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로얄 살루트 21년산(Royal Salute 21years old)’이였다. 대학생이던 나는 어머니로부터 고급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에 살고 계시던 큰 아버지께서 잠시 한국에 들어오시면서 아버지에게 이 귀한 술을 선물했다는 것이다.
‘로얄 살루트’라니... 이것은 조니워커 블루라벨과 함께 일종의 성물(聖物)이었다. 그 즈음 나는 막 싸구려 위스키에 눈을 뜨고 있었다. 가끔 일찍 사회에서 자리잡은 선배님들이 양주 바에 데려가 갖은 잔심부름을 시키고 만행을 저질러도 찬양하며 넙죽 엎드려 받아먹어야 했던 귀한 술이었다. 언감생심… 꿈엔들 만나랴!
무릇 20대의 초입이란 순대 술국 하나를 시켜놓고도 밤새 소주를 수십 병씩 해치우며 사랑에 눈이 멀고, 우정에 배신 당하고, 가난이 서럽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걱정에 피가 끓던 시절이다. 그 무렵에 로얄 살루트를 마신다는 것은 뭐랄까, 마이클 잭슨과 겸상해서 밥 먹는 기분 같은 것이랄까?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일들의 서막 같았다. 그런데 그 술이 내 눈앞 거실장 안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것이다. 나는 맨 정신에 그 술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신비한 현상을 체험했다. “너에게 나를 허락하노라!”
아버지는 전화기를 붙들고 술 자랑을 하시며 주말에 이모부들을 초대하셨다. 어머니에겐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시며 잔치라도 벌일 분위기였다. 당시엔 인터넷이나 매거진 등으로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가짜 술’ 제조에 대한 방법을 알 길이 없었다. 보리차를 넣으면 단박에 걸릴 것이고 맥주만 채워 넣으면 향이 날아가 금세 들통날 게 뻔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린 것이 ‘폭탄주’다. 그래! 폭탄주를 만들자!(아쉽게도 그때의 황금비율은 생각나질 않는다)
이 무모하고 어수룩한 어린 청춘은 다행히도 기십 만원을 호가하는 양주를 대신할 만한 영민한 양주를 찾아냈다. 바로 ‘나폴레옹’ 과 ‘캡틴 큐’다. 아마 이 귀한 이름을 처음 듣는 어린 양들도 있을 것이고, 아~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는 중년들도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캡틴 큐, 패스포트와 함께 우리나라 양주 시장을 이끈 삼총사로, 좀 놀아본 형님들의 추억의 파트너다. 당시 가격으로 2천원 안팎으로 저가 양주였던 나폴레옹은 해태제과에서 생산했고, 캡틴 큐는 롯데칠성음료에서 생산했다. 놀랍지 않은가? 과자와 음료를 대표하는 두 브랜드에서 이런 전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말이다. 최근에는 캡틴 큐마저 가짜 양주의 베이스가 된다는 이야기에 제조가 중단돼 품귀 현상이 일기도 했다. 헌데 이 양주는 가격이 말해주듯 악명이 높은 술이었다. 흔히들 ‘작업주’라고 부르는 독주(毒酒)의 대명사로 그냥 마시면 속이 불에 타는 듯하고, 한낮에 마시면 밤이 지날 때까지 일어나질 못했다. 덕분에 못난 청춘들이 “먹고 죽자!”라는 구호를 남발하던 시절에 이 양주는 ‘미친 소주’로 일컬었던 ‘경월 소주’와 함께 젊은이의 사약(死藥)처럼 불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이 한없이 저렴하고 악마같이 사악한 독주로 겁 없이 비싸고 여왕처럼 우아한 위스키의 전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과연 이 술과 맥주를 섞어 가짜 양주를 만들면 어른들은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까?
로얄 살루트 21년산은 위대했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 테이스팅 노트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우아한 스모크 향과 감각적인 과일 향이 은은하다. 달콤한 곡물과 바닐라가 풍부한 오크의 느낌이 단순하며 가볍다. 몰트와 적당한 스모크 향이 입안을 채우고 마지막으로 풍부한 바닐라와 부드러운 캐러멜이 조화를 이뤄 복합적인 느낌을 준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에 사용하기 위해 특별히 제조된 위스키다. 지금도 이 양주가 레전드임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품 있는 이 양주의 명성을 과연 나의 가짜 양주가 속일 수 있을 것인가?
이모부들의 양주잔에 술잔이 채워지고, 방문 틈새로 그것을 지켜보던 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건배를 한 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버지와 이모부들은 한결같이 탄성을 자아냈다.
“역시 로얄 살루트는 달라!” “이름값 하는데요, 형님”, “양주하면 역시 로얄이죠!”
마치 귀한 보약이라도 먹는 듯 두 번째 잔을 나누어 마시던 어른들은 그날 모두 제대로 일어나질 못했다. 앉은뱅이 술을 만든 아들의 악마 같은 제조술에 영락없이 당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들은 ‘욕망‘을 마신 것이다. 모르고 먹으면 약이 되는 난센스에 그대로 넘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상당수의 이미지를 가격으로 먹는다. 와인을 마실 때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을 하는 경우가 있다. 와인의 정보를 가린 채 브랜드를 노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순수하게 글라스에 담긴 와인의 정보만으로 와인의 맛과 가치, 가격을 산출해 보는 것이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는 어김없이 매해 이변이 속출한다. 몇 백 만원 하는 그랑크뤼급 와인들과 견주어 손색없을 만한 저가의 와인들이 선전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와인은 가격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지만 문제는 브랜드 선호도다. 실제로 고가의 와인 병에 같은 품종의 저가 와인 중 제법 맛이 훌륭하기로 소문난 와인을 넣어 제공한 적이 있다. 물론 판매를 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 마신 와인 중 본래의 와인이 아닌 것을 찾는 일종의 깜짝 이벤트였다. 놀라운 것은 20여 명이 넘는 게스트 중 아무도 그 와인을 지목한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와인의 병은 너무나 유명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와인이었고, 그 병 안에 담긴 제법 맛있는 저가의 와인은 우리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스토랑에 가면 나는 와인 리스트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다.
야심 차게 와인 리스트를 구비한 흔적이 엿보이는 멋진 레스토랑도 있지만 소위 말해서 별점 높은 스탠더드 와인만 모아 높은 리스트도 본다. 손님에게는 어떤 와인이 합리적인 것일까? 파는 사람과 그것을 사는 사람의 마음은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눈을 가리고 마시는 장님이 되는 것일까? 얼마 전 대형마트의 와인 가격 논쟁에 대한 사람들의 열띤 대화를 엿듣게 됐다. 대체 그들은 와인 가격이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와인의 맛이나 가치가 중요한 것일까?
천하무적 나폴레옹, 전설의 캡틴 큐에게 묻고 싶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생각의 발견]
생활 속 음식을 통해서 발견하는 생각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가 만들어 내는 맛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맛있는 순간을 놓치고 있진 않나요? 와인과 함께 한다면 더욱 맛있어지는 삶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