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고대 켈트족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들은 매년 10월 마지막 날, 지하세계의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이는 죽은 자의 영혼이 잠시 세상을 돌아보기 위함이지만, 이 문을 통해 악마나 마녀처럼 나쁜 존재들도 함께 올라온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기괴한 분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악령들에게 눈에 띄지 않기 위함이었다.
시작은 육신의 안녕을 지키기 위함이었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할로윈은 하나의 ‘축제’로써 작용한다. 젊음의 거리로 여겨지는 홍대나 이태원 등지에서는 각양각색의 코스튬을 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오히려 지나가던 악령들의 눈길을 잡아끌 지경이다. 이런 날엔 북적거리는 거리보다 조용한 공간에서 와인과 함께 영화를 즐기는 것이 더 편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악령의 최고봉, ‘악마’를 테마로 하는 영화와 와인을 소개한다.
스크린 위의 악마
헬보이 Hellboy, 2004
우리에겐 <호빗> 시리즈의 각본가로 알려져 있는 길레르모 델 토로가 각본 뿐 아니라 연출과 조연 출연까지 하며 애정을 쏟았던 영화. 동명의 원작이 있는데, 마블과 DC코믹스에 몸담았던 마이크 미뇰라의 작품으로 우리에겐 다소 낯선 ‘컬트만화’다. 영화도 이 기운을 이어받아 웃기면서도 회의적이고 유치하면서도 무거운, 익숙하지 않은 감상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에서 새빨간 아기 악마 헬보이는 살짝 열린 지옥의 문틈 사이로 뚝 떨어진다. 밑동만 남은 뿔과 커다란 턱을 가진 ‘못생긴 악마’로 자라난 그가 비밀 범죄수사관으로 활약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흡사 히어로의 성장물 같다. 복잡하지 않고 귀여운 스토리로, 깊은 생각 없이 낄낄대며 할로윈 밤을 보내기에 좋을 영화다.
[헬보이]
엔젤 하트 Angel Heart, 1987
1989년에 개봉했던 영화지만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작이다. 젊은 시절의 미키 루크를 감상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악마가 등장하는 영화인데 제목이 엔젤 하트? 의아할 수 있겠지만 답은 단순하다. 사립 탐정 해리 엔젤(미키 루크)이 주인공이기 때문. 어느 날 그는 실종된 가수쟈니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하지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엔젤이 찾아갔던 곳마다 끔찍한 살인이 일어나고 그는 용의자로 몰리며 위기에 처한다. 그러던 중 쟈니라는 인물이 악마에게 자신의 혼을 팔았다는 비밀을 알게 되며 이야기는 점점 극으로 치닫는다. 오컬트적인 분위기와 충격적인 장면으로, 할로윈의 무드를 제대로 불러일으키기 좋은 영화이지만 무거운 영화나 잔인한 장면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피하는 게 좋겠다.
[엔젤 하트]
데블스 에드버킷 The Devil's Advocate, 1997
키아누 리브스와 알 파치노, 두 미남 배우의 등장으로 눈이 즐겁다. 한 번도 재판에서 져 본적 없는 변호사 케빈 로막스(키아누 리브스)는 자신의 승소를 위해 무엇이든 한다. 유죄인 것이 분명한 성희롱 교수의 재판을 무죄 판결로 이끌어내며 유명 변호사가 된 그는 뉴욕의 ‘존 밀튼 투자 회사’에 스카웃되고 최고급 아파트와 엄청난 수입을 얻는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내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유모를 살해한 재벌을 변호하는 일을 맡게 되며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동료는 살해당하고 아내는 자살에 이르지만 부와 명예욕에 사로잡힌 그는 사건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점점 위험에 다가간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삶과 사회에 대해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어른들을 위한 할로윈 영화다.
[데블스 에드버킷]
와인 잔 안의 악마
까시에로 델 디아블로 Casillero del Diablo
전 세계 판매 1위의 칠레 와인으로 알려진 만큼,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와인이다. 스페인어로 ‘악마의 와인창고’라는 뜻의 디아블로는 악마의 얼굴을 본뜬 문양이 중앙에 새겨져 그 존재감을 높인다. 치밀하게 와인창고를 지켜준 악마 덕에, 이렇게 부담 없는 가격으로 맛있는 와인을 마실 수 있다니. 악마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샤토 드 깔비에르, 말리뇨 Chateau de Calviers, Maligno
화들짝 놀란 듯한 표정의 악마가 선명하게 그려진 라벨이 인상적이다. 악마는 무엇 때문에 공포에 질렸을까. 전설에 따르면 천사가 악마를 제압하여 술병에 봉인했다고 한다. 이 와인의 애칭이 ‘악마를 가둔 와인’인 것도 그 이유다. 프랑스 랑그독 지역에서 만들어진 이 와인은 시라와 그르나슈를 블랜딩 하여 짙은 붉은색을 띠고 있다. 복합적인 부케와 부드럽지만 농밀한 맛이야말로 매혹적인 ‘악마의 맛’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