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블리(Chablis)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이트 와인 중 하나이다. 한때 전 세계 화이트 와인 생산자의 벤치마크(benchmark)였으며 화이트 와인의 대명사로 여겨질 정도로 대중의 인지도가 높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명성에 비해 시장에서의 입지가 많이 작아진 듯 하다. 레드 와인을 선호하는 트렌드의 영향도 있겠지만, 부르고뉴(Bourgogne) 남부 화이트는 물론 샤르도네(Chardonnay) 품종으로 만들어지는 신세계 화이트 와인과의 경쟁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블리의 순수함과 독특한 미네랄리티(minerality)는 다른 지역의 샤르도네 와인이 표현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개성을 지닌다. 일례로 영국의 와인 평론가 휴 존슨(Hugh Johnson)과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이 공저한 <와인 아틀라스(The World Atlas of Wine)>는 샤블리를 ‘가장 과소평가된 보물 중 하나’이며 ‘지질학상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성을 가진 곳’으로 표현한다. 지난 3월 이틀간 샤블리의 세 와이너리를 방문하여 그 매력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장-마끄 브로까르(Jean-Marc Brocard): ‘좌안’과 ‘우안’의 차이
처음 방문한 곳은 샤블리 시내의 작은 건물에서 와인 샵과 게스트하우스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장-마끄 브로까르. 약 100ha에 이르는 포도밭에서 연 평균 60만병의 샤블리를 생산하는 제법 큰 규모의 생산자다. 쁘띠 샤블리(Petit Chablis)와 샤블리(Chablis)는 물론 다양한 프르미에 크뤼(Premier Cru)를 비롯하여 일곱 개의 그랑 크뤼(Grand Cru) 모두를 생산한다. 이렇게 다양한 샤블리를 비교적 대량으로 생산하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장-마끄 브로까르의 장점. 좋은 가격에 양질의 샤블리를 찾는 애호가라면 눈 여겨 볼 만 하다. 게다가 게스트 하우스에는 각종 요리기구 및 차와 잼 등이 갖추어져 있어 와이너리 투어 중인 배낭여행객이라면 숙소로도 안성맞춤이다. 숙소에 묵으며 시음을 요청하면 어렵지 않게 와인을 맛볼 수 있다.
와인샵 지하에 마련된 셀러에서 와인을 시음하면서 느낀 것은 샤블리 ‘좌안’과 ‘우안’의 차이다. 보르도 뿐만 아니라 샤블리에도 좌안과 우안이 존재한다. 샤블리 마을 옆을 남동-북서로 가로지르는 세렝(Serein) 강을 중심으로 일곱 개의 그랑 크뤼들은 모두 오른쪽에 위치해 있으며, 푸르숌므(Fourchaume), 몽테 드
또네르(Montee de Tonnerre) 등 유명한 프르미에 크뤼들은 주로 우안에 위치한다. 그에 반해 강의 좌측에는 일반급 샤블리를 생산하는 밭들이 대부분이며 유명한 프르미에 크뤼로는 몽맹(Montmains)과 바이용(Vaillons)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런 차이를 만든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밭의 방향. 지형의 특성상 우안의 주요 밭들은 대체로 남향 또는 남동향이다. 그에 비해 좌안의 밭들은 북향이나 동향, 동남향이 대부분이다. 그로 인해 좌안의 프르미에 크뤼와 우안의 프르미에 크뤼는 상당한 성격 차이를 보인다. 좌안은 파삭한 산도와 미네랄리티가 두드러지는 반면, 우안은 비교적 달콤한 과일 풍미가 미네랄과 조화를 이룬다. 좌안의 몽맹과 우안의 푸르숌므를 비교 시음하자 그 차이는 명확하게 드러났다.
Jean-Marc Brocard, Chablis 1er Cru Montmains 2010 : 섬세한 레몬라임 산미와 가벼운 허브, 날 선 미네랄 풍미. 컬러도 풍미도 옅은 느낌이지만 밀도는 높다. 전반적으로 음성적인 인상.
Jean-Marc Brocard, Chablis 1er Cru Fourchaume 2010 : 화사한 과일 향에 가벼운 미네랄리티. 잘 익은 과일 맛과 달콤한 바닐라 뉘앙스는 둥글고 편안한 터치와 어우러져 밝은 느낌을 선사한다.
