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로 데 레아, 그리고 그로 패밀리
메종 루 뒤몽(Maison Lou Dumont)을 뒤로하고 다시 남쪽으로 이동한다. D974 국도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 다시 본
-로마네(Vosne-Romanee) 마을. 그 유명한 로마네-꽁띠(Romanee-Conti)를 비롯하여 부르고뉴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그랑 크뤼(Grand Cru)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마을 중간쯤에 위치한 메리 광장(Plaza de Mairie)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본다. 시간이 멈춘 듯 4년 전 처음 부르고뉴를 방문했을 때와 변한 게 거의 없다. 우선 광장의 북쪽 끝에 있는 멋들어진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광장의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정삼각형 모양의 프르미에 크뤼 끌로 데 레아(Vosne-Romanee 1er Cru Clos des Reas)의 한쪽 꼭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 밭의 주인은 도멘 미셀 그로(Domaine Michel Gros). 본-로마네에서 대를 이어 와인을 만들고 있는 그로 패밀리(Gros family)의 일원으로 바로 지금 소개하려는 도멘이다.
말이 나온 김에 잠시 끌로 데 레아 이야기를 해 보자. 2.12 ha 크기의 이 밭은 약간의 경사면에 상당량의 석회석(limestone)이 섞여 있어 배수가 좋으며 이회토(marl) 토양은 와인에 우아한 향기와 실키한 타닌을 부여한다. 도멘 미셀 그로가 독점 소유하고 있는 이른바 ‘모노폴(Monopole)’로 루이 귀스타브 그로(Louis Gustave Gros)가 1860년 이 밭을 인수한 후 5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2009년은 그로 패밀리가 끌로 데 레아를 구입한 지 150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평상시와 다른 레이블로 출시되었다.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Paris Universal Exhibition)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직후 만들어진 첫 번째 레이블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특히 2009년 빈티지는 좋은 해로 평가되기 때문에 와인 수집가의 눈길을 끌 만한 의미 있는 한정판이 아닐 수 없다.

끌로 데 레아
끌로 데 레아가 15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하는 동안 그로 패밀리는 평론가와 와인업계, 그리고 애호가들이 인정하는 본-로마네의 주요 생산자로 성장하였다. 또한 루이 귀스타브의 증손자인 루이 그로(Louis Gros)의 자식들이 각각 포도밭을 상속받아 와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가족 내에서도 다양한 개성들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루이의 셋째 아들 프랑수아(Francois)의 딸로 1988부터 와인을 만들어 온 안느 그로(Anne Gros)는 이미 포스트 르루아(post Leroy)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주가를 올리고 있다. 평가에 걸맞게 그녀의 와인은 단정하고 세련되면서도 진한 농축미를 선사한다. 첫째 아들 귀스타프(Gustave)와 막내딸 꼴레뜨(Colette)가 운영하던 그로 프레르 에 서르(Gros Frere et Soeur)는 현재 그들의 조카인 베르나르 그로(Bernard, 장(Jean)의 막내 아들)가 양조를 담당하고 있다. 그의 와인은 가볍게 떠오르는 아로마와 화려하고 밝은 풍미를 지닌 사랑스러운 와인이다. 그리고 뽀마르의 와인메이커 프랑수아 빠렁(Francois Parent)과 결혼한 장의 둘째인 안느-프랑수아즈(Anne-Francoise) 또한 남편의 도움을 받아 본인의 이름으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좌: 도멘 안느 그로. 와인뿐만 아니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레이블 또한 그녀를 닮았다.
중앙: 도멘 그로 프레르 에 서르. 화려한 금빛 잔은 마치 바쿠스의 축제로 초대하는 듯 하다.
우: 도멘 A.-F. 그로. 그녀의 와인은 레이블의 여성처럼 섬세하고 나긋나긋한 이미지다.
미셀 그로의 와인은 앞의 세 도멘의 와인과 비교하면 한 마디로 소박하다. 그림이 그 그림을 그린 화가를 닮듯이, 와인도 만드는 사람과 도멘의 분위기를 닮는 것 같다. 깔끔한 게스트 하우스와 까브(Cave) 뒷편으로 아담하게 정원을 가꾼 도멘 안느 그로나, 멋들어진 현관과 전통 타일 등으로 화려하게 지붕을 장식한 도멘 그로 프레르 에 서르의 건물에 비하면 도멘 미셀 그로는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 정문을 들어서면 아무런 조경이나 장식도 없이 전면 작업실의 커다란 문과 좌측의 사무실이 보일 뿐이다. 하지만 도멘 미셀 그로가 드러내는 그 소박함이 어쩌면 부르고뉴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미셀 그로의 와인은 강하게 어필하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진정성이 느껴진다. 마치 순박한 농부의 수줍은 미소 같다고나 할까.
전날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 행사장에서 이미 2010년 빈티지를 만났지만, 역시 도멘 미셀 그로의 방문 목적은 2009년 빈티지 끌로 데 레아.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 행사장에서 이미 인사를 나눴던 담당자 줄리에뜨 베테리(Juliette Béthery) 씨의 안내로 지하 까브에서 다른 AOC 몇 종과 함께 끌로 데 레아를 시음했다. 시음이라기보다는 그냥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잔잔한 흙내와 스파이스, 감초, 잘 익은 과
일의 향기가 들이대지 않고 은은하게 올라온다. 절제된 오크 터치에 베리 풍미가 약간 직선적이지만 그만큼 방순한 매력이 있다. 미셀 그로 씨처럼 조금은 낮을 가린다는 느낌이 있어 흥미로웠다. 하지만 베테리 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스월링을 해 가며 맛을 보니 마지막 모금쯤엔 살짝 곁을 내어 준 듯 하다. 풍부한 타닌과 적절한 산미가 숙성에도 제격일 듯. 2009년은 필자의 결혼 빈티지이기도 해서 10년 후의 결혼 기념일을 위해 셀러에 한 병 넣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특별한 날에 어울리는 특별한 와인이니 말이다.
도멘을 나서며 인사를 하는데 미셀 그로 씨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오는 5월경에 한국 수입사와 끌로 데 레아의 버티컬 테이스팅(vertical tasting)을 계획하고 있는데 시간이 되면 꼭 오라는 것이다. 도멘 미셀 그로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끌로 데 레아의 버티컬 테이스팅이라니, 한국의 부르고뉴 애호가들에게 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잔인한 4월이 지나면 찾아올 미셀 그로와 그의 정직하고 순수한 와인들을 기대해 보자.


*끌로 데 레아 지도, 그로 패밀리 가계도, 본-로마네 1er 크뤼 끌로 데 레아의 기존 레이블, 150주년 기념 레이블 사진출처: 도멘 미셀 그로
*도멘 미셀 그로의 와인들은 KJ와인을 통해 국내에 수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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