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와인, 일상의 언어가 되다

붉은 밤색 보르도(bordeaux), 선홍빛 버건디(burgundy)

언어란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 했다. 수세기동안 인간의 삶을 여유와 흥취로 가꾸어준 와인! 그것은 인간의 언어에도 스며들어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와인문화가 우리네 삶에 끼친 영향만큼 언어에도 '와인스러운' 말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적 근질근질함을 못 견딘 나머지 와인이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어떻게 들어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도시명이 와인의 대명사로, 그리고 '색' (color)이 되다.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의 짧은 유학시절, 한국인 여행객을 위한 통역과 가이드를 의뢰받은 적이 있다. 이때 고객은 모 전자회사의 TV를 구입한 뒤 ‘해외여행 이벤트’에 당첨된 행운의 커플들이었다. 그중에는 갓 결혼한 신혼부부도 있었고, 세월을 함께 지내온 중년의 부부도 있었다. 생면부지의 이들에게 공통점이라고는 같은 제품을 구입한 것! 바로 선명한 화질을 장점으로 내세운 ‘보르도’라는 이름의 텔레비전이었다. 그들은 이 제품을 사면서 경품행사에 응모했고, 그리고 제품의 이름을 따라 진짜 보르도로 공짜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공짜란 무릇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그들은 낯선 ‘와인’을 따라 다니는 일정을 수행해야 했으며, 매일매일 처음 해보는 와인시음체험을 경험해야 했다.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이야 쾌재를 부를 일이지만, 실제로 와인을 접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만한 고역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쩌면 그들은 두고두고 ‘보르도’라는 이름의 TV 앞에 앉을 때마다 보르도 포도밭 여행 경험을 떠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보르도란 지리적으로 프랑스 서남부 대서양에 맞닿은 지롱드(Gironde) 지역의 중심 도시를 말한다. 그러나 와인의 세계에서는 이른바 ‘와인의 메카’로 불리는 세계적인 와인산지를 말하고, 남서부 지롱드의 규정된 와인산지에 붙여지는 와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물론 보르도 와인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야만 한다. 왜냐면 보르도라는 이름이 붙여지면서 그 와인의 품질까지 보장받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세계 와인의 맛의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일종의 상징성을 띄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붉은 밤색의 보르도 와인빛을 보르도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일반적으로 보르도 와인이 지역 특유의 포도품종을 적절하게 블랜딩하고 또한 숙성의 기간을 거쳐 얻어낸 짙은 붉은 빛깔은 고유한 색감을 표현하는 명사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버건디(burgundy)가 있다. 버건디는 프랑스어로는 부르고뉴(Bourgogne). 프랑크 왕국의 근간이자 중부 프랑스의 유서 깊은 지역으로 보르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명성을 가진 세계적인 와인산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사전을 찾아보면 버건디 또한 형용사로 색감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까탈스럽지만 풍부한 맛을 가진 피노 누아(Pinot Noir)라는 포도 품종을 섬세하게 빚어낸 부르고뉴 레드 와인에는 특유의 선홍빛의 색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보르도와 버건디, 떼루아와 포도품종, 인간의 섬세한 손길이 닿아 빚어낸 와인들이 세계적인 명성으로 더 나아가 맛과 색감의 기준이 되어 그것이 새로운 언어로 창조된 것이다. 

 버건디 컬러                                     비비드 버건디 컬러    

 

오래된 와인일수록 좋다? 빈티지(vintage)

필자가 TV 다큐멘터리 ‘천년의 향, 우리 누룩’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프랑스 보르도로 취재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보르도 서안의 메독(Médoc)과 마주하며 도르도뉴 강 북쪽에 자리한 세계적인 와인산지인 생떼밀리옹(Saint-Emilion)의 최고 와이너리로 손꼽히는 샤또 앙젤뤼스(Château Angélus)의 취재를 위해 와이너리 깊숙이 자리 잡은 셀러로 들어간 적이 있다. 그곳에는 세월의 깊이를 더한 채 잠들어 있는 100년이 가까워진 와인이 있었다. 그들에게도 귀한 빈티지 와인이다. 과연 그 와인은 지금 어떤 맛일까 참으로 궁금해 하면서 촬영을 마친 기억이 있다.

샤또 앙젤뤼스 1899년 빈티지 와인                   샤또 안젤뤼스의 입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생떼밀리옹 전경

 

와인에서 우리 생활 속으로 스며든 또 하나의 단어로는 ‘빈티지’(vintage)가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포도를 수확해서 와인을 양조하는 해를 가리킬 때 쓰는 단어다. 프랑스어로는 밀레짐(millésime)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빈티지는 흔히 쓰일 때 ‘구제’, ‘고풍스러운’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빈티지는 묵은 것에 느껴지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멋을 표현하는 긍정적인 느낌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와인이 생산되는 해를 가리키는 ‘와인의 나이’, 빈티지가 어째서 고풍스럽고 그윽한 세월의 멋을 지닌 뜻으로 사용되고 있을까?

 

숙성, 세월을 견디고 탄생될 와인


여기에는 또 다른 속설하나를 덧붙여볼 수 있다. 바로 ‘와인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것. 와인을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한 기초강의를 나가면 누구나 할 것 없어 먼저 이 질문부터 던진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모든 와인이 오래될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는 답을 하곤 했다. 수년의 세월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지닌 와인이라야 숙성되어 더욱 깊은 맛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그만큼의 값어치를 가진 와인들이야 당연히 오래될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단순히 생산된 지 몇 년 안에 소비될만한 값싼 이른 바 ‘1+1’의 와인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즐기면 된다.

한편 와인에 있어서 빈티지는 중요한 기록이다. 한 해 한 해 생산되는 와인에는 화석처럼 그 계절을 기억하고 있다. 한 해 한 해마다 기후도 포도의 상태도 달랐기에 때로는 생산량을 조절하거나 양조법을 바꿔 가면서 그 맛의 품질을 균등하게 만들기 위해 와인 양조자들은 무던히 애를 쓴다. 그 해마다 조금씩의 차이가 와인의 가치를 달리하게 된다. 그리고 기다림이 주는 마법 같은 시간을 지나고 나서 우리 앞에 한잔으로 놓이는 빈티지 와인이란 또 다른 즐거움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바로 언어 속에서 유희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샤또 무똥 로췰드의 셀러                       샤또 무똥 로췰드 와인숙성실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언어를 생성하고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어느 시절 좋은 와인들만을 접한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 튀어나온 말들. 그 고급의 오래된 빈티지 와인을 열어서 서로 나누는 순간 느낀 그 감흥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로써 자연스럽게 퍼진 것이 오늘날의 ‘빈티지’가 되지 않았을까? 와인은 모두와의 커뮤니케이션! 그것이 때로 우리 삶에 익숙한 언어가 되었을 때 와인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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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3.05.23 13:25수정 2013.11.2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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