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은 온갖 희망으로 가득 찼던 시작과 달리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한 해가 됐다. 올해 예정된 크고 작은 와인 행사는 취소됐고, 와인 산지를 돌아보는 여행도 제한됐다. 국내에서 열리는 와인 전문인 시음회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엄수하며 제한된 시간과 인원만 참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올해 시음한 와인 수는 확실히 줄었지만, 그 대신 와인을 더욱 깊이 몰입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불확실로 가득한 시간 속 손에 쥔 와인 잔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다. 2020년을 마무리하고 2021년을 새롭게 시작하며, 와인 21 닷컴 기자들이 꼽은 올해의 와인과 이야기를 추려본다. 이 글을 읽는 와인 애호가가 새 와인을 발견하는 재미를 누리길 바라본다.

안미영 [벨라비스타 라 스칼라 Bellavista, La Scala 2013]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일상 중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중에서 특히 아쉬운 건 여행과 공연이다.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하고 예매해둔 공연들이 줄줄이 취소되는 아쉬움을 와인이 달래주곤 했다. 벨라비스타 라 스칼라는 그 이름만 봐도 ‘여행지에서 즐기는 공연’이 떠올랐다. 그 이유는 벨라비스타는 ‘아름다운 경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 와인은 밀라노에 자리한 라 스칼라 극장에 헌정하는 스페셜 에디션이기 때문이다. 라 스칼라 극장과 오페라를 주제로 디자인한 패키지가 고급스럽고, 감각적인 형태 병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샤르도네 72%, 피노 누아 28%가 사용된 와인은 화사한 꽃 향과 지속해서 올라오는 미세한 버블을 지녀 설레는 기분이 들며, 언젠가 방문 했던 아름다운 오페라하우스를 회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올해 위안을 전해준 여러 와인 중 벨라비스타 라 스칼라가 더욱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벨라비스타는 1977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프란치아코르타(Franciacorta, 지역 이름이자 와인 종류 이름) 마을에 설립된 와이너리다. 벨라비스타는 샴페인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프란치아코르타(Franciacorta)와인을 대표하는 생산자로서 이 지역 10분의 1 포도원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기본급 와인부터 꼽히는 와인부터 규정을 뛰어넘는 숙성을 거친 훌륭한 와인을 생산한다.

백문영 [카르페 디엠 페테아스카 알바 Carpe Diem Feteasca Alba]
‘몰도바(Moldova)’라는 낯선 동유럽 국가를 알게 해 준 와인. 톡톡 튀는 레이블과 ‘순간을 즐기자’는 와인 이름 덕에 유난히 눈길이 가는 와인이기도 하다. 낯설디낯선 ‘페테아스카 알바(Feteasca Alba)’ 품종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기에도 제격이다. 딱딱한 복숭아, 향긋한 레몬그라스, 갓 자른 풀 내음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가벼운 화이트 와인이라 음식과 즐기기에도 좋지만, 그냥 물처럼 술술 마시기에도 훌륭하다. 부라타 치즈 샐러드, 토마토 부르스케타 같은 가벼운 음식과도 잘 어울리고, 허브 양념에 재워 구운 닭고기구이처럼 향신료를 다채롭게 사용한 각종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 레몬 그라스, 고수같이 향이 강한 스파이스를 듬뿍 넣은 똠양꿍과 함께 먹어봤는데, 입 안에서 퍼지는 아로마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우울하고 힘든 하수상한 이 시절, 모두에게 전하고 싶다, 카르페 디엠!
카르페 디엠은 몰도바(Moldova)에서 4대에 걸쳐 와인을 생산하는 가족 와이너리다. 주인장 이온 루카(Ion Luca)는 몰도바 와인 생산자에게 모범이 되는 인물로, 몰도바 와인 소매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몰도바 와인 홍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카르페 디엠은 몰도바 토착 품종을 주로 양조하며, 일부 국제 품종도 도입하고 있다. 페테아스카 알바는 동유럽에서 주로 재배되는 토착 품종으로 화사한 향과 균형이 좋은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데 쓰인다.