크리스티앙 모로(Christian Moreau Pere & Fils): 그랑 크뤼의 개별성
다음날 오전, 날이 밝기가 무섭게 크리스티앙 모로 뻬레 에 피스를 찾아갔다. 이 도멘이 소유한 밭의 크기는 11.6ha.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소유한 밭의 절반에 가까운 5.2ha가 그랑 크뤼, 나머지 중 4.2ha는 프르미에 크뤼일 정도로 좋은 밭의 비중이 높다. 도멘은 샤블리 마을에서 그랑 크뤼 밭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물 벽에 달린 간판이 높이 자란 나무에 가려져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문 안 마당에도 작업에 필요한 도구나 장비가 쌓여있을 뿐 아무런 꾸밈이 없다. 사무실을 찾아가니 크리스티앙의 셋째 아들이자 도멘의 양조 책임자인 파비앙 모로(Fabien Moreau)가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끝내기가 무섭게 대뜸 묻는다. “그래, 원하는 게 뭐죠?” 도멘의 외관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파비앙도 꾸밈없고 직선적인 성격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짧게 대답했다. “우선 밭을 볼 수 있을까요?”그러자 그는 필자를 오래된 승합차에 태우고는 곧장 포도밭으로 향했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전면에 보이는 곳은 그랑 크뤼 레 끌로(Les Clos). 크리스티앙 모로가 소유한 가장 큰 밭으로 3.5 ha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중 0.5ha의 파셀(parcel)에서는 ‘끌로 데 오스피스(Clos des Hospices)’라는 개별 와인을 생산한다. 레 끌로의 표면은 흰색 돌로 빽빽하게 덮여 있는데 돌을 걷어 내면 자갈이 섞인 점토질 토양의 표토가 드러난다. 포도나무의 수령은 위치에 따라 37, 50, 62년. 잘 정돈된 포도나무의 잘린 가지 끝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무가 수액을 끝까지 빨아올려 싹을 낼 준비를 마쳤다는 증거이다. 파비앙이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싹 눈을 보여준다. 바야흐로 포도밭에 봄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파비앙은 그랑 크뤼의 토양을 이루는 키메리지안 토양(Kimmeridgian soil)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선주라기 시대(Upper Jurassic Period)의 조개 껍질들이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는 석회질 점토 토양이 남향의 가파른 언덕과 어울려 샤블리 그랑 크뤼의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근래 확대된 포도밭의 주요 토양인 포틀랜디안 점토질(Portlandian Clay)은 샤블리의 특징을 드러내기 어려우며, 이렇게 원래의 샤블리 밭보다 몇 배 확대된 포도밭에서 기계 수확을 통해 생산된 샤블리는 품질이 낮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현재 샤블리는 65% 이상 기계로 수확하지만 그는 100% 손 수확을 고수하고 있다. 게다가 도멘이 밭에서 가깝기 때문에 포도가 손상되기 전에 갓 수확한 싱싱한 상태로 양조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크리스티앙 모로의 그랑 크뤼 지도 (출처: 홈페이지)
자동차를 타고 남쪽의 블랑쇼(Blanchot)를 제외한 다른 그랑 크뤼들을 돌아보았다. 발뮈르(Valmur)는 레 끌로와 그르누이(Grenouilles) 사이에 위치한 그랑 크뤼로 레 끌로보다 점토질 토양이 더 많아 풍성한 아로마의 와인이 만들어진다. 골짜기에 고립된 지형으로 가운데 비포장 도로를 경계로 남동향과 북서향으로 나뉘어지는데, 각 부분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성격은 다른 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다르다고 한다. 발뮈르 북쪽엔 남동향의 보데지르(Vaudesir)가 있으며, 보데지르의 북쪽과 레 프뢰즈(Les Preuses)의 남쪽이 만나는 부분에 작은 건물과 함께 2 ha 크기의 라 무똔(la Moutonne) 끌리마(climat)가 위치하고 있다. 이 작은 밭은 공식적으로 그랑 크뤼는 아니지만 INAO(Institut National de Appellations d''Origine)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 레이블에는 그랑 크뤼라고 표기된다. 언덕을 내려오는 길목에는 가장 북서쪽에 위치한 그랑 크뤼인 부그로(Bougros)가 있다.
일곱 개의 그랑 크뤼 중 도멘 크리스티앙 모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총 네 종. 각 그랑 크뤼들은 떼루아와 빈티지를 고려하여 오크 비율을 조절하여 숙성하며 보통 수확 다음 해의 크리스마스 직전에 병입한다. 당연하게도 각 그랑 크뤼마다 색다른 개성을 드러낸다.
Christian Moreau Pere & Fils, Chablis Grand Cru Vaudesir 2010 : 향긋한 꽃 향기와 신선한 노란 과일 풍미가 밝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깔끔하고 여성적인 스타일.
Christian Moreau Pere & Fils, Chablis Grand Cru Les Clos 2010 : 가벼운 허브와 음성적 미네랄의 조화가 이끼 낀 돌 같다. 레몬 산미가 길게 이어지며 파워가 느껴지는 남성적인 와인.
