 25%, 프티 베르도 8%를 블랜드해 만드는 이 와인의 연간 생산량은 약 8만 병이다. 와인의 65%는 프랑스산 오크(새 오크와 사용된 오크 혼용)에서 숙성시키고 35%는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에서 12개월간 숙성시켜 오크의 영향을 최소화했다. 그래서인지 일 피노 디 비세르노에서는 화사함이 돋보인다. 타닌이 탄탄하면서도 매끄럽고 과일향이 풍부하며 매콤한 향신료향과 은은한 꽃향이 어우러져 있어 한식과도 잘 어울린다. 병숙성 없이 마실 수 있는 와인이지만 10~15년 정도는 병숙성이 가능하다.
테누타 디 비세르노 와인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것은 인솔리오(Insoglio)다. 수령이 5년 정도인 어린 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이 와인은 시라가 30%로 블렌드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여기에 메를로 25%, 카베르네 프랑 25%, 카베르네 소비뇽 15%, 프티 베르도 5%가 블렌드 되어 있다. 탄탄하면서도 푸근한 타닌이 매력적이고 과일향이 좋아 부드러움과 구조감의 균형을 잘 잡혀 있다. 인솔리오는 엔트리 레벨이지만 로도비코는 이 와인을 양조할 때 무척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한다. ‘기본적인 와인이 맛있어야 소비자가 그 윗등급 와인에도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일 피노 디 비세르노]
인솔리오는 토스카나 사투리로 맷돼지들이 쉬는 휴식처를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인솔리오 레이블에는 맷돼지가 그려져 있다. 비세르노와 일 피노 디 비세르노에는 맷돼지 두 마리가 그려진 휘장이 눈에 띈다. 이 맷돼지 두 마리는 형 피에로와 동생 로도비코를 상징한다. 평생 가문과는 별개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온 로도비코지만 60이 다되어 테누타 디 비세르노를 설립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형과 손을 잡았다. 와인 양조와 마케팅은 로도비코가 책임을 지고 형 피에로는 경영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비세르노도 1800년대 안티노리 가문이 소유했던 성의 이름이라고 한다. 불행히도 이탈리아 내전 때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없지만, 로도비코가 이제 자신의 와인에 가족을 담고자 하는 것 같아 따뜻함이 느껴진다.
테누타 디 비세르노의 와인들을 맛보면 튀는 개성보다 아름다운 조화가 느껴진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농밀함과 우아함을 두루 갖추고 있다. 오르넬라이아, 마세토에 이어 그의 세 번째 프로젝트인 테누타 디 비세르노. 로도비코의 나이도 이제 75세다. 하지만 비세르노가 과연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의 도전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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