와인21 콘텐츠 담당 [리머릭 레인 리슬링 Limerick Lane Riesling]
와인에 대해 잘 모르는 지인들과 모임에서 마셨는데 모든 이들이 '맛있다'를 10번 연속으로 외쳤던 기억이 있는 와인이다. 와인 초보자 입에 맞을 만한 뚜렷한 개성도 있고, 조금 더 진지한 와인 애호가도 좋아할 만한 재스민, 섬세하고 은은한 복숭아 향과 좋은 산미도 지니고 있다. 이 와인과 같이 먹었던 구운 관자 외에 살치살 스테이크와 페어링도 훌륭했다. 무엇보다 리머릭 레인 리슬링은 가격도 적당해서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더 큰 만족도를 줄 수 있는 와인이라 생각된다.
리머릭 레인(Limerick Lane)은 미국 소노마 카운티 러시안 리버 밸리 북동쪽 끝에 자리한 와이너리다. 포도원 규모는 12헥타르로 작지만, 와인 품질은 2015년 와인 스펙테이터 선정 최고 와이너리 100중 12위에 오를 정도로 훌륭하다. 리머릭 레인 포도원은 100년이 훌쩍 넘은 오랜 수령을 자랑하는 진판델, 시라와 그르나슈 품종을 주로 사용해 와인을 생산한다.

유민준 [알레한드로 페르난데즈 알레하이렌 Alejandro Fernandez Alejairen]
2012년 가을. 스페인 리베라 델 두에로를 여행하다가 아싸(Haza) 와이너리에서 우연히 알레한드로 페르난데즈(Alejandro Fernandez)를 만났다. 스페인 와인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그는 처음 보는 화이트 와인 한잔을 따라주었다. 그는 그 와인이 스페인 토착 품종으로 만든 자신의 와인 중 유일한 화이트 와인이라고 했다. 처음 한 잔을 마시자마자 아이렌(Airen)으로 이런 와인을 만들다니 놀라운 마음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8년 후 한국의 한 와인 샵에서 진열된 이 와인을 보았을 때 흡사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시음한 와인 역시 그때의 그 감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잘 알려진 이름은 아니지만 아이렌은 2004년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었던 포도 품종이었다. 하지만, 포도의 개성이 적어 주로 브랜디를 만들 때 사용되거나 지역에서 소비되는 저품질 와인 양조에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올바른 곳에서 제대로 재배하고 양조한다면 아이렌으로도 이런 멋진 와인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진한 금색, 그리고 처음부터 강렬한 바닐라와 헤이즐넛의 오크 숙성 향이 품어져 나온다. 아이렌을 아메리칸 오크통에서 2년 숙성을 시킨 양조기법부터 새롭다. 살아있는 산도, 집중되어 있는 과실 맛 또한 기대 이상이다. 마법사의 손길에서 새롭게 태어난 와인 같은 느낌이다.
진한 향을 잘 느끼기 위해서는 너무 차갑지 않은 약간 서늘한 온도로 마시는 것이 좋다. 또한 적어도 30분 정도 와인을 열어놓으면 더욱 복합적인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다. 연말 와인 모임에 시작 와인으로, 혹은 해산물 요리 또는 크림리조토와 파스타 등과 함께해도 매우 훌륭하다. 참고로 아이렌은 애인(愛人)의 중국어 발음과 비슷하다. 추운 겨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부드러운 바닐라 향이 느껴지는 맛있는 와인 한 잔은 어떨까?
알레한드로 페르난데즈(Bodega Alejandro Fernandez)는 리베라 델 두에로(Ribera del Duero)지역에 1972년 페스케라(Pesquera Bodega)를 설립해 다른 이들에게 벤치마킹 대상이 되며 이 지역을 와인 생산지로 부활시켰다. 그의 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리베라 델 두에로 와인을 스페인 리오하와 프리오랏과 같은 위상에 올려놓는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고 있다.

