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블랑(Blanc)은 ‘하얀색’을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등의 포도 품종 이름에도 사용되고 있어 은근히 친숙한 단어이다.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 혹은 그 산처럼 생긴 빵 이름인 몽 블랑(Mont Blanc)도 ‘하얀색 산’이라는 뜻이다. 사실 라틴어에 기원을 둔 여러 유럽 언어에서 ‘하얀색’을 뜻하는 단어는 이와 유사한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에서는 비앙코(Bianco), 스페인에서는 블랑코(Blanco), 포르투갈에서는 브랑코(Branco)라는 스펠링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단어를 자세히 보면, 영어 단어인 블랙(Black)과 좀 비슷하게 생겼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이 단어는 ‘검은색’을 뜻한다. 즉 하얀색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이는 단지 우연일까?
두 단어의 기원을 찾아 멀리 원인도유럽어(proto-Indo-European)까지 따라가다 보면 bʰleyǵ 라는 단어가 보이는데, 이는 빛나다(Shine)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하얀색’의 의미는 밝게 빛나다는 의미에서 나오게 되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밝게 빛나는 무언가는 언젠가는 그 빛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불타는 무언가는 언젠가는 검게 타버린다. 그래서 이 단어는 점차 타다(burn)라는 의미로도 확대 되었고 여기서 ‘검정’이라는 의미가 생기게 되었다.
유럽 언어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알려진 조승연 작가는 이들과 유사한 어근에서 나온 단어 중에 ‘눈을 깜빡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블링크(blink)라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잠깐 여기서 글을 읽는 것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자. 눈을 감았을 때는 모든 세상이 검정색이다. 하지만 눈을 다시 뜨면 금새 세상이 다시 밝게 하얀색으로 바뀐다.
영어를 사용하는 앵글로-색슨족이 라틴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라틴족과는 다른 민족이어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춥고 긴 겨울밤이 지속되는 유럽 북쪽에서 살던 민족이어서, 따뜻하고 햇살 가득한 지역에서 살던 민족과는 차이가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언어는 항상 사회적 환경에 따라서 변화하니깐. 어쨋든 같은 기원에서 나온 두 단어는 완전히 달라보이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검정색과 하얀색은 서로 관계가 깊은 듯 하다.
II
프랑스에서는 어두운 색을 지니고 있는 포도를 ‘검다’고 표현한다. 프랑스어로는 누아(Noir)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포도 품종 중에서는 피노 누아(Pinot Noir)가 이 단어를 이름에 가지고 있는 가장 유명한 품종이라고 할 수 있다. 범죄조직이나 암흑가를 무대로 한 영화를 소위 누아르 영화라고도 하는데, 이 때도 이 프랑스어 단어가 사용된다.
앞서 살펴본대로 블랑은 하얀색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피노 블랑(Pinot Blanc)이라는 이름의 포도 품종은 같은 피노(Pinot)라는 품종이지만, 하얀색 피노라는 뜻이다. 그 중간 색도 있다. 검정색과 하얀색의 사이, 바로 회색이다. 프랑스어로 회색은 그리(Gris). 따라서 피노 그리(Pinot Gris)라는 품종이 있다. 사실은 회색은 아니고 붉은 빛이 나는 포도이지만, 사실 피노 누아도 엄밀히 말하면 검은색은 아니니, 프랑스인들의 작명 센스라고 생각하자.
피노 블랑과 피노 그리는 알자스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품종이며, 피노 그리는 특별히 고귀한 품종(Noble Grapes)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아마도 이탈리아로 넘어간 피노 그리가 더 유명할텐데, 여기서는 이탈리아어로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라고 불린다. 참고로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피노 누아도 재배되는데, 이태리어로는 피노 네로(Pinot Nero)라고 불린다. 네로(Nero)는 이탈리아어로 검다는 의미로, 검은 고양이가 ‘네로’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피노 가족들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이렇게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품종에는 그르나슈(Grenache) 가족들도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르나슈라고 부르는 품종의 풀 네임은 그르나슈 누아(Grenache Noir)이다. 이 품종의 고향인 스페인 카탈루냐 및 아라곤 지방에서는 가르나차 네그로(Garnatxa Negre) 혹은 가르나차 틴타(Garnacha Tinta)라고 불린다. 물론 하얀색 그르나슈도 있고, 이는 프랑스에서 그르나슈 블랑(Grenache Blanc)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또한 이들의 회색 가족인 그르나슈 그리(Grenache Gris)는, 최근에 일종의 ‘힙’한 품종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그르나슈들 모두 샤토네프-뒤-파프 와인을 만들때 허용되는 18가지(예전법으로는 13가지) 안에 포함된다.
