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백 년 전의 일이다. 영국의 가장 오래된 와인 판매상, 베리브라더스앤러드(Berry Brothers&Rudd Ltd.) 판매 장부를 보면 보르도 특급 와인들보다 독일 모젤에서 생산되는 리슬링 이 훨씬 더 높은 가격에 거래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샤또 라뚜르(Château Latour)나 샤또 마고(Château Margaux)보다 2배 많게는 3배의 가격에 판매되었던 독일의 리슬링. 그런데 이게 왠일. 미네널러티가 짱짱한 고급 와인을 만드는 리슬링이 달달하고 특징 없는 품종으로 취급받던 시절이 있었다. 억울했다. 과거의 영광, 아니 400~500년 동안 역사 속에서 한결같은 사랑을 받아온 우아한 품종, 리슬링의 명예를 되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 평생을 바쳐 노력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닥터 루젠 와이너리의 오너 에른스트 루젠(Ernst Loosen)이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2003년 프랑스 미식잡지 푸드앤와인(Food&Wine)에서는 그를 ‘리슬링의 구원자’라고 칭했다. 각종 와인 전문지에서도 그에 대한 찬사는 끊이지 않는다. 와인앤스피릿(Wine&Spirits)에서 선정한 영향력 있는 50인의 와인 메이커에 독일인으로써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2004년의 일이다. 2005년 디켄터(Decanter) 잡지에서는 ‘올해의 인물(Man of the Year)’로 그를 지목했다. 수없이 많은 업적을 남긴 21세기의 ‘리슬링의 왕’, 그를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피에르 가니에르(Pierre Gagnaire) 바에서 만나 리슬링같이 달콤 짭짜름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닥터루젠의 오너 에른스트 루젠]
모젤 리슬링만이 표현할 수 있는 맛, 닥터 루젠의 떼루아
에른스트 루젠과의 만남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단 몇 분 만에도 그가 얼마나 리슬링을 사랑하고 있는지 내가 믿는 것들을 많은 사람이 공감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생을 다 바쳤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닥터 루젠 와인을 시음하면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미네널러티가 살아있는 오묘한 맛이다. 그 깊이는 어디서 오는지 먼저 닥터 루젠 와이너리의 떼루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 기후 조건 The Regional Climate
모젤의 가파르고 남쪽으로 직면해 있는 급경사는 리슬링 재배에 맞는 완벽한 기후 조건을 만든다. 경사는 포도나무가 북쪽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이상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일반적으로 북쪽 지역의 찬 기온은 포도가 천천히 익으며 산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것이 바로 와인에 밸런스를 맞춰주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강변에 위치한 포도밭은 밤의 추위로부터 냉해를 막고 열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 포도나무를 보호한다.
2. 점판암 토양 The Slate Soil
모젤의 돌이 섞인 흙과 수많은 돌출 된 바위들은 낮에는 햇빛을 반사하고 밤에는 낮에 받은 열기를 유지해 기온이 떨어져도 포도나무에 일정한 열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닥터 루젠의 포도원이 가지고 있는 토양은 크게 푸른색 점판암(Bleu Slate), 붉은색 점판암(Red Slate), 화산석에서 얻어진 토양(Volcanic soil)으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토양은 와인에 제각각 다른 특징을 부여한다. 푸른색 점판암은 와인이 복숭아와 같은 달콤한 과실향과 흙내음을 가질 수 있게 하며, 붉은색 점판암에서 생산된 포도는 보다 미네널러티가 풍부하고 까시스와 같은 아로마가 느껴지는 아로마틱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 반면 화산석에서 생산된 포도는 프로 레슬러 같은 힘차고 생기가 넘치는 와인을 생산한다고 에른스트는 설명했다. 포도밭의 얇은 겉흙층은 포도나무가 물과 영양분을 찾아 깊이 파고들 수 있으며 미네널러티를 흡수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3 접목하지 않은 오래된 포도나무 Old, Ungrafted Vines
닥터루젠은 120년 이상 된 포도나무를 소유하고 있는 와이너리로 기본급 와인 생산에도 올드 바인이 사용된다. 사실 이 포도원에는 영바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필록세라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곳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앞서 이야기한 점판암은 배수가 잘되며 수분감이 많지 않은 토양이라 필록세라는 모젤 지방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자연조건이 만들어 준 행운이 있는 지역이었던 것. 에른스트는 와인의 근본은 모두 뿌리에서 온다고 설명했다. 올드 바인에서 얻어지는 수확량은 매우 적지만 어린 나무에서는 얻을 수 있는 깊이를 표현해 낼 수 있다. 주변에서는 그에게 ‘결국엔 당신도 어린 묘목들을 심어야 할 것.’ 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의 믿음직한 포도나무들은 오늘도 한 자리에서 묵묵히 열일 하고 있다. 독일 모젤 지방에서 오래전부터 표현해 왔던 집약된 농축미를 보여주는 이 포도 나무를 져버릴 일은 없다.
[닥터 루젠의 다양한 토양]
에른스트 루젠이 이야기하는 리슬링과 푸드 페어링
리슬링은 음식 친화적인 품종이다. 풍부한 아로마를 지니고 있으며 바디감이 가벼워 어느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푸드 페어링을 이야기 할때 리슬링만큼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품종이 없다는 생각인데 이에 대해 에른스트는 그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다행히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그가 말하는 리슬링의 가장 큰 장점은 동반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에 있다. 음식의 맛을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개성을 잃지 않으며 때로는 상대방을 빛나게 때로는 나를 당당히 뽐낼줄도 아는 품종이 바로 리슬링이다. 실제 결혼생활도 둘의 개성이 잘 드러나며 조화를 이룰 때 가장 큰 시너지가 나는 것처럼 리슬링은 배우자의 1순위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그는 또한 리슬링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는 품종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설명했다. 하긴 리슬링은 오프 드라이부터 TBA까지 다양한 당도를 표현해낼 수 있는 와인이다. 갑각류나 채소를 주재료로 사용한 요리에 약간의 신선한 허브가 곁들여진다면 리슬링은 와인의 순수함을 지키면서도 음식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일등 공신이 된다.
인터뷰를 했던 날 그는 신라호텔 라연에서 한정식을 맛보았다고 했다. 단 한 번의 한식 경험으로 많은 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한식과 응용할 수 있는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주었다. ‘요리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식자재의 하나로 호두를 사용했다. 호두 껍질이 지닌 쌉싸름한 맛은 리슬링의 달콤한 와인과 잘 어울릴 수 있는 포인트이다. 또한, 절인 채소(백김치라고 생각됨)의 경우 과실향이 풍부한 스타일의 리슬링과 매치하면 신선함을 배가시킬 수 있는 포인트가 된다.’
[닥터루젠 리슬링]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피에르 바에서 닥터루젠 리슬링(Dr.Loosen, Riesling)과 음식을 맛보았다. 복숭아와 같은 핵과의 달콤한 아로마에 시트러스의 느낌이 충만한 산도, 거기에 바삭하고 짭짤한 느낌까지 느껴지는 복합적인 와인이었다. ‘이 와인이 정말 가장 기본급의 와인이란 말인가!’ 탄성이 나왔다. 후미에 살짝 느껴지는 달콤한 맛은 음식의 맛에 점 하나를 찍어 포인트를 만들듯 와인속의 약간의 잔당이 음식을 자연스럽게 감싸주며 음식이 지닌 풍부한 맛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피에르 바의 음식]
자료제공: 바쿠스 (Bacchus) 02-581-45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