정수지 [마르 데 프라데스 알바리뇨 Mar de Frades Albariño]
올해 초, 찬 바람에 코 끝이 시리던 어느 날, 그리고 가을이 무르익던 어느 날 두 번 마르 데 프라데스 알바리뇨를 만났다. 여름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파란색 기다란 병엔 솟구치는 파도와 끼룩대는 갈매기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와인 라벨은 일본 판화인 우키요에 느낌이 나는데, 와인 라벨만 봐도 험상궂은 바닷가 바위에 올라 서서 성성하게 가슴에 들이치는 바닷바람을 맞는 기분이 든다. 와인병 뒷면엔 와인이 맛있는 온도가 되면 일렁이는 파도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 작은 배를 볼 수 있다.
와인은 광이 나는 14K 금색을 낸다. 와인이 내는 광채에서 이 와인 산도가 높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분필, 레몬, 자몽, 스위티오 등 시트러스 향이 싱그러우며, 살짝 흰 꽃, 여름날 햇살 받아 뜨겁게 데워진 조개 껍데기 향을 느낄 수 있다. 와인 맛을 보면, 진한 레몬과 자뭉 풍미가 좋고, 예상대로 높은 산미와 짠맛을 내는 미네랄을 느낄 수 있다. 이 느낌은 껍질 굴을 먹을 때 나는 그 짠맛과 미네랄 풍미와 진짜 비슷하다.
마르 데 프라데스 와인을 마시면, 백사장에 다리 쭉 펴고 멍하니 앉아 바다가 뿌려주는 바다 스프레이를 맡는 기분이 든다. 어디 마음 놓고 떠나지 못하는 올해,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바다를 떠올리게 해준 와인이라 더욱더 기억에 남았고 와인에 고마웠다.
국내 알바리뇨는 극히 드물어서 충분히 마셔볼 가치가 있는데, 마르 데 프라데스는 품질마저 뛰어나다. 게다가 마르 데 프라데스는 생물로 즐기는 굴, 개불, 해삼, 멍게와 정말 잘 어울린다. 이 외 살짝 삶아서 즐기는 문어, 거북손, 뿔소라, 골뱅이와도 함께 먹기 좋다. 실제로 이 와인이 온 고향은 거북손으로 유명하다. 와인 산도가 워낙 좋아서 튀김이나 새우만두, 각종 전유어와 즐겨도 좋다. 따라서, 만약, 평소 해산물을 자주 즐기는 사람이라면, 6병 정도 쟁이길 추천한다. 왜냐하면, 이 와인은 장기 숙성이 가능한 알바리뇨이기 때문이다. 와인 메이커에 따르면, 마르 데 프라데스는 수확 후 당장 마셔도 좋지만, 1년, 2년 지나면서 향이 더욱 복합성을 띠고, 4년 뒤부터 15년까지 계속 변화하는 절정의 맛을 보여준다고 한다. 여러병 사서 두고 숙성에 따른 변화도 즐기면 좋을 와인이다.
마르 데 프라데스는 1987년 알바리뇨 품종 요람인 스페인 리아스 바이사스(Rias Baixas)지역 발 도 살네스(Val do Salnés)에 설립된 와이너리다. 알바리뇨 대표 생산자 중 하나다. 마르 데 프라데스는 ‘수도사의 바다(Sea of the Friars)’라는 의미로 산티아고 순례자 길목에 자리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6헥타르 포도원은 발리냐스(Valiñas)에 위치해 대서양을 내려다보며, 바닷바람 영향을 그대로 받는다. 와인 메이커인 파울라 판티뇨 피타(Paula Fandiño Pita)는 알바리뇨 품종 숭배자에 가까운 인물로 2007년부터 마르 데 프라데스 와인을 만들고 있다. 그녀는 2016년 영국 드링크 비즈니스 선정 <스페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명 여성 양조학자>에 이름을 올렸다. 마르 데 프라데스는 일반 알바리뇨, 오크 숙성한 알바리뇨, 스파클링 알바리뇨를 생산한다.

