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대리운전을 하며 유부녀 도리를 꼬시는 알피]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이한 감수성을 이렇게 비유했다. 살갗이 벗겨진, 지극히 가벼운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는 연약한 상태라고 말이다. 나도 모르게 솔직하면서 은밀해지고, 예민하지만 다정해진다. 찰랑찰랑 넘쳐 버릴 것 같은 마음, 예측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전개, 한껏 부풀어 오른 초민감해진 감각. 연애란, 너와 나 둘만의 시간에 빠지는 거다. 네 한마디로도 마음에 바람이 불고, 네 눈빛만으로도 눈 속에 파도가 인다. 내겐 너의 재채기도 특별하고, 새끼발가락마저도 귀여우니까. 기억나지 않는 어느 드라마였던가. '어른들의 가질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취미는 연애'라는 엇비슷한 대사가 떠오른다. 연애만큼 재밌는 게 있을까. 여기, 그 재미를 한시라도 놓치지 않기로 작정한 희대의 매력남이 있다. 언제나 사랑의 주체이길 갈망하는, 알피를 소개한다.
[알피가 클럽에서 첫눈에 반한 자유로운 영혼의 니키]
모든 여자들이 특별해요, 눈송이처럼
"운이 좋으시군요, 내 방은 아무나 못 들어오는데." 주드 로가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카메라를 응시한다. 다부진 몸과 야한 눈빛, 작정하고 끼부리기로 작정한 건가. 돈은 먹고 살만큼만 있어도 되지만 와인과 여자 없인 못 사는 이 남자, 바로 주드 로가 연기하는 '알피'다. 목 위로는 향수를 뿌리지 않는 게 원칙이며, 단칸방에 살지만 비수기 세일을 노려서라도 명품을 입어줘야 간지가 난다는 사실, 그가 귀띔하는 여자 꼬시기 팁이다. 의미 없는 여자와의 하룻밤이라도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만이라는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그를 미워할 여자는 가히 없다. 눈 한번 찡긋 윙크를 날리면, 옆집 할머니조차도 포로가 되어버리는 미워할 수 없는 만인의 연인. 오, 매력둥이 알피!
세상의 모든 여자의 사랑을 얻고자 고향을 떠나 맨해튼 행을 결정했지만, 허영을 채울 사치를 하기엔 그는 부쩍 가난하다. 그런 알피가 선택한 돈벌이는 바로 야밤의 부유층을 상대하는 대리운전이다. 돈 많은 유부녀와 접촉하기에 이만한 경로가 없달까. 나는 가난하니 부자인 여자를 만나면 된다는 생각이다. 거리의 청소부였을지라도 여자를 꾀었을 법한 절정의 자신감을 지녔다. 이 대사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체위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처럼요. 그분은 위대한 지도자였죠. 물론 그는 서투른 변명으로 들키곤 했지만 사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즐거움을 누리는 걸 아는 사람이었어요." 어떤 장면일지는 상상에 맡긴다.
[알피의 오랜 동거녀인 착하고 순진한 줄리]
난 싱글이죠, 구속받는 거 없는 새처럼 자유롭죠
"아들아, 예쁜 여자를 만나면 그 여자에게 질려버린 남자가 있음을 기억해라." 알피는 아버지가 남긴 명언을 받들어 부잣집 유부녀, 50대의 여성 재력가, 모델 뺨치는 클럽녀까지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어간다. 심지어 단짝 친구의 애인과 바람을 피워 우정마저 깨뜨리는 우를 범하기까지. 앞뒤 재지 않고 난봉꾼 기질을 발휘하던 그런 알피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시련이 닥친다. 그에겐 사형 선고와도 같은, 발기부전증이 찾아온 것. 여기에 더해 잠자리를 가졌던 친구의 애인은 자신의 아이를 뱄다는 소식까지 알려온다. 구속 없는 새처럼 자유롭다며 싱글을 찬양하던 그가 일순간 추락하는 새처럼 아득해지는 순간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랜 관계를 맺어온 동거녀마저도 알피의 바람기에 질려 이별을 고한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순간, 그녀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알피는 없는 형편에도 샴페인 중에서도 최고가인 '루이 로드레 크리스탈'을 들고 찾아가 화해를 청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떠난 그녀 앞에서 그는 자초한 결과임을 알기에 망연자실할 뿐이다. 회복되지 못한 관계들로 인해 절망에 빠지고, 결국 쓸쓸한 말로를 맞는 알피. 그가 읊조리는 혼잣말에서 덧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과 시름이 느껴진다. "내 인생은 내 거죠. 그러나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했어요. 그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해답은 뭘까요. 계속 회의가 듭니다. 이건 다 뭘까요."
[여성 재력가 리즈를 꼬시려드는 자신만만한 알피]
그래도, 연애만큼 재밌는 게 있을까

"이런 오후에는 압생트 어때.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좋아한 '초록 요정'이란 술이지. 그거 알아? 압생트는 애정을 길러준다는 거." 휘황찬란한 밤의 생활에 물든 알피에게 여자와 술은 뮤즈이자 마법이었다. 알피를 초라한 다락방에서 건져 올려줄 구세주에 다름없었으니까. 로넷, 말론, 줄리 등 기억할 수도 없는 훈장 같던 그녀들의 이름과 더불어 압생트, 진토닉, 미들 톤레어 위스키 등 가는 곳마다 빠지지 않던 술을 영화 속에서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화를 보기 전의 제목이, 마치 알피에 빠져버린 여자들의 사랑 구걸 같았다면, 보고 난 뒤엔 애정에 목마른 알피의 애처로운 애원처럼 들린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연애만큼 재밌는 게 있을까. 있다면 좀 알려주라.
* 영화 <나를 책임져, 알피>에 나오는 와인
루이 로드레 크리스탈(Louis Roederer, Cristal): '황제의 샴페인'이라고 불리며 샴페인 중에서도 최고품질에 가격 또한 최상급이다. 프랑스 샴페인 제조회사 루이 로드레가 1876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를 위해 그들이 가진 최고의 밭 7개에서 재배된 포도로만 양조했다. 다른 샴페인 병과는 달리 속이 그대로 드러나는 투명한 크리스탈로 특별 제작되어 샴페인 이름도 크리스탈이었으나, 현재는 고품질의 유리병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병 바닥에 우묵하게 들어간 펀트가 없는 형태로, 이는 몇 차례 암살 위험에 직면했던 황제가 병 안에 폭발물이나 독극물을 숨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병목에는 황제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사진출처_네이버 영화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