Christian Moreau Pere & Fils, Chablis Grand Cru Valmur 2009 : 풍성한 꽃 아로마에 약간의 잔당감이 부드럽고 둥근 느낌을 준다. 2009년 빈티지는 따뜻한 빈티지로 신선한 스타일의 유지를 위해 평상시보다 이른 수확을 했다고 한다.
Christian Moreau Pere & Fils, Chablis Grand Cru Les Clos ‘Clos des Hospices’ 2009 : 향긋한 꽃 향기, 크리미한 느낌. 시원한 배와 잘 익은 열대과일의 풍미가 공존하며 오크 터치가 예쁘게 녹아 있다. 강한 산미는 마치 펜으로 그린 정밀묘사처럼 얇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끌로 데 오스피스’는 일반 레 클로에 비해 점토질 토양의 비중이 더 높다.
Christian Moreau Pere & Fils, Chablis Grand Cru Blanchot 2004 : 샤블리의 숙성에 대한 궁금증을 표현하니 며칠 전 오픈한 2004년 빈티지를 가져다 준다. 버섯, 빵 껍질, 오래된 나무와 치즈 향.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샤블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지만 매력적인 와인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파비앙은 샤블리의 신선한 풍미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3-5년 내, 그랑 크뤼라고 해도 7년 이내에는 마실 것을 추천했다.
루이 미셀(Louis Michel & Fils): 순수한 떼루아의 표현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루이 미셀 에 피스. 사실 이 와이너리를 방문하게 된 계기는 홈페이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문구 때문이었다.‘40년 전부터 와인 양조에 오크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심지어 “샤블리는 뫼르소가 아니다(Chablis is not Meursault)”라고 단언한다. 샤블리의 독특한 미네랄과 산미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크 숙성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상당 수의 생산자들이 오크를 사용하며, 그랑 크뤼 등 상급 샤블리의 경우 특히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처음 방문했던 장-마끄 브로까르도 오크 사용을 자제하는 스타일로 분류되지만 그랑 크뤼의 일부를 오크 배럴에서 숙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루이 미셀은 오크 숙성을 하지 않는 것일까? 도멘의 6대 소유주이자 와인메이커인 기욤 기코-미셀(Guillaume Gicqueau-Michel)는 ‘깨끗하고(clean) 신선하며(fresh) 정교한(precise)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샤블리의 독특한 떼루아에서 비롯되는 순수한 아로마와 깨끗한 풍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다른 영향을 최소화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샤블리에서 오크통을 사용한 이유는 오크 풍미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와인을 담을 용기가 오크통 밖에 없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스테인레스 스틸 용기가 있기 때문에 굳이 오크통을 쓸 이유가 없단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포도밭에서 질 좋은 포도를 얻는 일이며 이를 위해 지속 가능한 농법(sustainable viticulture)를 실시한다. 이는 양조에 자연 효모(natural yeast)만을 사용하는 밑바탕이 되며, 그렇게 생성된 양질의 효모 찌꺼기 위에서 오랜 기간 숙성하여 와인에 복합성을 더한다.
실제로 루이 미셀의 와인은 단단한 구조감 속에서 섬세한 미네랄과 순수한 과일 풍미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오크 숙성 없이도 이런 골격과 풍미를 표현할 힘을 지닌 것이 샤블리의 떼루아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기욤은 한국 시장에도 자신의 와인을 꼭 소개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조만간 그 바램이 이루어져 한국의 애호가들이 샤블리의 정수를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Louis Michel & Fils, Chablis 1er Cru Butteaux 2009 : 약간의 흙내음, 향긋한 꽃 향기에 드라이하지만 부드러운 미감으로 마시기 편안하다. 깔끔한 쏠티(salty) 피니시.
Louis Michel & Fils, Chablis 1er Cru Les Forets 2009 : 섬세한 열대과일과 백도향. 약간 떫은 터치에 단순 명쾌한 과일 풍미. 미네랄이 두드러지며 전반적으로 가늘지만 명확한 인상.
Louis Michel & Fils, Chablis 1er Cru Montee de Tonnerre 2009 : 가벼운 조청 향. 잘 익은 과일 풍미에 무난한 산도로 목 넘김이 좋다. 향이 강한 해산물과도 좋은 궁합을 보일 듯.
Louis Michel & Fils, Chablis Grand Cru Vaudesir 2009 : 싱싱한 푸른 사과 향. 시원한 배의 개운한 첫 맛과 금귤 풍미의 개운한 뒷맛이 미묘함과 고상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장-마끄 브로까르는 수석무역에서, 크리스티앙 모로 뻬레 에 피스는 한독와인에서 수입하고 있다. 루이 미셀 에 피스는 2012년4월 현재 한국 수입사를 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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