김윤석 [톨라이니 레짓 Tolaini Legit]
톨라이니 레짓(Tolaini Legit). 와인 이름과 흑인 남성의 얼굴이 꽉 찬 레이블만 보면 미국 와인 같다. 하지만 이 와인은 토스카나에서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으로 양조한 이탈리아 와인이다. 하지만 미국이랑 깊은 연관이 있긴 하다. 와이너리 소유주가 미국 거대 물류 회사를 설립한 톨라이니 가문이고, 레이블의 남자도 미국인이 맞으니까. 그것도 아주 특별한 미국인. 재즈 팬이라면 쉽게 알 정도로 위대하고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다. 그는 1940년대 재즈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며 비밥(Bibop) 스타일의 확립에 일조했던 재즈계의 외계인이었다. 레이블에 쓰인 사진은 1961년 녹음된 의 커버 사진으로, 몽크에게 헌정하는 의미를 담았다.
키안티 클라시코 남부 지역의 자갈 섞인 석회 점토질 포도밭에서 재배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손 수확해 광학 분류기로 선별한 후 줄기를 제거하고 온도가 조절되는 오크 발효조에서 30일간 침용했다. 해당 기간 동안 풍미 추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매 4~6시간마다 피자주(pigeage)와 흐몽타주(remontage)를, 주 1회 델레스타주(delestage)를 진행했다. 이후 오크 바리크(70% new)에서 24개월, 병입 후 36개월 숙성을 거쳤다. 그 결과 바로 마셔도 맛있고 숙성 잠재력도 충분한 와인이 탄생했다. 2019년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로부터 94점을 받으며 100대 와인 26위에 선정된 것이 그 증거. 음용 권장 시기는 지금부터 2036년까지다.
검은빛 감도는 진한 루비 컬러. 코를 대면 향긋한 바닐라 오크 뉘앙스가 가장 먼저 드러난다. 그렇다고 오크만 도드라지는 스타일은 아니고, 라즈베리와 블루베리, 블랙커런트 등의 과일 풍미와 상쾌한 허브 뉘앙스 또한 겸비하고 있다. 입에 넣으면 의외로 날렵한 인상. 하지만 쫀쫀한 타닌과 알코올, 산미가 훌륭한 구조감을 형성한다. 완숙한 과일 풍미가 과하지 않게, 하지만 밀도 높게 드러나며 싱그러운 신맛과 함께 길게 이어진다. 시간이 지나며 삼나무와 흑연, 매콤한 스파이스 또한 곁들여진다. 햇살을 듬뿍 받은 토스카나 카베르네 소비뇽의 매력을 흠뻑 드러내는 와인이다. 아 참, 와인 이름인 레짓은 '그럴싸한', '제대로'라는 의미다. 텔로니어스 몽크의 노래를 들으며 맛있게 구운 스테이크와 함께 마시면 그야말로 제대로일 듯.

변용진 [바로싸 보이 더블 트러블 Barossa Boy Double Trouble]
호주의 다양한 색깔의 와인 생산지역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지역은 단연코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와 이든(Eden Valley)를 포함하는 바로사 지역이다. 180여 개의 오랜 역사의 유명 와이너리들이 즐비한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자면 반드시 들어가는 인물 중에는 그랜트 버지(Grant Burge)가 있다. 그의 가문인 버지 가문(Burge Family)은 바로사 지역에서 100년이 훌쩍 넘는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역사로 오랜 기간 많은 이들의 존경과 함께 그 와인의 품질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2016년 그랜트 버지의 은퇴와 함께 브랜드의 역사도 함께 저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에 답하듯, 그의 아들이자 모든 것을 물려받은 수제자인 트랜트 버지(Trent Burge)는 보란 듯이 아버지와 가문의 역사를 잇는 새롭고 모던한 그러면서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가득 담은 브랜드를 런칭했다. 2017년 첫선을 보인 그의 와인 브랜드 ‘바로싸 보이(Barossa Boy)’는 이름에 담긴 뜻처럼 트랜트 버지 본인의 유년 시절과 현재 그리고 호주 바로사 지역에 그 뿌리를 둔 버지 가문의 이야기를 그 레이블과 와인병에 잘 담아내고 있다.
