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반구의 봄은 북쪽에서 내려온다. 나날이 봄기운이 느껴지는 9월, 남반구에서 가장 큰 와인 행사 ‘케이프 와인(Cape Wine) 2015’가 케이프타운 국제 컨벤션 센터에서 9월 15일부터 3일간 열렸다. 남아공 와인을 알리는 행사인데 왜 ‘Cape Wine’이라 부를까? 케이프타운이 남아공 와인을 상징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남아공 와인의 첫 탄생지 콘스탄시아(Constantia)도 케이프타운에 있다. ‘새로운 시대의 남아공 와인’이란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는 방문국 숫자만 58개국이었고, 관람자 수는 2012년 대비 27% 증가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비롯해 특히 중국과 일본의 관심이 두드러졌다. 남아공 와인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방된 1994년 수출량은 5천만 리터에 불과했지만 2014년에는 4억 2천만 리터로 늘었다. 20년 사이 무려 8배 이상의 양적 증가를 이룬 남아공 와인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5천여종 와인의 버라이어티 쇼]
[매일 다른 주제로 열린 세미나와 토론]
남아공에는 600여 개의 와이너리가 있다. 이 중 350개 와이너리에서 5천여 종의 와인을 선보였다. 모든 부스를 찾기엔 시간이 모자라 발에 땀이 날 지경. 관람객이 현장의 공기를 직접 느끼며 지역, 품종, 빈티지별로 선별된 온갖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것은 최상의 체험이었다. 와인 전시, 세미나와 토론 등 모든 행사는 남아공 와인 시장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는 좋은 기회였다.
세계 최상급의 와인 생산을 꿈꾸는 투자자
[맥스 인디아 그룹 회장 아날지트 싱(맨 우측)]
오픈 세레모니에서 발표자로 나선 맥스 인디아 그룹의 회장 아날지트 싱(Analjit Singh)은 이미 남아공 와인의 무한한 가능성에 투자를 시작했다. 그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프랑슈후크 (Franshoek) 지역 여행 중 아늑한 계곡에 둘러싸인 포도밭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세계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로 했다. 그가 가장 매력적으로 꼽는 곳은 프랑슈후크과 스와트랜드(Swartland) 지역. 그는 ‘최상급의 와인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나파 밸리의 와인은 1,000달러를 부르는데 왜 우리는 좋은 와인임에도 불구하고 100달러를 부르기도 힘드나?”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품질로 승부하는 것’이었다.
내 목소리를 내기 위해 뭉친 젊은 농부들
[젊은 부부 농부 크리스와 수잔]
소규모로 포도 농사를 짓는 이들도 당당하게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자 힘을 합쳤다. 이들은 더 나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정보와 아이디어도 나눈다. 와인 생산 지역에 관계없이 뜻이 맞는 10개의 젊은 생산자들이 모여 ‘더 주비스켓(The Zoobiscuits)’이란 이름으로 부스를 차렸다. 농사를 손수 짓고 와인메이커 역할도 하는 이들은 그 누구보다 자신의 와인을 잘 안다. 패기 넘치는 농부들의 거친 손과 손톱에 검게 낀 포도밭 흙은 열정의 표시였다.
고정 관념에 도전하는 부티크 와인
[블랙 엘리펀트 포도원 주인 케빈]
투철한 장인 정신으로 프리미엄급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모방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와인을 빚는다. 대형 와이너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1년에 100톤 미만의 소량을 생산하지만 정성과 자부심, 깊은 애정은 곳곳에 스며있었다. 포도 농사에서부터 양조, 와인의 이름, 라벨 디자인, 광고까지 차이를 만들어 간다. 블랙 엘리펀트(Black Elephant) 포도원의 주인 케빈은 ‘와인은 나의 모든 것’이라며 찬양을 보냈다.
눈길을 끈 다양한 지역들
[‘대지 위의 하늘’이란 의미의 ‘헤멜 앤 아르데’ 부스]
남아공의 대표적 와인 지역인 콘스탄시아, 스텔렌보쉬, 팔 뿐 아니라 소규모 생산지의 적극적인 홍보도 눈길을 끌었다. 스와트랜드(Swartland), 오렌지 리버(Orange River), 엘진(Elgin), 헤멜 앤 아르데(Hemel En Aarde)도 독립적인 부스를 만들었다. 매년 최고급의 와인을 빚는 사디 패밀리(Sadie family) 와이너리가 있는 스와트랜드 마을 부스엔 ‘한 모금 홀짝 아니면 뱉어라(Sip or Spit)’ 는 재미있는 문구로 많은 관람객을 모았다.
만델라의 딸, 와인을 팔다
[만델라 딸(좌측)과 손녀]
남아공 전 대통령 만델라의 딸도 부스에 나왔다. 와이너리의 이름은 ‘만델라 오브 하우스 MOH(Mandela Of House)’. 자신의 와이너리는 없이 와인 구매 후 병입만 하고 아버지 이름을 라벨에 붙여 시장에 내놓았다. 만델라의 후광효과를 기대하는 듯했지만, 마케팅이나 와인에 대한 소개가 부족해 보였다. ‘흑인에게 와인을’, 이는 몇 해 전 남아공에서 있었던 와인 캠페인이다. 백인들은 와인, 흑인들은 맥주를 더 많이 마신다. 아직도 흑인들에게 와인은 ‘남의 집 술’이다.
고국에서 찾아온 참가자들
국내에서도 남아공 대사관 관계자와 와인 수입상, 전문가들이 찾아와줬다. 참가자 대부분은 남아공 와이너리의 주변 환경에 놀라움과 찬사를 보냈다. 말로만 듣던 자연환경과 현장을 직접 보고 남아공 와인이 한국에서 저평가된 점을 안타까워했다. 혹시 아프리카라는 지역적 선입견이 남아공 와인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정말 근거 없는 잘못된 이야기일 뿐이다. 단 한 번이라도 남아공을 찾았던 사람이라면 이런 평가는 하지 않는다.
국내에 처음 남아공 와인이 소개될 때 저가의 와인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런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 남아공 도처에 널린 가격 좋고 맛 좋은 와인들이 국내에 더 많이 소개되길 바란다. 더도 덜도 말고 남아공 와인이 생긴 그대로 알려지면 좋겠다. 그래서 찾는 이들이 늘고 다양한 선택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호랑이가 고양이를 낳지 않듯 남아공의 빼어난 자연환경과 기후 그리고 와인 생산자들의 열정은 질 좋은 와인을 만들어낼 것이다. ‘케이프 와인 2015’가 알려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