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여인의 혀와 사자의 심장, 피노타지

포도주에는 여러 품종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다양한 맛으로 혀끝을 교란시키는 피노타지(Pinotage)를 좋아한다. 남아공을 대표하는 고유 품종인 피노타지는 프랑스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Pinot Noir)와 론 언덕의 쌩소(Cinsaut)의 이종교배로 탄생했다. 품종 개발 당시 남아공에서는 쌩소를 허미타지(Hermitage)라 부르고 있어 피노 누아의 ‘피노’와 허미타지의 ‘타지’를 합쳐 ‘피노타지’라 이름 붙였다.  
 
탄생
실험을 시작한 이는 1925년 남아공 최대의 와인 산지 스텔렌보쉬(Stellenbosch)에 위치한 스텔렌보쉬 대학교 포도 재배학 교수 아브라함 이작 페롤드(Abraham Izak Perold)였다. 정부 연구원으로 발탁된 그는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국가를 여행하며 알게 된 177종의 포도를 들여와 실험했다. 그가 왜 피노 누아와 쌩소를 선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포도 양조학자로서 민감한 품종인 피노 누아로 성공해 자신의 양조 기술을 인정 받고 명성을 얻을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피노타지를 이용한 최초의 와인이 생산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41년이었다. 이 새로운 품종을 세간에 널리 알린 것은 케이프 와인 쇼. 1959년 벨레브 에스테이트(Bellevue Estate) 와인과 1961년 캐논콥 에스테이트(Kanonkop Estate) 와인이 케이프 와인 쇼에서 챔피언에 올랐는데 당시 출품된 품종은 모두 피노타지였다. 
 
성공
1960년대 피노타지의 성공 덕분에 많은 농부들이 피노타지 농사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한편으로는 과잉생산으로 문제도 생겼다. 그러나 남다른 안목을 가진 생산자들은 피노타지의 잠재성을 확신하며 품질과 양조기술 혁신에 더욱 매진했고, 그 결과 1987년 남아공 ‘다이너스 클럽 올해의 와인 메이커’에서 피노타지 생산자가 선정되기도 했다. 폐쇄적인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외부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1990년 넬슨 만델라의 석방과 함께 와인 산업에도 봄 기운이 찾아왔다. 1991년 캐논콥(Kanonkop)의 와인 메이커 베이어스 트루터(Beyers Truter)는 런던에서 개최된 ‘International Wine & Spirit Competition’에서 로버트 몬다비 최우수 레드 와인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와인 메이커로 인정받았다. 현재 남아공 피노타지 협회장을 맡고 있는 그의 활약은 피노타지가 국제적인 품종으로 인지도를 얻는 데 큰 디딤돌이 됐다. 스텔렌보쉬 비탈에 있는 베이어스클루프(Beyerskloof) 와이너리는 그가 6대째 이어 오고 있는 포도원으로 피노타지를 집중적으로 생산한다. 
 
 
 [베이어스클루프의 늦겨울 포도밭 풍경과 피노타지]
 
 
세계적 품종이 되다
남아공 전체 품종 중 약 7%의 생산량을 차지하는 피노타지는 이제 뉴질랜드, 미국, 호주, 독일, 칠레, 캐나다, 브라질, 이스라엘, 짐바브웨에서도 경작하고 있다. 가벼운 미디엄 바디에서부터 중량감 있는 풀 바디까지 가능하며, 저렴한 가격대가 많지만 2년 정도 숙성된 와인이 미화 150불 이상으로 거래되는 것도 있다. 장기 보관용은 길게는 20년에서 25년까지 숙성한 뒤 마시면 최고의 맛을 기대할 수 있다. 자두, 딸기, 바닐라, 바나나 맛과 스파이시한 것이 특징인 피노타지는 대체적으로 레드 와인용이지만 주정 강화, 로제, 스파클링 와인과 브랜디에도 쓰인다. 다양한 소비자의 트렌드에 맞춰 커피 맛이 나는 스타일과 초콜릿 맛, 크림 맛이 나는 피노타지도 있다. 남아공에는 1990년대부터 새로운 컨셉으로 시작된 ‘케이프 블렌드(Cape Blend)’라는 와인 제조 방식이 있는데, 여러 품종을 섞어 만드는 것으로 케이프 지역인 스텔렌보쉬, 프랑스훅, 팔, 스와트랜드에서 재배한 피노타지 품종을 최소 30% 이상 포함해야 한다. 2004년 케이프 블렌드가 ‘월드 베스트 블렌드 레드 와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우정의 피노타지, 여설사심주(女舌獅心酒)
내게 피노타지는 남다른 추억거리가 있어 각별하게 다가오는 품종이다. 사회에 나오면 이해관계를 떠난 친구를 얻기 쉽지 않은데 피노타지가 멋진 친구를 맺어줬기 때문이다. 10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주재원으로 지내며 프랑스 와인을 즐겨 마셨던 친구는 케이프타운 여행 중 나를 만나 피노타지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피노타지에 대해 그는 ‘우아함과 발랄함이 공존하는 와인’이라 평했다. 피노타지를 예찬하는 곳에 늘 빠지지 않는 작자 미상의 글이 하나 있다. ‘피노타지는 여인의 혀와 사자의 심장에서 뽑아낸 술이다. 이 와인을 마시면 쉴새 없이 이야기할 수 있고 악마와도 대적할 수 있다’는 명문장이다. 나는 파리로 돌아간 친구에게 이 강렬하고도 낭만적인 구절을 메일로 전했다. 여기서 ‘여인의 혀’는 에로틱함보다는 끊임없는 수다를, ‘사자의 심장’은 남자의 담력을 상징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글귀보다도 더 낭만적으로 삶을 사는 친구는 ‘우리는 피노타지를 여설사심주(女舌獅心酒)라 부르며 케이프타운의 만남을 키워가자’는 화답을 보내 왔다. 여인의 혀(女舌)와 사자의 심장(獅心)을 간단히 한자로 바꾼 것이다. 이 표현은 내게 풍부한 상상력을 가동케 하고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이젠 고국으로 돌아간 친구에게 나는 해마다 그가 사랑하는 여설사심주를 보낸다. 친구가 케이프타운에서 만난 피노타지에 이끌려 다시 아프리카에 찾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아서 말이다. 이 염량세태에도 변함이 없는 그가 다시 나를 찾아오는 날에는 우리의 여설사심주 몇 병쯤은 쉽게 쓰러트릴 것이다. 남아공의 아이콘 품종 피노타지가 조금은 우연한 탄생이었듯 친구와의 뜻밖의 인연도 피노타지 와인과 꼭 닮았다.
 