그의 대표 와인 중 하나인 더블 트러블(Double Trouble)은 호주를 대표하는 레드 블렌딩 중 하나인 까베르네 소비뇽과 쉬라즈 반반의 블렌딩으로 만드는 와인이다. 그리고 특별한 이 와인의 이름은 (‘삶은 골칫덩어리(Life is trouble)’라는 표현이 있듯이) 일 년 중 절반은 호주 바로사 지역에서의 와인 양조가로, 그리고 다른 절반은 영국에서의 프로 크리켓 선수로 활동하는 트랜트 버지 본인의 두 개의 삶을 잘 표현함과 동시에 호주를 대표하는 두 개의 적포도 품종의 절반 블렌딩 그리고 두 포도 품종이 자란 두 개의 지역인 바로사 밸리와 이든 밸리를 의미하는 재치 있는 작명이다.
호주 바로사 밸리와 이든 밸리에서 자란 포도의 진한 검고 붉은 과실 향을 필두로 다양한 향신료와 말린 허브의 향들이 코를 가득 채운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풍부한 질감은 거칠지 않은 타닌은 많지만 입안에서 잘 풀어진다. 당도와 산도가 잘 어울려 부드러운 목 넘김과 느끼하지 않은 여운을 만들어낸다. 아무래도 육즙 가득하고 숯 향이 밴 채끝 등심이나 등식과 잘 어울린다. 이 와인은 높은 온도에서의 발효, 긴 새 오크통에서의 숙성 등 전통적인 양조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바로사 지역 전형적인 양조 스타일과 그 궤를 조금 달리하고 있다.
세계 각지의 최고 등급의 프리미엄 와인들이 보여주는 진하고 풍부한 향, 60년이 넘은 고목에서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풍미 그리고 훌륭한 산도의 밸런스가 매력적인 와인으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그들의 긴 양조 역사와 그들이 이어가고자 하는 철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한 병의 와인이다.

김상미 [페우디 디 산 그레고리오 Feudi di San Gregorio Taurasi]
타우라시를 달리 보게 된 건 최근 페우디 디 산 그레고리오의 타우라시 2012년산을 맛보면서부터다. 타우라시는 알리아니코(Aglianico)로 만든 레드 와인이다. 농익은 과일 향과 묵직한 보디감 때문에 알리아니코는 늘 내게 강인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병 숙성을 거친 타우라시는 원숙미 그 자체였다. 선명한 루비빛이 눈길을 사로잡았고, 달콤한 체리향과 계피, 바닐라 등 은은한 향신료 향이 다크초콜릿, 견과류 등 복합미와 어우러져 우아함을 한껏 뽐냈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은 마음마저 포근하게 감싸는 듯한 느낌이었다. '남부의 바롤로'라고도 불리는 타우라시의 참맛은 역시 오랜 병 숙성에서 나오는 것이었나 보다. 올겨울엔 여느 때보다 더 자주 타우라시를 찾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셀러 한 켠에 타우라시를 묵힐 공간을 마련해 둬야겠다.
페우디 디 산 그레고리오(Feudi di San Gregorio)는 1986년 이탈리아 캄파니아 이르피냐(Irpinia)지역 작은 마을 소르보 세르피코(Sorbo Serpico)에 설립된 와이너리다. 이름 속 페우디는 소유를 뜻하는 중세 라틴어(Feudum)와 고대 그레고리오 마뇨(Gregorio Magno)교황이 포도나무를 기르던 구불구불한 언덕 산 그레고리오(San Gregorio)를 의미한다. 포도원은 인근 베수비오 화산 작용으로 형성된 비옥한 석회질이라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 덥고 건조한 이 지역에서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정수지 [까테나 자파타 말벡 아르헨티노 Catena Zapata Malbec Argentino]
보기에도 밉상으로 생긴 바이러스가 퍼지자 기자의 머릿속에선 여성 4명이 그려진 와인 라벨을 지닌 까테나 자파타 말벡 아르헨티노(Catena Zapata Malbec Argentino)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이 와인은 와인 초보 시절 즐겨 마셨던 말벡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하이엔드 말벡이다. 까테나 자파타 말벡 아르헨티노는 니카샤(Nicasia)와 안젤리타(Angélica)포도원에서 자라는 거의 100년 된 포도나무 열매로 만든 와인이다. 이 말벡은 모두 필록세라 이전에 멘도사로 옮겨졌다. 이제 유럽에서는 원뿌리에 자라는 말벡을 찾을 수 없기에 이 말벡은 더욱더 의미 있다. 니카샤 포도원은 라우라 아버지 니콜라스가 가장 좋아하는 땅으로 우코 밸리(Uco Valley)에 자리하며, 이암과 매우 큰 자갈 토양을 지녔다. 안젤리카 포도원은 마이푸(Maipú)지역 해발고도 920m에 자리하며, 자갈과 이암, 진흙 토양을 지녔다. 와인에 쓰이는 포도 중 20%는 전송이 발효했다.

