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루아(Terroir)는 살아있는 우주입니다." 포도밭의 토양은 물론 그를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을 통칭하는 개념인 떼루아, 그 떼루아를 가장 중시한다는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역에서 불개입주의(no interventionism)를 주창하며 와인을 만들고 있는 필립 파칼레(Phillipe Pacalet)씨가 시음회의 첫 머리에 한 말이다. 지난 1월 17일 오후 7시 수입원 비티스의 주관하에 서울 강남 신사동 포도플라자에서 부르고뉴의 와인 메이커(wine maker) 필립 파칼레씨와 함께한 시음회가 열려 그의 와인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필립 파칼레 씨는 보졸레(Beaujolais) 와인의 평가를 높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마르셀 라피에르(Marcel Lapierre)의 조카로 자연주의 농법을 고수하는 와인 메이커이다. 부르고뉴 최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도멘 르루아(Domaine Leroy)와 남부 론(Southern Rhone)의 유명 생산자 샤또 라야스(Chateau Rayas)에서 연수했으며 르루아(Leroy)의 조카인 앙리 프레데릭 로슈(Henri-Frederic Roch)가 소유한 도멘 프리외레 로슈(Domaine Prieure Roch)에서 10년 동안 에스테이트 매니저(estate manager)로 일했다.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꿈의 와인인 로마네 콩띠(Romanee Conti)를 만드는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Domaine de la Romanee Conti)로부터 양조장을 맡아달라는 지속적인 요청에도 자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거절한 일화로 유명한 그는 2001년부터 부르고뉴에서 9ha의 포도밭을 임대하여 자신의 와인을 만들고 있다.
화려한 경력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더욱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커리어를 통해 형성된 와인에 대한 신념으로 땅의 맛(Taste of Land), 즉 떼루아를 드러내려는 그의 ‘자연주의’ 철학이다. 일례로 와인학자인 쥘 쇼베(Jules Chauvet)와 함께 3년 동안 야생 효모(wild yeast)가 와인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그는 땅에 존재하는 자연 효모와 미생물 보호를 위해 화학 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병입(甁入) 시를 제외한 양조 과정 전반에 걸쳐 이산화황(SO2)를 쓰지 않아 자연 효모가 사멸하며 발생하는 리(lees)가 일반적인 리에 비해 와인에 좀 더 복합적인 풍미를 부여하고 보존제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16-18개월의 숙성기간 동안 보통 2~3회 실시하는 통갈이(racking)을 생략하고 리의 접촉 기간을 늘려 통갈이 중 와인이 산소와 만나 산화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이것도 이산화황 사용 억제의 일환이다. 반면에 이산화황을 많이 쓰는 일반적인 양조 방법은 필연적으로 산소와 자주 만나야 하므로 이 과정에서 와인 고유의 풍미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화학비료와 이산화황 사용을 최소화함으로써 자연에 가까운 와인을 만든다.
오랜 에스테이트 매니저 경험을 통해 "자연을 관찰하면 더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는 그는 이산화황 사용을 줄이고 나아가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밭에서의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포도나무 증식에 사용되는 셀렉션 마살레(selection massale)로 생산량은 많으나 질병 저항력이 떨어지는 포도나무 클론을 사용하지 않고 건강한 포도나무를 선별하여 번식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질병 저항력이 뛰어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도 풍미가 농축된 작은 포도송이를 얻을 수 있다. 이외에도 신중하게 대목을 선정하고 전통적인 방식대로 줄기를 포함한 포도송이 전체를 양조에 이용하는 등 ''밭의 일''에서부터 주의를 기울인 결과 양조에서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시종일관 반짝이는 눈빛과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가던 그는 마지막으로 ‘와인은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과 즐기는 음료’라는 점을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와인 메이커나 마케팅 담당자들이 시음 와인를 남겼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잔에 담긴 와인을 깨끗하게 비운 그의 모습은 시음할 때 조차 와인을 즐기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는 듯 했다. 비오디나미(biodynamie) 농법에 가깝게 와인을 생산하면서도 비오디나미 인증을 굳이 받지 않는 이유도 ‘자신은 그저 떼루아를 잘 드러내며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라고 밝히는 필립 파칼레씨. 그 모습이 순수하고 생기 넘치는 자신의 와인을 그대로 닮았다.
