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와인이 더 맛있다. 몇몇 품종은 와인을 마신 사람이 온몸으로 가을 햇살과 공기를 마신 듯 착각하게 만든다. 산지오베제(Sangiovese)가 바로 그렇다. 이탈리아 대표 품종인 산지오베제 연구는 198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알아두면 좋은 산지오베제 품종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이탈리아 몬탈치노 풍경]
산지오베제는 이탈리아 토착 적포도 품종이다.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며, 이외 이탈리아 전역에서 자라는데, 지역별 이름이 다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산지오베제는 10번째로 많이 생산되는 품종이다. 산지오베제는 피노 누아처럼 자신이 자란 환경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와인 스타일을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이탈리아 외에 산지오베제는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등에 전파됐다.
산지오베제 어원
산지오베제(Sangiovese)는 산귀스 조비스(Sanguis Jovis), 영어로 ‘주피터의 피(Jupiter’s Blood)’를 의미한다. 이 이름은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에 있는 산타르칸젤로 디 로마냐(Santarcangelo di Romagna) 소속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마시는 와인이 뭔지 묻는 방문자에게 대답하기 위해 임의로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산지오베제는 16세기 이전 자료가 부족해 더이상 분명한 추적은 힘들다. 1590년 죠반 베토리오 소데리니(Giovan Vettorio Soderini)가 ‘산지오게토(Sangiogheto)는 먹으면 쓰지만, 즙이 있고 매우 와인 같은 느낌을 준다’고 남긴 논문이 산지오베제를 다룬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인정받는다.
산지오베제 동의어
산지오베제 공식적인 동의어는 산지오베토(Sangioveto)다. 이외 프루놀료(Prugnolo), 프루놀료 젠틸레(Prugnolo Gentile), 산지오베제 피콜로(Sangiovese Piccolo), 산지오베제 그로쏘(Sangiovese Grosso), 브루넬로(Brunello), 넬루쵸(Nielluccio, 프랑스 코르시카에서 부르는 표현), 모렐리노 디 스칸사노(Morellino di Scansano), 산지오게토(Sangiogheto) 등이 있다.
산지오베제 가계도
2004년 진행된 유전자 분석 결과, 산지오베제는 칠리에졸로(Ciliegiolo)와 칼라브레제 디 몬테누오보(Calabrese di Montenuovo)가 교접한 품종이라 밝혀졌다. 즉, 산지오베제는 반은 토스카나, 나머지 반은 칼라브리아(Calabria, 칼라브레제 Calabrese 현재 이름) 품종 결합임을 뜻한다. 칠리에졸로는 매우 오래된 토스카나 품종이라 이탈리아 중부 키안티 사람들은 늘 산지오베제와 칠리에졸로가 유연관계가 있을 거로 생각해 그 결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칼라브레제 디 몬테누오보가 산지오베제 부모 중 하나라는 사실은 다소 인정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몬테누오보는 1538년 화산 폭발로 하룻밤 만에 생긴 언덕인데다 이 언덕에 위치한 와이너리 근처에서 칼라브레제 디 몬테누오보가 고작 몇 그루 애매하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품종이 어떻게 칠리에졸로를 만나 산지오베제가 탄생하게 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칼라브리아에서 칼라브레제 디 몬테누오보 품종은 멸종 위기에 처했고 그 정체도 불분명한 상태다. 이로 인해 칼라브레제 디 몬테우노보에 대한 추가 연구가 진행 중이며, 이 과정에서 산지오베제가 10개 이상 이탈리아 품종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장기 숙성된 산지오베제 와인]
산지오베제 분류
1906년 포도품종학자 몰론(Molon)은 산지오베제를 산지오베제 피콜로(Sangiovese Piccolo)와 산지오베제 그로쏘(Sangiovese Grosso)로 2개 과(Family)로 분류했다. 이후 꽤 오래 사용된 이 방식은 그로쏘에 속하는 포도(대표적인 예로 브루넬로 Brunello)가 피콜로보다 우월한 품종으로 보이게 하려는 상업적 목적을 갖고, 지나치게 단순한 분류라 판단되어 이제는 인정하지 않는다.