[피노 가족의 3형제: 피노 누아 – 피노 그리 – 피노 블랑 (출처: 위키피디아)]
III
블루베리, 라즈베리, 딸기 등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베리류의 과일은 모두 어두운 색 혹은 빨간 색의 껍질을 가지고 있다. 과실이 성숙할 수록 껍질에서는 빨강, 검정, 보라색 등의 색을 만드는 안토시아닌(Anthocyanin) 성분이 생성되는데, 이 성분은 때로는 식물을 보호하기도 하고, 유익한 곤충을 유혹하기도 하는 등 식물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안토시아닌은 플래보노이드(flavonoid)에 속한다.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하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플래보노이드가 사람 인체에도 유익하다고 믿는다. 즉 레드 와인이 화이트 와인보다 건강에 더 좋다는 속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와인 애호가들의 정신건강에 가장 도움을 주는 성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에게 소비되는 베리류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안토시아닌이 없는 과일이 있는데 바로 청포도이다. 사실 청포도 역시 원래는 어두운 색의 포도에서 탄생하였다. 단지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색이 없어진 경우이다. 이는 열성적인(열등한) 돌연변이로, 일반 자연계에서는 그리 환영 받지 못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이 생성하는 깔끔한 맛의 포도주스에 매력을 느꼈고, 무성생식으로 이들을 지금까지 널리 재배하고 있다.
이렇게 색이 변화하는 돌연변이를 색상 돌연변이(Color Mutation)라고 부르는데, 사실 포도는 다른 식물에 비해서 색상 돌연변이가 상대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과일이다. 또한 포도 안에서도 더욱 돌연변이가 쉽게 일어나는 품종들이 있는데, 앞서 언급했던 피노 가족들과 그르나슈 가족들이 바로 그 예이다.
약간만 더 깊게 들어가보자. 안토시아닌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포도 유전자 중에서는 한 쌍으로 구성되어 있는 VvMYBA1 라는 유전자가 있다. 만약 포도 유전자에 한 쌍(두 개)이 모두 존재하면 일반적인 어두운 색의 포도가, 하나만 있으면 (프랑스인들이 회색이라고 믿는) 빨간색의 포도가, 모두 없으면 하얀 색의 포도가 생성된다. 이러한 내용은 21세기 초반 일본 과학원 쇼조 코바야시(Shozo Kobayashi) 연구팀에 의해서 밝혀졌다. (이 논문은 2004년 사이언스지에 수록되었다1)
최근 2019년 네이처 플랜츠(Nature Plants)지에는 UC 어바인과 UC 데이비스 대학에서 수행한 공동연구 결과가 수록되었는데, 이 내용도 제법 흥미롭다2. 일반적으로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자손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를 동일한 수로 물려받고, 따라서 부모와 동일한 수의 유전자를 갖게 된다. 하지만 포도는 특이하게 부모들에게 다른 수의 유전자를 물려 받을 수 있는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즉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 중 어떤 종류는 그 다음 세대에 아예 전달이 안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포도에서는 색상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게 된다. 비단 색상뿐만이 아니다. 같은 이름을 갖는 포도 품종 안에서도 매우 다양한 클론이 존재하는 이유도, 산지오베제와 브루넬로가 느낌이 다른 것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품종 맞추기가 그렇게 어렵나보다.
[한 나무에서 하얀꽃과 빨간꽃이 동시에 피는 경우도 색상 유전자에 따른 영향이다. 며칠 전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IV
블랙(Black)과 블랑(Blanc)이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것 처럼, 사실 적포도(혹은 검은 포도)와 청포도는 기원이 같다. 단지 우연히 생긴 약간의 변화가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다른 두 존재, 혹은 양극단에 있는 존재처럼 인식이 된 것일 뿐.
너는 검정색이고 나는 하얀색이야. 매번 이러한 논리로 편이 갈리고 적이 되어버린 상대방과 우리는 어쩌면 생각보다는 차이가 적은, 어쩌면 매우 많은 공통점을 지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레드 와인을 마실까 화이트 와인을 마실까, 이런 고민을 매번 심각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단지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혹은 같이 즐기는 음식에 따라서 그냥 고르면 되니까. 극단적이지 말자. 때로는 단순함이 진리이다.
1. Shozo Kobayashi, Nami Goto-Yamamoto & Hirohiko Hirochika. Retrotransposon-Induced Mutations in Grape Skin Color. Science, Vol. 304, Issue 5673, pp. 982. (2004)
2. Yongfeng Zhou, Andrea Minio, Mélanie Massonnet, Edwin Solares, Yuanda Lv, Tengiz Beridze, Dario Cantu & Brandon S. Gaut. The population genetics of structural variants in grapevine domestication. Nature Plants, 5, 965-97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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