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권위, 묵직하고 탄탄한 맛, 제임스 본드의 샴페인. 모두 볼렝저를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2018년10월 마지막날, 볼렝저의 제네럴 매니저 샤를-아르망 드 벨레네(Charles-Armand de Belenet)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를 인터뷰하며 볼렝저의 역사, 품질의 비결, 그리고 볼렝저의 대표 샴페인을 시음해 보았다.

[샹파뉴 지방 아이 마을에 위치한 볼렝저 샴페인 하우스]
볼렝저의 시작과 성장
볼렝저는1829년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작은 마을 아이(Ay)에서 시작됐다. 해군 장성 출신 귀족 빌레르몽(Villermont)이 마케팅을 담당 조셉 볼렝저와 셀라 마스터 르노댕과 함께 볼렝저를 설립했다. 초창기에는 르노댕 볼렝저라는 이름으로 출시했지만, 조셉 볼렝저가 빌레르몽의 딸과 결혼하면서 샴페인 이름이 볼렝저가 됐다.
볼랭저는1884년 샴페인 가운데 최초로 영국 왕실인증(Royal Warrant)을 받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장은 빌레르몽의 증손자인 자크의 아내 릴리가 볼렝저를 경영하면서부터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포도밭을 돌보던 생전의 릴리 모습]
2차 대전이 한창이던1941년 자크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릴리는 볼렝저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포도밭은 황페화됐고, 독일군의 약탈도 심했다. 남자들은 군대로 떠났고, 마을에는 여자들밖에 없었다. 아이는 주민이 겨우 2000명 남짓인 작은 마을. 이웃은 곧 친척이었다. 40대 초반 여자의 몸으로 볼렝저와 마을을 모두 지켜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릴리는 버려진 포도밭을 매입하고 망가진 밭을 재건하는 등 부활에 힘썼다.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영어에도 능통했던 그녀는 전쟁이 끝나자 전세계를 다니며 마케팅에도 힘썼다. 1960년대에 여자가 마케팅 활동을 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볼렝저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졌고, 최고급 샴페인 반열에 오르게 됐다.

[007 골든 아이에 등장한 볼렝저]
제임스 본드와의 인연
197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007 영화를 만드는 이온 프로덕션(Eon Production)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원작소설에도 볼렝저 샴페인이 등장하니 영화에 샴페인을 제공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볼렝저는 무료 협찬을 하지 않기에 제안을 점잖게 거절했지만 대신 이온 프로덕션을 만찬에 초대했다. 이것이 볼렝저와 이온의 긴 인연의 시작이다. 단 한 번의 만찬으로 급격히 가까워진 이들은 이후 매년 만찬을 함께 하는 친한 친구가 됐다.
물론 볼렝저도 007영화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협찬이 아닌 친구로서의 협력이었다. 볼렝저와 이온 사이에는 별도의 협찬 계약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매년 만나는 자리에서 다음 기획하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자리에서 서로 악수하며 볼렝저 샴페인도 출연한다고 구두로 약속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볼렝저는1979년 문레이커부터 최신작인 스펙터까지 007 영화마다 본드의 샴페인으로 등장했다. 2020년 출시될 007 새 영화에서도 볼렝저는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라고 한다.
맛의 비결
볼렝저만큼 제임스 본드와 어울리는 샴페인도 없다. 농익은 과일향, 응축된 향미, 탄탄한 질감은 건장하고 우아한 본드의 모습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볼렝저의 뛰어난 맛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선 제일 좋은 포도즙만 이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볼렝저의 밭 크기는 총33,000헥타르, 1 헥타르당 포도 수확량은 약10,000kg이다. 볼렝저 샴페인 한 병을 만드는 데 약 1.4kg의 포도가 필요하므로 단순히 계산하면 헥타르당 생산량은 약7~8천 병이다. 하지만 볼렝저의 생산량은 헥타르당 5천 병밖에 되지 않는다. 제일 좋은 즙만 골라내 샴페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피노 누아의 함량이 많다는 점 또한 품질이 남다른 이유다. 볼렝저의 모든 샴페인에는 피노 누아가 최소60% 이상 블렌딩 된다. 이는 볼렝저가 위치한 곳이 아이 마을이라는 점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아이야말로 샹파뉴에서도 가장 뛰어난 피노 누아가 재배되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샤르도네가 풋사과의 향미를 부여한다면, 피노 누아는 붉은 사과의 맛을 낸다. 빨갛게 잘 익은 사과의 달콤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캐러멜과 버섯 등 풍부한 복합미로 변한다. 바로 이 맛이 볼렝저가 가진 특유의 맛인 것이다.