1980년대 이르러 반피(Banfi), 비온디-산티(Biondi-Santi), 콜도르치아(Col d’Orcia), 브롤리오(Brolio), 이솔레 에 올레나(Isole e Olena) 등 와이너리가 산지오베제 클론 연구를 시작했다. 그 결과, 산지오베제는 여러 생태종(ecotype)과 생물종(biotype)으로 나뉘며, 116종 클론(clone)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생물종 중 산지오베제 로마냐(Romagna)와 산지오베제 토스카나(Toscana)가 잘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유명 양조학자인 리카르도 코르타렐라(Riccardo Cortarella)는 와인 인수지애스트(Wine Enthusiast) 인터뷰에서 산지오베제 토스카나는 산미가 높아 신선함이 두드러지며, 산지오베제 로마냐는 힘과 깊이를 더해주는데, 두 생물종 모두 산지오베제만이 지니는 독특한 균형과 우아함을 지닌다고 밝혔다.
각 생물종은 여러 클론을 지니는데, 산지오베제 토스카나 생물종엔 57개 클론, 산지오베제 로마냐 생물종엔 13개 클론이 있다. 산지오베제 클론 분석은 지속해서 진행되고 있어 그 결과에 따라 각 생물종별 클론이 추가될 수 있다.
[와인 숙성실 모습]
산지오베제 클론이 중요한 이유
이탈리아 국립 포도품종 등록부에 따르면, 산지오베제는 이탈리아 토착 품종 중 가장 많은 클론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이탈리아 와인 전문가인 이안 다가타 박사(Dr. Ian D’Agata)는 산지오베제는 환경 적응력이 대단해서 생태종 또는 생물종과 같은 묶음 분류보다 포도원 환경에 따른 클론별 특성을 이해하는 게 와인 생산자에게 더욱더 유용하다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와인 생산자는 산지오베제 클론 이해를 통해 각 클론이 선호하는 토양, 기후, 고도, 햇빛 방향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클론별 폴리페놀계 화합물 종류 및 구성비, 수확 시기 결정을 통해 더욱 완성도 높은 훌륭한 와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인증 받은 클론 이름이 생태종 또는 생물종 이름을 대체해 실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산지오베제 일반 특징
대표적인 클론별 특징을 알아보기 전 산지오베제 일반 특징을 살펴보자. 대부분 산지오베제 100% 와인은 안토시아닌(Anthocyanin) 중 색이 쉽게 사라지는 시아닌(cyanin)이 풍부하고, 아실화된 안토시아닌(Acylated Anthocyanin)이 없기에 색이 옅다. 아실화된 안토시아닌은 메를로나 카베르네 소비뇽에 흔한 물질로 와인 양조로 절대 존재 비율을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아실화된 안토시아닌은 때때로 산지오베제에 다른 품종을 섞어 색을 내었는지 검사할 때 지표 물질로 쓰이고 있다. 즉, 100% 산지오베제 와인이라면, 와인에서 아실화된 안토시아닌이 검출되어선 안 된다. 산지오베제 와인은 새콤한 붉은 체리, 딸기, 자두, 토마토, 찻잎, 클로브, 커피, 삼나무, 담배, 말린 장미 꽃잎, 가죽 향과 풍미를 지닌다. 최상급 산지오베제 와인은 20년 이상 숙성이 가능한데, 오래된 산지오베제는 아주 멋스러운 가죽과 덤불, 감초, 흙 내음을 낸다.
산지오베제 클론별 특성
클론 산지오베제 BBS 11은 1970년 프랑코 비온디 산티(Franco Biondi Santi)가 플로렌스 대학 카시니 교수(Prof. Casini)와 협업해 그의 할아버지 페루치오(Ferruccio)가 1800년대 중반 조성한 포도원에서 분리해낸 클론이다. BBS는 브루넬로 비온디 산티(Brunello Biodi Santi)약자이며 11은 번호다. BBS11은 비온디 산티 브라칼레 마렘마(Biondi Santi Braccale Maremma)와 사쏘알로로(Sassoalloro)에 쓰였다. BBS 11은 강렬한 장미와 바이올렛 향이 특징이며, 부드러운 타닌을 지닌다.
