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대륙 아프리카. 이 대륙에 포도나무가 처음 소개된 때는 약 기원전 100년,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로마인들이 북아프리카 지역을 왕래하면서부터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지역은 오직 북아프리카에 한정돼 있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남부에 있는 남아공에 포도나무가 들어온 건 언제일까? 복잡한 남아공 역사의 어느 지점에 포도나무도 함께 따라 들어왔을 것이다. 남아공의 역사는 크게 여섯 개의 시대로 나눈다. 먼 옛날 원주민 시대, 희망봉 항해 시대,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 시대, 다이아몬드와 황금의 시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 시대를 거쳐 오늘날 민주화 시대에 당도했다.
케이프타운, 유럽의 포도나무가 처음 소개된 도시
와인 문화를 형성한 이들은 유럽인들이므로 남아공에 포도나무가 들어온 것도 유럽인들의 이주와 겹쳐진다. 유럽인들이 이 땅에 처음 발은 디딘 곳은 케이프타운으로, 건물을 세우고 도시를 만들었다. 그래서 케이프타운은 남아공에서 가장 오래된 고도(古都)라 불린다.
케이프타운에 유럽인들이 유입된 때는 1652년, 네덜란드가 동양 무역에 필요한 상설 보급기지인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면서부터다. 케이프타운은 유럽에서 목적지 인도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 최적의 장소였다. 고갈된 물품을 재보급 받고 휴식도 취하는 전략적 요지의 역할도 했다. 네덜란드는 케이프 초대 총독으로 얀 반 리빅(Jan Van Riebeeck)을 파견했는데 상인 출신의 의사였던 그는 긴 항해로 지친 선원들에게 비타민을 대신하는 음료를 제공하기 위해 포도를 재배했다. 또 그는 케이프타운의 기후가 와인 명산지인 스페인이나 프랑스와 비슷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동인도 회사가 문을 열고 7년 후, 드디어 1659년 2월 최초의 남아공 와인이 탄생했다. 그 이후 오늘의 남아공 와인이 있기까지 변천사를 되짚어보자.
[유럽과 인도의 중간 기착지, 동인도 회사 정문]
[남아공에 최초로 포도 묘목을 가져와 재배를 시작한 얀 반 리빅]
초기
네덜란드는 1679년 제2대 동인도 회사 총독으로 사이먼 반 데르 스텔(Simon van der Stel)을 임명했다. 그는 누구보다 포도 농사에 뜨거운 열정과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남아공의 나파밸리라 불리는 와인 도시 스텔렌보쉬(Stellenbosch)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고, 오늘날 세계적인 와인 명산지가 된 콘스탄시아(Constantia) 지역은 그의 농장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네덜란드 출신 농부들이 남아공 와인 역사의 주역이 되기에는 전통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이런 한계는 또 다른 유럽인들이 유입하며 극복됐다. 그들은 1680~90년 사이 프랑스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종교 박해를 피해 케이프타운 내륙으로 들어온 위그노(프로테스탄트)들이었다. 현재의 프랑스훅(Franshoek) 지역이 그곳이다. 위그노들은 정착하는 곳마다 프랑스 문화를 퍼트렸으며 남아공에 프랑스 포도 묘목을 가지고 와서 재배 기술과 생산 기법을 전파했다. 위그노는 남아공에 유럽 와인 문화를 이식하는데 확고한 기틀을 다진 장본인이다.
[남아공 와인의 발상지 콘스탄시아]
[프랑스훅에 자리한 위그노 기념탑]
20세기 이전
남아공에서 생산된 와인이 수출된 것은 한참 세월이 지난 1789년으로 그마저도 수출 지역은 네덜란드로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 뒤 1805년 영국의 케이프 지역 점령 사건은 와인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수출 와인의 품질과 수출량을 관리하고 관세를 부과했는데 프랑스 수입 와인에는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영국으로 가져가는 와인에는 관세 특혜를 줘 남아공 와인 시장의 붕괴를 가져왔다. 설상가상으로 1885년 퍼진 필록세라는 남아공의 와인 농사를 초토화시켰다. 이후 1899년 발발한 네덜란드와 영국 양국 간의 남아프리카 전쟁은 와인 산업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19세기는 남아공 와인 역사에서 고통의 시대로 기록된다.
협동조합(KWV) 시대
농부들은 와인 산업의 불합리와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뭉쳤다. 1918년 KWV(Ko-operatieve Wijnbouwers Vereniging, 와인 생산자 협동조합)를 만들어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고 남아공 대부분의 포도원이 연합해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이들은 포도 생산량, 품종, 가격, 중간 이윤 등을 조절하고 품질 개선과 생산자를 보호하는 시스템도 구축했다. 당시 이 조합의 가장 큰 역할은 할당제를 도입해 잉여 농산물이 생산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KWV는 오늘날 남아공 와인 산업을 만든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1997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되어 현재에 이른다.
터닝 포인트, 넬슨 만델라 시대
남아공이 국제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된 이유는 악랄한 인종차별 정책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세계로부터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스포츠 등 전 분야가 고립됐고 와인 역시 긴 세월 수출길이 막혔다. 하지만 1990년대 초 불었던 세계적 민주화 기류에 남아공 백인 정부도 인종 차별 정책에서 손을 뗐고, 마침내 1994년 넬슨 만델라 민주 정부가 출범하며 새 세상이 열렸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남아공 와인도 자연스럽게 외부로 나갈 수 있었으며, 1994년을 남아공 와인 수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터닝 포인트로 꼽는다. 남아공 와인 산업은 민주화 이후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으로 매년 화려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남아공 백인 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은 고립을 의미했다.
만델라의 당선은 남아공이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했다.]
와인 산업처럼 시대를 잘 반영하는 산업도 없다. 시대가 흥하면 와인 산업도 번성하지만 암울한 시기에는 침체기로 빠진다. 남아공은 350년이 넘는 유구한 와인 역사가 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우리 곁에 다가온 시간은 21년에 불과하므로 아직 낯선 나라로 남아있다. 오늘의 남아공을 만든 역사를 이해한다면 남아공 와인도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2015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 아름다운 남아공의 포도원에서 빚어진 와인 한 병과 함께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