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에서 만난 와인 한 잔.
프랑스 현지 시각으로 3월 21일 오전 9시. 꼬뜨 도르의 중앙에 위치한 도시 본느(Beaune)에서는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Grands Jours de Bourgogne)행사가 진행될 시간이었지만, 나의 발걸음은 본느와 반대 방향인 즈브레-샹베르땅(Gevrey-chambertin)을 향하고 있었다. 부르고뉴의 수많은 생산자들이 출품하는 양질의 와인들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지만, 이런 전시회 성격의 행사는 왠지 모르게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취사선택의 부담과 비슷한 것일까, 혹은 사람으로 가득 찬 행사장 분위기가 번잡한 대도시의 빽빽한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까. 이런 행사의 의도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사람에 치이며 머금었던 와인들을 만든 사람 앞에서 쭉쭉 뱉어내야 하는 상황은 어렵고도 피곤하다. 20일 하루 만으로도 이미 입과 혀는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는 2년에 한번 샤블리(Chablis)부터 마꼬네(Maconnais)에 이르는 부르고뉴 전체 아뻴라시옹이 참여하여 일주일 동안 와인 시음을 비롯한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되는 매력적인 행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과감하게 옆길로 새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은 부르고뉴,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성지 아닌가? 행사장 말고도 보고 듣고 마시고 느낄 것은 천지에 널려 있었다. 그렇게 처음 찾아가기로 약속을 정한 곳이 메종 루 뒤몽(Maison Lou Dumont)이었다. 바로 부르고뉴에서 최초로 직접 와인을 만들고 있는 한국인, 박재화 대표가 운영하는 곳이다.
숙소가 있던 본 로마네(Vosne-Romanee) 마을에서 메종 루 뒤몽이 있는 즈브레-샹베르땅 마을로 D974 국도를 타고 쭉 올라가다 보면 양쪽으로 광활한 포도밭들이 펼쳐진다. 특히 왼쪽에 포진한 밭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애호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부조(Vougeot), 샹볼-뮈지니(Chambolle-Musigny), 모레-생-드니(Morey-Saint-Denis) 마을의 특급, 일급 밭들이다. 특히 하나의 그랑 크뤼(Grand Cru)에 다양한 생산자들이 존재하는 끌로 부조(Clos Vougeot)의 돌담에는 유명 생산자들이 경쟁적으로 설치해 놓은 멋들어진 대문들이 쭉 늘어서서 장관을 연출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포도밭 그 자체. 은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는 포도나무들을 볼 때의 환희는 직접 와인을 마실 때의 감동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와인과 떼루아의 연계를 감정적으로나마 체험하는 순간이다.
즈브레-샹베르땅 마을에 도착해 중앙 광장에 차를 세우고 메종 루 뒤몽을 찾아갔다. 광장 옆 골목길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다급히 부르는 친숙한 언어가 들린다. 바로 박재화 대표. 대문 밖을 힐끗 보니 왠 동양인이 지나가길래 필자임을 직감하고 부르러 나오셨단다. 한국에서 몇 번 뵌 적은 있었지만 하마터면 길을 헤맬 뻔 했던 필자를 구해 주었기 때문인지 더욱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대문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Maison Lou DUMONT’ 명패를 지나 메종으로 들어섰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작은 꽃길과 현관 내부에 마련된 공간은 소박하지만 깔끔하고 실용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박재화 대표의 성격을 가늠하게 해 주었다. 서툰 영어 때문에 생산자를 만날 때는 항상 긴장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한국말로 인사를 나누고 안내를 받으니 일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
배럴 테이스팅(barrel tasting)을 위해 지하 셀러로 가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동행한다. 박재화 대표가 이 집을 구입할 때 생후 10일 정도의 새끼로 발견되었던 녀석이란다. 그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키우기로 마음먹었는데 사람도 잘 따르고 지하 셀러를 그렇게나 좋아한다고. 고양이 조차 와인 익는 향기의 매력을 아는가 보다. 어둡고 습한 지하지만 온화한 전등 빛과 오크통 밖으로 새어 나온 은은한 와인 향기가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조용히 와인을 주고받으며 테이스팅을 시작한다. 숙성 중인 오크통에서 와인을 꺼내어 서로의 빈 잔에 나누어 따른 후 와인을 음미하면 그뿐이다. 전형적인 슬로우 테이스터(slow taster)인 나에게 이런 환경과 분위기에서의 테이스팅은 훨씬 더 여유롭고 편안하다. 물론, 와인 자체의 관능 검사만을 생각한다면 시각과 후각 등 여러 감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런 환경에서의 시음이 꼭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생산자와 와인을 나누며 이야기를 주고 받다 보면 와인뿐만 아니라 그 와인을 만든 사람에 대해 좀더 깊이 알게 되는 것 같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와인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느낌이랄까. 한마디로 와인 공감이다.