클론 CCL은 키안티 클라시코 2000 이니셔티브 프로젝트(Chianti Classico 2000 Initiative project)를 통해 선택된 클론으로 산지오베제 클론 7개와 콜로리노 Colorino 클론 1개와 함께 이탈리아 국립 포도품종 등록부에 기록됐다. 1960~70년대 와인 메이커이자 컨설턴트인 카를로 페리니(Carlo Ferrini)는 토스카나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클론 R10, R24, F9을 식별하는 데 성공했다. 뒤 이은 연구에서 퀘르치아벨라(Querciabella) 와이너리 만프레드 잉(Manfred Ing)은 키안티에서 흔한 이 클론들이 껍질 대 즙 비율이 너무 낮아 고품질 와인 생산에 부적합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R24가 R10보다는 우수했지만, 풍미가 너무 묽었고, 몬탈치노에서 유명한 BBS 11은 키안티에서는 잘 자라지 못했다. 이에 키안티 와인 협회 주도로 1988년부터 1991년 14개 포도원에서 연구를 진행해 키안티에서 잘 자라며, 포도알이 더 작아서 껍질 대 즙 비율이 높고, 껍질이 두꺼우며, 너무 조밀하지 않은 송이를 지니는 포도나무를 선별했는데 이를 클론 CCL이라 부른다. 키안티 클라시코 2000 이니셔티브 프로젝트는 클론 선별 외 식재 밀도, 수확시기, 가지 관리 등 총괄적인 연구를 진행해 키안티 와인 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
클론 야누스 50(Janus 50)은 카스텔로 반피(Castello Banfi)에서 분리된 50종 클론 중 하나다. 야누스 50클론은 타닌이 잘 발달하고 균형 잡혀 있어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와인 골격을 담당한다. 담배, 꽃, 스파이스 등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다.
클론 R24는 포도 종묘 회사로 볼 수 있는 비바이 코오페라티비 라우스케도(Vivai Cooperativi Rauscedo, VCR로 줄임)가 최초로 분리해낸 산지오베제 클론이다. R24는 인기 클론으로 색이 진하고, 구조와 장기 숙성 잠재력이 대단하다. 잰시스 로빈슨 MW(Jancis Robinson MW)는 그녀 칼럼에서 R24는 오디 향이 황홀하다고 표현했다.
클론 T19는 이탈리아어 테바노(Tebano)에서 유래했다. T19는 R24와 함께 와인 생산자에게 사랑 받는 클론이다. T19로 만든 와인은 색과 풍미가 R24보다 더욱더 진하고 풍부하며 복합적이다. 아쉽게도 이 클론은 한 종류 이상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새로운 포도원을 조성할 때, T19를 심는 일은 공식적으로 금지된 상황이지만, 와인 생산자 선호도는 여전하다고 한다.
[산지오베제 와인과 잘 어울리는 비스테카 알라 플로렌티나]
과거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산지오베제 와인은 묽고 시거나, 두엄 풍미가 강해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그런 산지오베제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1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산지오베제 와인 완성도는 확연히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엔 산지오베제 클론 이해가 큰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겨우 10년 차 와인 기자가 키안티 클라시코는 셰일과 점토가 섞인 갈레스트로(Galestro)토양이라 산미와 피네스가 좋고, 그냥 키안티는 점토가 많으니 생산량이 많은 대신 섬세함이 떨어지고,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석회가 많은 알베레제(Alberese)토양에서 힘, 숙성도, 진한 검은 과실 풍미와 입을 조금 많이 조이는 타닌을 지닌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거 같다. 이와 같은 획일화와 단언은 큰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신 산지오베제 와인을 마실수록 그 종류가 정말 얼마나 많은지 다시금 깨닫고, 끊임없는 연구와 발전, 기후 변화, 와인 양조 방식 변화 등이 와인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있는 그대로 즐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산지오베제는 카멜레온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이 뿌리 내린 땅, 받은 햇살, 스친 바람을 닮은 와인이 되기 때문이다. 깊어가는 가을,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빛과 단풍색에 빠져든다. 그러니 가을은 산지오베제를 즐기기 참 좋은 시절이란 생각이다. 아주 조금 건넨 산지오베제 이야기가 여러분이 떠나는 산지오베제 여행에 필요한 지침이 되길 바라본다.
참고 자료>
-Italian National Catalogue of Grapevine Cultivars
-Foundation Plant Services Grape Program Newsletter November 2006
-Dr. Ian D’Agata ‘Native Wine Grapes of Italy’
-Jancis Robinson MW, Julia Harding MW, José Vouillamoz ‘Wine Grapes’
-Castello Banfi ‘The Pursuit of Excel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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