 
[목가적인 벨레브 와인 에스테이트]
 
 
피노타지의 ‘TOP 10’ 와이너리
1995년 출발한 남아공 피노타지 협회 선정 ‘피노타지 탑 10 와이너리’를 알파벳 순서로 소개한다.
 
베이어스클루프(Beyerskloof) 
피노타지의 원조 메이커라 불리는 베이어스 트루터의 패밀리가 운영하는 와이너리다. 현재는 그의 아들 안리 트루터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2008년 오너의 애견이었던 디젤(Diesel) 사망 이후 만든 피노타지가 이 포도원 최고의 ‘디젤 피노타지(Diesel Pinotage)’다.
 
듀 발 와인(De Waal Wines)
피노타지 품종 개발 이후 가장 먼저 생산하기 시작한 농장 중 하나다. 9대째 전통과 새로움이 잘 조화된 와인을 만든다. 60년 넘은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로 만든 ‘탑 오브 더 힐 피노타지(Top of the Hill Pinotage)’가 대표적이다.
 
캐논콥 에스테이트(Kanonkop Estate) 
남아공의 최고급 와인이라는 자부심으로 4대째 이어오고 있다. 현재 베이어스클루프 와이너리의 오너인 베이어스 트루터가 와인 메이커로 있으면서 처음 피노타지를 생산했다. ‘블랙 라벨 피노타지(Black Label Pinotage)’는 50년이 넘은 포도나무에서 딴 포도로만 만들고 있다.
 
러베니어 빈야드(L’Avenir Vineyards) 
프랑스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아드비니 와인 그룹의 포도원이다. ‘미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포도원 이름 ‘L’Avenir’에서 보듯 남아공 와인의 밝은 미래를 예상하고 시작하지 않았을까? 아이콘 피노타지와 쉐닌 블랑이 유명하다.
 
릭스 프라이빗 셀라(Rijk’s Private Cellar)
케이프타운에서 1시간 내륙으로 들어간 지역, 툴바(Tulbagh)에 있다. 겨울엔 드물게 눈이 내리는 곳이며 포도원이 장엄한 산들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 분지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10년 넘게 한 해도 빠짐없이 질 좋은 피노타지를 생산하고 있다.
 
시몬시그 에스테이트(Simonsig Estate) 
1688년 프랑스의 종교 박해를 피해 들어온 위그노 종파 말란(Malan) 패밀리의 포도원이다. 남아공에서 처음으로 샴페인의 고전적 방식에 따른 스파클링 와인 생산을 시작했다. 농도가 짙고 파워풀한 바디감이 돋보인다.
 
스피어(Spier)
폴스 베이에서 불어온 찬 해풍을 맞고 자란 포도로 만든다. 피노타지와 궁합이 가장 잘 맞는 오크통 선택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21 게이블 레인지 피노타지(21 Gables range Pinotage)’에서는 깊이 있고 강한 오크향이 난다. 포도원 안에는 21개의 박공(gable) 지붕 건물이 있다. 
 
스텔렌지흐트 빈야드(Stellenzicht Vinyards)
스텔렌보쉬, 폴스 베이, 스텔렌지흐트 사이인 ‘골든 트라이 앵글’에서는 최고급 레드 와인 품종이 자란다. 다양한 토양, 경사, 산세, 고도에서 딴 포도로 빚어진 와인은 독특한 맛을 낸다. ‘골든 트라이 앵글 피노타지(Golden Triangle Pinotage)’가 있다.
 
웰링턴 와인(Wellington Wines)
건조한 내륙의 토양에서 자란 포도를 따서 피노타지를 생산한다. 풀 바디 프리미엄급 품질의 ‘카브 피노타지(La Cave Pinotage)’는 스파이시한 것이 특징이다. 
 
윈드밀 셀라(Windmeul Cellar)
팔(Paarl) 마운틴의 경사면에 자리한 포도원이다. 가격대비 우수한 품질의 피노타지를 만들고 있으며 매월 농부들의 마켓이 열리는 포도원이다. ‘리저브 피노타지(Reserve Pinotage)’는 8년 정도 숙성 후 마시면 최고의 맛을 선사한다.
 

프로필이미지김은영 기고가

기자 페이지 바로가기

작성 2015.08.17 08:29수정 2015.08.24 21:27

Copyrights © 와인21닷컴 & 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호주 와인 그랜드 테이스팅
  • 조지아 와인 인스타그램

이전

다음

뉴스레터
신청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