와인을 시음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야기는 와인을 넘어 사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육아/교육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아이 키우기가 수월하다는 부러운 이야기부터 박재화 대표가 와인 메이커이자 남편인 나카타 코지(Nakata Koji)씨를 만나 결혼하게 된 사연에 이르기까지, 마치 친한 벗을 만나 수다를 떠는 듯 편안하다. 프랑스 문화적 성격의 일면을 드러내는 이야기도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는 도시나 마을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대성당(Cathedral)을 중심으로 일정 거리 내의 건축 스타일을 규제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심지어 마을 별로 창틀 색 등을 지정하기도 한다니 놀랍기만 하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프랑스에서 이렇게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니. 하지만 공동체의 문화, 넓게는 프랑스의 유산을 보존한다는 면에서는 합리적인 요소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 결과 당사자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이익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와인 법규도 이런 식의 꼼꼼한 규제가 그대로 적용되는 듯 하다. 예컨대 AOC 등급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와인 메이커의 창의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규정으로 인해 오랜 경험을 통해 일구어 온 정체성을 지킬 수 있고, 전통 안에서 생존하기 위한 융통성과 더욱 발전하기 위한 창의성이 움트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이 현재 프랑스를, 특히 부르고뉴를 세계 와인 애호가의 성지로 만든 요인이 아닐까.
시음한 와인들은 대부분 2010년 빈티지들.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 행사에 출품된 와인들도 대부분 2010 빈티지였던 만큼, 조만간 병입될 와인들이었다. 2010년은 추웠던 봄의 영향으로 수확량이 30-50% 가량 감소했고 날씨의 변덕이 심해 쉽지 않은 해였다. 그래서 더욱 정성이 많이 들어갔고, 이런 요소들이 조합되어 클래식한 부르고뉴 와인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배럴에서 막 나온 녀석들을 조심스레 시음하니 역시 각 떼루아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꼬르똥 그랑 크뤼(Corton Crand Cru)는 소박하고 털털한 스타일에 힘이 넘친다. 즈브레-샹베르땅 프르미에 크뤼 라보 생-자크(Gevrey-Chambertin 1er Cru Lavaut Saint-Jacques)는 발랄하면도 구조감이 뛰어나며 샤름-샹베르땅 그랑 크뤼(Charmes-Chambertin Grand Cru)는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이 넘친다. 하지만 메종 루 뒤몽의 와인을 하나로 묶어 스타일을 규정한다면? 예컨대 섬세함과 파워를 X축, 화려함과 단아함을 Y축의 양 끝으로 하여 사분면을 그린 후 루 뒤몽의 와인을 위치시킨다면 아마 그의 와인은 섬세함과 단아함의 사분면에 위치할 듯 하다. 박재화 대표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와인 메이커인 나카타 코지 씨의 스타일이란다. 이렇듯 빈티지의 영향과 각 떼루아의 특징, 그리고 메이커의 손길이 어우러져 와인의 성격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루 뒤몽의 레이블이 표현하고 있는 천지인(天地人)의 조화이리라.
짧은 만남 후의 긴 헤어짐, 그리고 더욱 긴 여운. 시음을 마친 후 아쉬움을 남긴 채 와이너리를 나설 때 박재화 대표는 시음 중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라고 밝힌 와인 한 병과 책 한 권을 손에 쥐어 주었다. 훈훈한 인심에 감사하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어느 날 부르고뉴 와인 한 잔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따뜻한 봄날 메종 루 뒤몽의 글라스 안에는 부르고뉴의 여유와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언제 어디서 이런 와인 한 잔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메종 루 뒤몽의 와인들은 비티스를 통해 국내에 수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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