긴 숙성도 볼렝저의 품질을 완성하는 요소다. 볼렝저의 기본급 샴페인인 스페셜 퀴베가 최소 3년, 빈티지 샴페인인 라 그랑 아네는 최소 7년, R.D.는 빈티지 샴페인의 두 배인14년간 숙성된 뒤 출시된다. 볼렝저의 뛰어난 복합미는 시간이 만들어 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볼렝저의 지하 셀러]
이 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생산하는 모든 샴페인이 긴 숙성을 거치려면 셀러의 크기가 엄청나야 할텐데, 볼렝저의 셀러는 과연 얼마나 큰 걸까. 놀랍게도 셀러의 총 길이가 7km나 된다고 한다. 자칫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래서 볼렝저에 입사한 직원은 셀러 지도를 그리며 내부를 익히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2013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신입사원이 셀러 내부를 구석구석 익히다 1830년산 볼렝저가 보관된 곳을 발견한 것이다. 셀러 일부가 전쟁 때 무너진 적이 있는데 아마 이곳이 그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1830년산 볼렝저는 오래 묵은 화이트 와인 맛이었다고 한다. 기포는 거의 사라지고 없어지만 숙성된 과일향은 일품이었을 듯하다.
볼렝저는 모든 작업을 기계보다 사람 손에 의존한다. 샴페인 맛과 품질은 장인의 숙련된 손끝에서 온다고 강하게 믿기 때문이다. 스페셜 퀴베를 제외한 모든 샴페인은 사람이 손으로 리들링(riddling) 작업을 진행한다. 2차 발효와 긴 숙성을 거칠 때도 쇠로 만든 뚜껑 대신 코르크로 병을 마감한다.
전통을 중시하지만 품질을 위해 최신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도 볼렝저는 적극적이다. 볼렝저는 밭을 일일이 분석한 뒤 특성 별로 작은 구획으로 나눈다. 그리고 구획별로 포도의 재배와 수확을 달리한다. 발효도 작은 배럴에서 구획별로 이루어진다. 이렇다 보니 배럴의 수요도 엄청나다. 볼렝저가 베럴 제작사를 직접 소유하고 있는 몇 안되는 샴페인 하우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기농으로 관리되는 볼렝저의 포도밭]
볼렝저는 자사 포도밭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포도를 직접 재배해야 맛과 품질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포도의 맛보다 볼렝저가 신경 쓰는 것은 환경이다. 건강한 흙에서 맛있는 포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건강한 토양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지금부터 노력해야 다음 세대가 그 혜택을 본다. 그래서 볼렝저는 지금도 밭이 매물로 나오면 매입에 적극적이다. 최근에도 밭을 추가 매입했다고 한다. 참고로 샹파뉴의 땅값은 헥타르당 약 15억원쯤 한다.
수작업에 필요한 막대한 인력, 긴 숙성, 베럴 제작사 보유, 토양의 보존. 이 모든 것은 막대한 투자를 요한다. 하지만 볼렝저는 언제나 투자에 과감하다. 이는 볼렝저가 가족소유 샴페인 하우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재 가족소유를 유지하는 샴페인 하우스는 몇 안된다. 주주가 따로 없는 가족 사업이기에 당장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는 투자에도 볼렝저는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볼렝저의 맛과 품질의 원찬이 아닐까.

[한국을 방문한 샤를-아르망 드 벨레네 제네럴 매니저]
볼렝저 테이스팅
샤를-아르망 드 벨레네씨와 함께 시음한 볼렝저 샴페인은 스페셜 퀴베,로제, 라 그랑 아네2007, 세 가지였다. 벨레네씨는 볼렝저 샴페인은 일반 샴페인보다 약간 높은 온도인10~12도에서 마실 것을 추천했다. 볼렝저가 가진 풍부한 향미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다. 기포가 좀 없어지더라도 볼렝저 샴페인은 잔에 따른 뒤 조금 두었다 마시면 더욱 맛있다고도 했다. 일반 와인처럼 볼렝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공기와 접촉하며 향미 풍부하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볼렝저 스페셜 퀴베, 로제, 라 그랑 아네 2007]
볼렝저 스페셜 퀴베 NV (Bollinger Special Cuvee, NV)
볼렝저의 기본급 샴페인이다. 이름이 스페셜 퀴베인 것은 입맛 까다로운 영국인들이 ‘Your Cuvee is Special!’이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영국인들의 볼렝저 사랑은 대단하다. 그래서 그들은 볼렝저를 이름보다 볼리(Bolly)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스페셜 퀴베는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샤르도네를 블렌딩해서 만든다. 피노 누아의 함량은 60%이며, 와인의 절반은 그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것, 나머지 절반은 이전에 만들어 숙성시켜 둔 와인을 섞는다. 와인의 숙성도 스테인레스 탱크,배럴, 매그넘 병 등 다양한 용기를 이용한다. 다양한 맛을 내는 숙성 와인을 얻기 위해서다. 오래 숙성시킨 와인의 함량이 많아 스페셜 퀴베는 엔트리급임에도 불구하고 복합미가 탁월하다.
