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사평역 2번 출구를 나와 한적한 길을 쭈욱 걸어 내려가면 맞은 편 거리엔 타코를 파는 음식점과 스탠딩 커피집을 비롯 약간은 이국적인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400미터쯤 지나 사거리를 건너 같은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육교가 하나 있는데, 그 육교를 건너면 허름한 골목으로 연결된다.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좌측에 ‘우리슈퍼’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여느 동네 구멍 가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슈퍼마켓이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상한 점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입구에 쌓여 있는 수많은 수입 맥주 박스들과 다양한 포스터들. 설마 이 곳이 바로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 유명한 그곳인가?
희귀한 수입 맥주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곳: 우리슈퍼
의구심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전면에 배열된 냉장고들 안에 청량음료나 소주 같은 기타 주류와 함께 진열된 각종 수입 맥주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각종 잡화 및 기타 주류들과 뒤섞인 좁은 가게 한 켠에 수입 맥주들이 진열되어 있다 보니 처음엔 좀 어리둥절하고 번잡스럽게 느껴지지만 금새 가게의 편안한 분위기에 적응된다. 이미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익히 알려진 곳이지만 직접 방문해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한 눈에도 수입 맥주만 수십 종은 되어 보여 카운터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대략 7-80종 정도 될 거란다. 주로 마트나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 위주로 취급하고 계절 맥주나 한정판(limited edition) 등 희귀 맥주들도 들여온다고. 고객이 다른 맥주를 찾으면 직접 주문을 넣기도 하고 신규 수입 맥주의 경우 이웃인 맥파이 브루잉(Magpie Brewing, 크래프트 비어를 판매하는 하우스 맥주집)의 조언을 받아 취급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격표가 붙어있는 제품이 하나도 없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가격이 다른 가게에 너무 쉽게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그만큼 가격 경쟁력이 좋다며, 다른 가게보다 최소한 오백 원, 천 원이라도 더 저렴할 거라는 아주머니의 말에서 은근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상대적으로 고가인 수입 맥주를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구입하고 싶은 고객이라면 찾아 가 볼만 하다. 매니아들을 위한 맥주 전용잔도 일부 보유하고 있는데 어떤 제품은 잔 확보를 위해 50박스를 한번에 구매했다고.
체계적인 설명과 스타일 추천: 더 보틀 샵(The Bottle Shop)
우리수퍼에서 골목 안쪽으로 40미터 정도 들어가면 왼쪽에 크라운캡 병뚜껑 모양의 간판이 보인다. 깔끔한 외관에 시원하게 트인 쇼윈도 안으로 정돈된 선반과 냉장고에 가지런히 전시된 다양한 맥주들이 위용을 뽐내고 있는 이 곳의 이름은 '더 보틀 샵'. 보틀 샵(bottle shop)은 호주 등지에서 주류판매 전문점을 지칭하는 용어인데 그만큼 전문성을 강조한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가게 왼쪽에 늘어선 선반에는 맥주들이 제조사와 타입 별로 분류되어 있으며, 오른쪽 냉장고에는 바로 마실 수 있는 시원한 맥주들이 보관되어 있다. 가운데에 놓인 기다란 테이블은 수입사들과 함께 제품 테이스팅을 하거나 고객 시음회 등에 활용할 공간이다. 소비자는 물론 공급자까지 고려하는 매장인 셈이다.
현재 제품 라인업에는 약 80여 종의 맥주가 올라 있는데 조만간 라인업을 확충할 예정이란다. 아직 오픈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전시된 제품들 중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벨기에 맥주들과 그 전용잔. 다양한 벨기에 트라피스트 맥주(Trappist Beer)들과 쉽게 볼 수 없는 전용잔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독특한 실린더 모양과 나무 받침대로 유명한 벨기에 스트롱 에일(Belgian Strong Ale) 파우벨 콱(Pauwel Kwak) 전용잔의 경우는 오픈 일주일 만에 전부 팔려버렸다고. 수입 맥주 애호가들의 전용잔 사랑도 알아줄 만 하다.
가게를 둘러보며 사장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30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초보 애호가의 입장에서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는데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과 함께 원하는 타입의 맥주를 추천해 주었다. 사장님의 맥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내공이 느껴지는 대목. 이제 막 다양한 맥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초심자나 진지하게 맥주에 접근하는 애호가들에게 추천할 만한 샵이다. 연휴가 지나면 수입사들과 함께 다양한 시음회를 진행할 예정이라니 기대해 보아도 좋겠다. 행사나 제품에 대한 정보는 더 보틀 샵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thebottleshopkorea)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오픈시간 평일 15시-23시, 주말 13시-23시.
폭넓은 라인업과 접근성: 한스 스토어(Han's Store)
장소를 옮겨 이태원 역 1번 출구 앞으로 가 보자. 해밀톤호텔 뒷골목으로 들어가 녹사평역 방면으로 100미터 정도 걷다 보면 왼편에 '한스 스토어'가 보인다. 역시 일반 편의점과 별 다를 것 없는 외관. 그러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약간의 수입 식품 등을 제외한 가게의 3분의 2 이상이 수입 맥주들로 가득 차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취급하는 수입 맥주 150 여 종 중 7-80종은 여타 마트 등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품목이라고. 특히 샴페인과 같이 코르크와 뮈즐렛(muselet)으로 마감된 고급 맥주들도 눈에 띄었는데 가격 또한 샴페인에 필적하는 것들도 있다. 계절 한정이나 스페셜 에디션 맥주들도 취급하며 대부분 사전 예약을 통해 팔리는 경우가 많다.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해서 지방에서 일부러 찾아오시는 분들도 제법 된다고 한다. 구매 수량과 종류에 따라 다양한 전용잔을 증정하며 사전 예약이나 이벤트 등 다양한 행사 또한 자주 진행하는데 맥주야 놀자(http://cafe.naver.com/beer2013) 라는 온라인 카페에 가입하면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장님의 전언. 이태원 지하철 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퇴근길에 잠시 들러 맥주를 구매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여름에는 맥주를 구매해 가게 앞 간이 테이블에서 마시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그야말로 이태원스러운 샵이다. 영업시간은 대략 13시에서 22시 30분까지.
다양한 수입 맥주를 즐기고 싶지만 구하기가 쉽지 않은 애호가들에게 위에 언급된 샵들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줄 것이다. 다만, 실탄 준비(!)는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다. ‘이태원 프리덤’으로 해방된 지름신 영접을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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