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탈리아의 ‘와인 사랑방’ 에노테카

[피에몬테 지방 바롤로(Barolo) 역사지구 내의 에노테카 (사진:김예름)]


이탈리아 사람들은 주로 어디에서 와인을 구입할까. 이탈리아에서 와인을 가장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은 슈퍼마켓이다. 주기적으로 장을 보면서 와인 한두 병을 고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집까지 와인이 배달되는 인터넷 주문도 요즘 인기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와인을 사는 전통적인 방법은 따로 있다. 바로 에노테카(Enoteca)를 방문하는 것이다. 와인을 뜻하는 에노(Eno)와 장소를 뜻하는 테카(teca)가 결합한 이 단어는 와인을 파는 상점을 의미한다. 에노테카의 주인인 에노테카리오(Enotecario)에게 직접 와인에 대한 정보를 얻고 구입하는 것이다. 와인을 쉽고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는 채널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에노테카를 찾고 있다.


슈퍼마켓과 인터넷을 통해 쉽게 살 수 있는 와인을 에노테카에 직접 방문해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와인 도서관’이라는 뜻을 가진 에노테카는 와인을 구입할 뿐만 아니라 와인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와인을 좋아하고 와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와인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에노테카리오가 선별한 와인들을 판매하므로 새로 들어온 와인에 대해 정보를 얻기도 하고 특별한 날에 마시면 좋은 와인을 추천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와인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을 하고 싶거나 좋은 와인을 마시고 싶을 때는 슈퍼마켓보다 에노테카를 향한다.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에노테카는 본래 와인 판매만 했다. 하지만 관광 수입이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국가적 특성상 이제는 관광객의 수요에 맞춰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쉽게 지갑을 열만한 전통 식료품을 함께 파는 알리멘타리(alimentari)의 모습을 갖추기도 하고, 작은 테이블을 두고 간단한 음식과 함께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와인바의 역할도 한다. 실제로 이탈리아를 방문하면 유명 도시의 역사지구에는 식사와 와인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와인바 콘셉트의 에노테카가 다수 존재하고, 역사지구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에노테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피렌체 역사지구의 와인바 모습을 갖춘 에노테카 (사진:김예름)]


에노테카는 이탈리아 와인의 역사를 대변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와인을 가장 처음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와인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와인에 대한 배움과 소통이 일어나는 것은 물론, 와인 트렌드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니 이탈리아의 와인 문화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매년 이탈리아 최고의 레스토랑과 와인을 선정하는 미식 가이드 감베로 로쏘(Gambero Rosso)는 작년부터 새롭게 ‘이탈리아 에노테카 가이드(Enoteche d'Italia)’를 발행했다. 최고의 와인에는 ‘세 개의 와인잔(Tre bicchieri)’을, 최고의 레스토랑에는 ‘세 개의 포크(Tre forchette)’를 수여하는 감베로 로쏘가 최고의 에노테카에는 ‘세 개의 와인오프너(Tre Cavatappi)’를 수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탈리아 전 지역에서 총 48개의 에노테카가 ‘세 개의 와인오프너’를 받았다. 이탈리아의 20개 주에서 평균 2개의 에노테카가 선정됐는데 토스카나주는 이례적으로 6개의 에노테카가 꼽혔다. 그중에서 피렌체의 유서 깊은 에노테카 한 곳을 소개한다.


[비뇨리 에노테카의 입구 (사진:김예름)]


비뇨리(Vignoli) 에노테카는 1970년에 처음 문을 열어, 3대째 운영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많은 브랜드 이름이 그렇듯 비뇨리 에노테카도 가족의 성인 ‘비뇨리’를 그대로 사용했다. 작년에 50주년을 맞았으며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샵이자 반세기 동안 한 자리에서 피렌체 주민들의 와인 경험을 책임져온 곳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와인바나 식료품점으로 모습을 바꾼 경우도 많지만 비뇨리 에노테카는 전통적인 와인 상점의 모습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곳의 주인인 바스코 비뇨리(Vasco Vignoli) 씨는 아버지에게 에노테카 사업을 물려받은 후 주민들의 와인 구입은 물론 피렌체 역사지구의 호텔과 레스토랑의 와인 메뉴도 컨설팅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운영할 당시 항아리 모양의 큰 병인 다미쟈네(damigiane) 병에 대량으로 와인을 판매하던 시절부터 오크통(botti)과 피아스코(fiasco) 병을 거쳐 보르도 병(bottiglia bordolese), 그리고 지금의 와인병까지 경험하며 이탈리아 와인 역사를 몸소 체험했다고 한다. 그의 딸 역시 대학에서 와인 양조학을 공부하고 토스카나 유명 와이너리에서 경험을 쌓은 후 현재 에노테카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5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온 가족이 에노테카 운영에 공들이며 정직하게 차근차근 명성을 쌓아왔다.


[비뇨리 에노테카의 와인 컬렉션 (사진:김예름)]


비뇨리 에노테카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뇨리 가족이 엄격하게 선별한 품질 높은 와인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스코 씨는 좋은 와인을 판매하기 위해 유명 와이너리는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가족 단위의 소규모 와이너리까지 광범위하게 소개한다. 빈이탈리(Vinitaly)를 포함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열리는 와인 행사에 참여하고, 캐주얼하게 진행되는 샘플 시음까지 다양한 과정을 거쳐 와인을 엄선한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좋은 와인을 발굴하기 위한 끝없는 공부’라고 표현한다. 에노테카에 들어서면 와인 초보들도 어디선가 들어 봤을 만한 유명 와인을 비롯해 바스코 씨가 직접 품질을 보장하는 와인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비뇨리 에노테카를 찾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뛰어난 가격 경쟁력이다. 동일한 와인이라도 대형 슈퍼마켓이나 인터넷 구입 가격이 더 낮은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비뇨리 에노테카는 오랫동안 와인 사업을 하며 생산자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은 덕에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인 가격으로 와인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와이너리에서 직접 와인을 운송하는 등 중간 과정을 생략해 비용을 대폭 절감했다. 같은 가격으로 와인을 살 수 있다면 직접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배울 수 있는 에노테카를 찾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비뇨리 에노테카는 이런 방식으로 대형 마켓의 와인 할인 전쟁 속에서도 꿋꿋이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비뇨리 에노테카는 와인과 관련한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매년 곧 출시될 와인을 미리 맛보는 감베로 로쏘의 와인 시사회(Anteprima guida vini d'Italia)가 피렌체의 에노테카를 대표해 이곳에서 열린다. 이벤트 기간에는 피오 체사레(Pio Cesare), 리돌피(Ridolfi) 등 유명 와이너리의 생산자가 방문해 사람들과 와인에 대한 열정을 나누는 등 동네 와인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며칠 전에는 시칠리아 최고 와이너리로 꼽히는 돈나푸가타(Donnafugata)와 함께 온라인 시음회를 진행했다. 생산자와 에노테카의 단골 손님 스무 명이 곧 출시되는 돈나푸가타 와인을 함께 시음하며 신규 와인에 대한 정보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이탈리아의 전통 에노테카의 모습이 그러하듯 비뇨리 에노테카 역시 와인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고 있다.


[3대째 에노테카를 운영해 오고 있는 비뇨리 가족 (사진:김예름)]


글. 김예름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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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1.02.08 11:26수정 2021.04.1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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