시음 와인
Philippe Pacalet, Chablis 1er Cru Beauroy 2008
금빛 감도는 그린레몬 페일(pale) 컬러인데 샤블리 치고는 살짝 컬러의 인텐시티(intensity)가 있다. 첫 아로마는 꽃밭에서 나는 오묘한 향기와 밤 같이 달콤한 견과의 부드러움, 그리고 시트러스 류의 산뜻한 향기와 미네랄이 살짝 더해진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견과의 향이 강해지다가 나중에는 파인애플과 같은 열대 과일의 아로마로 넘어간다. 입에서는 생생한 산미가 길게 이어지는데 한 모금 넘기면 리(lees)의 뉘앙스가 목을 타고 올라온다. 산미와 리의 풍미가 어우러져 짭쪼롬하면서도 깔끔한 인상을 주며 마지막 모금의 크리미한 풍미가 긴 여운을 남긴다.
Philippe Pacalet, Gevery-Chambertin 2008
옅은 다홍빛에 투명한 림(rim)을 가진, 석류주스보다도 가벼운 컬러. 아직 많이 어려서 라즈베리와 딸기향이 주를 이루지만 약간의 꿈꿈함이 떼루아의 정체성을 속삭여 준다. 타닌은 은은하고 산도가 강한 편인데 목으로 넘어간 와인의 여운은 상당히 긴 편. 약간은 단순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조금 더 숙성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진다.
Philippe Pacalet, Pommard 1er Cru 2008
즈브레 샹베르땅보다는 확실히 짙은, 하지만 여전히 인텐시티가 낮은 페일 루비 컬러. 조금은 잘 익은 듯 달콤한 라즈베리, 체리향에 톡 쏘는 스파이스가 더해진다. 향의 덴시티(density)가 높으며 스월링을 할 수록 블랙베리 같은 검은 과일 아로마가 드러난다. 입에서의 구조감이 좋은 편으로 비교적 진한 과일 맛이 어필하는 와인. 마지막 모금에서는 캬라멜 향도 드러나는 듯.
Philippe Pacalet, Chambolle-Musigny 1er Cru 2008
이 와인 또한 앞의 와인들처럼 여린 컬러. 커다란 부르고뉴 전용 잔에 코를 깊숙이 넣는 순간 방순한 딸기향이 비강에 가득 차며, 스월링을 하니 장미향과 이끼 같은 미네랄이 느껴진다. 금일 시음 와인 중 가장 강한 산도는 마치 부드러운 비단 안에 숨겨진 은장도처럼 예리하다. 부드러운 타닌과 산의 조화는 섬세하면서도 ‘엣지있다’는 인상을 준다. 정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와인.
참고로 테이스팅을 하면서 파칼레씨는 와인을 시음하면서 각각의 아로마를 기억하는 것도 좋지만 와인의 스타일을 이미지화 하는 것이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시음회가 거의 끝날 즈음 한 참가자로부터 ''오늘 시음한 와인들에 대한 파칼레 씨의 이미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파칼레 씨는 다음과 같이 개성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즈브레 샹베르땅은 ''동그라미 안의 사각형’이며 포마르 1er Cru는 '' 반원 안에 세모'', 샹볼 뮈지니 1er Cru는 ''동그라미 안의 별''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이었지만 솔직히 그의 생각이 어땠는지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필자가 형상화한 그의 와인에 대한 전반적인 이미지는 ''가는 펜촉으로 그린 동양화''인데 문득 이런 표현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진다.
Copyrights © 와인21닷컴 & 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