[까테나 자파타 말벡 아르헨티노의 라벨 이미지]
라벨에 그려진 여성 4명은 모두 사연이 있다. 첫 번째는 말벡 고향인 프랑스 아키텐 공국의 엘리노어 왕비다. 1100년대 당시 그녀는 말벡을 검은 와인(Black Wine)이라 부르며 즐겨 마셨다고 한다. 두 번째 여성은 아나 모세타(Ana Mosceta)다. 그녀는 니콜라 자파타와 결혼해 1902년 이탈리아 마르케를 떠나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그들은 멘도사에 처음으로 말벡을 심었다. 아르헨티나는 이민자에게도 말벡에게도 번성할 기회를 줬다. 세 번째는 마담 필록세라(Phylloxera)로 포도나무 뿌리를 갉아 먹는 질병으로 1800년대 말 유럽 포도원을 황폐화시켰다. 필록세라가 퍼지기 전 프랑스 보르도 라피트 로칠드나 마고 같은 와인에는 무려 40~60% 말벡이 쓰였다. 하지만, 필록세라 후 키우기 어렵고 늦게 익은 말벡 대신 메를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필록세라 유행 전 이민자에 의해 아르헨티나로 옮겨진 말벡은 따뜻한 반사막 기후 환경에서 훌륭한 와인이 될 수 있었다. 네 번째는 라우라 까테나(Laura Cateana)다. 그녀는 아버지 니콜라스와 함께 더 훌륭한 말벡을 만들기 위해 해발고도가 더 높고 좋은 토양을 지닌 포도원을 찾아다녔다.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일교차가 더 크게 나는 서늘한 포도원을 개발했고, 아르헨티나 말벡을 완전히 높은 경지에 올려놨다. 새로운 포도원을 조성하면서 니콜라와 라우라 부녀는 좋은 말벡 포도나무를 솎아냈는데 이를 까테나 커팅이라고 부른다. 와인 라벨에서 말벡 탄생, 전파, 멸종 그리고 부활을 모두 다루고 있으니 왠지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 시절에 잘 맞는 와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르헨티나 와인엔 소고기지!’하며, 소고기 안심을 구워 와인과 함께 즐겼다. 까테나 자파타 말벡 아르헨티노는 와인잔에 따르면, 바닥이 비치지 않을 정도로 진한 보랏빛을 낸다. 잔을 흔들어 보면, 점성이 상당하다. 코에서는 카시스, 블루베리, 바이올렛, 두드러지는 미네랄을 느낄 수 있다. 와인잔을 잠시 내려 두었다가 다시 향을 맡아보면, 잘 익은 과실이 주는 달콤함도 있고, 모카, 검은 열매, 언뜻 스치는 스파이스도 느낄 수 있다. 아직 너무 어려서 그렇지 이 와인이 앞으로 보여줄 향은 정말 대단할 거란 확신이 든다. 맛을 보면, 검은 열매, 특히 자두 풍미가 정말 뛰어나고 블루베리 풍미도 진하다. 잘 익은 타닌은 양도 적당하고, 산미가 좋은데, 살짝 짠맛이 동반되어 음식과 함께 마시기 좋은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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