스페셜 퀴베를 코에 대면 농익은 사과의 달콤함과 흰 복숭아의 부드러운 과일향이 풍부하게 피어오른다. 부드럽고 매끈한 질감은 세련미를 더하고, 긴 여운에서는 상큼함이 맴돌아 나도 모르게 잔을 또 집어들게 만든다. 매콤함이 살짝 느껴지는 새우요리와 스페셜 퀴베의 궁합도 환상적이었다.
볼렝저 로제 NV (Bollinger Rose NV)
볼렝저 로제는 화이트 와인에 피노 누아 레드 와인을 약5% 섞어 만든다. 그런데 여기에 섞는 피노 누아 와인이 남다르다. 바로 볼렝저가 생산하는 라 꼬뜨 외 엔판(La Cote Aux Enfants)이다. 라 꼬뜨 외 엔판은 아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피노 누아 와인이다. 구조감이 탄탄하고 맛과 향이 워낙 진해 로제 샴페인을 만들 때 5%만 섞어도 충분하다. 일반 로제 샴페인에 레드 와인 함량이 20%인 것에 비하면 매우 적은 양이다. 라 꼬드 외 엔판은 시판하는 와인이지만 생산량이 워낙 적어 찾기가 쉽진 않다.
로제를 맛보면 신선한 딸기, 체리, 라즈베리 향이 부드럽게 올라온다. 질감이 크림처럼 부드럽지만 탄탄한 구조감도 매력적이다. 살짝 느껴지는 향신료의 매콤함은 와인에 활력을 더한다. 샴페인이라기보다 섬세한 레드 와인을 마시는 느낌이다. 해산물에 곁들여도 좋지만 육류와 즐겨도 손색이 없다.
볼렝저 라 그랑 아네2007 (Bollinger La Garnd Anee 2007)
2007년산 빈티지 샴페인이다. 블렌딩 비율은 피노 누아70%와 샤르도네30%다. 2007년이 기후가 아주 좋은 해는 아니어서 볼렝저는 평소보다 약2주 정도 늦게 수확 시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신의 한수였다. 2주간 환상적인 기후가 이어지며 포도가 충분히 익었기 때문이다.
라 그랑 아네의 발효는100% 오크 배럴에서 이루어진다. 2차 발효 후 숙성할 때도 코르크로 병을 마감한다. 리들링 또한100% 수작업이다. 볼렝저는 보통 라 그랑 아네를 7년간 숙성시키지만 2007년산은 9년을 숙성시킨 뒤 출시했다.
맛을 보면 레몬, 유자, 모과, 꿀, 미네랄 등 아로마의 복합미가 남다르다. 묵직한 보디감과 실크처럼 매끄러운 질감에는 우아함이 가득하다. 깔끔하고 상큼한 레몬향이 감도는 여운에서는 세련미가 넘친다.
볼렝저에는 위 시음한 와인 외에 라 그랑 아네 로제, R.D., 비에유 빈뉴 프랑세즈(Villes Vigne Francaises) 가 있다. 비에유 빈뉴 프랑세즈는 필록세라에서 살아남은 늙은 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다. R.D.나 비에유 빈뉴 프랑세즈는 매년 생산되지 않고 워낙 소량이어서 쉽게 맛보기 힘들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다.
볼렝저는 생산하는 샴페인 종류가 많지 않다. 이는 ‘Ultimate Sophistication is Simplicity’, 즉 ‘단순함에서 최고의 품질이 나온다’는 것이 그들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포도와 포도즙만 사용하고, 수작업을 고집하는 장인정신, 긴 숙성을 기다리는 인내심 등이 품질을 유지하는 비결인데, 샴페인 종류가 많아서는 이 전통을 결코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볼렝저의 주장이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멋진 신사 제임스 본드.이 남자만큼이나 볼렝저도 이상적인 샴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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