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하면서도 왠지 포근한 느낌이 있는 와이너리”
기자가 2017년 나파 밸리를 여행할 때 들렀던 조셉 펠프스의 인상이다. 취재를 하다 보면 와인이 오너와 와이너리의 분위기를 닮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많다. 나파 밸리의 손꼽히는 명품 조셉 펠프스도 그중 하나다. 이 와인의 강직하고 진한 풍미를 마주하면 조셉 펠프스의 천정을 가로지르는 굵은 통나무의 강건함과 따스한 나무의 질감이 떠오르곤 한다.
[2017년 2월 비 내리던 날 방문했던 조셉 펠프스]
조셉 펠프스는 건설업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조셉 펠프스가 나파 밸리에 사업차 왔다 그곳에 반해 1973년 설립한 와이너리다. 당시는 나파 밸리가 세계 와인 시장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던 때였다. ‘파리의 심판’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기 3년 전이었고, 나파 밸리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르도네를 중심으로 주로 단일 품종 와인을 생산하며 품질을 높여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때 조셉 펠프스는 아무도 하지 않은 획기적인 일을 단행했다. 바로 인시그니아(Insignia)라는 블렌드 와인을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인시그니아의 성공은 이후 오퍼스원, 도미누스, 할란 등 나파 밸리의 내로라하는 명품 와인의 출시를 이끌었다.
현재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조셉 펠프스는 러더포드(Rutherford), 오크빌(Oakville),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Stags Leap District), 카르네로스(Carneros) 등 나파 밸리 총 아홉 곳에 포도밭을 보유하고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소비뇽 블랑, 비오니에 등을 재배하고 있다. 2011년에는 소노마 코스트(Sonoma Coast) 서부에 위치한 프리스톤(Freestone)에도 포도밭을 조성했다. 나파 밸리와는 달리 태평양에 인접해 기후가 서늘한 이곳에서 조셉 펠프스는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를 재배해 또 다른 스타일의 와인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들이 유독 자사 포도밭을 고집하는 이유는 ‘포도 재배지부터 직접 관리해야 품질의 기복이 없는 우수한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이들만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조셉 펠프스 신규 빈티지 테이스팅에서 맛본 와인들]
2021년 11월 23일 수입사인 나라셀라가 페어몬트 앰베서더 호텔에서 조셉 펠프스의 신규 빈티지를 시음하는 디너를 주최했다. 이 행사의 중심이 된 빈티지는 2018이었다. 디너가 시작되기 전 인터넷 화상회의 프로그램으로 접속한 조셉 펠프스의 수출 디렉터 로버트 백스터(Robert Baxter)에 따르면 2018년은 이전 5년에 비해 가장 서늘한 기후였다고 한다. 덕분에 포도가 천천히 익으며 풍미를 응축시킬 수 있었고 신맛이 상큼해 우아한 스타일의 와인이 생산될 수 있었다. 2017년에는 화재로 인해 생산량이 평년 대비 1/3으로 줄었지만, 2018년은 강우량과 기온 등 모든 것이 적당해 생산량도 회복됐다고 하니 여러모로 다행스러운 한 해로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럼 디너와 함께 시음한 조셉 펠프스의 새로운 빈티지들은 어떤 맛을 보여주었을지 차례로 알아보자.
나파 밸리 소비뇽 블랑 2020 (Napa Valley Sauvignon Blanc 2020)
처음 서빙을 받은 와인은 2020년산 소비뇽 블랑이었다. 2020년은 조셉 펠프스에게는 아픈 한 해였다. 화재로 인해 레드 와인 생산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화마가 포도밭을 집어삼키지는 않았지만 날아든 연기 때문에 포도에는 탄내가 밸 수밖에 없었다. 와인을 만들 때 인공적인 기술로 탄내를 뺄 수 있었겠지만, 최상의 품질만 고집하는 조셉 펠프스는 과감히 2020년산 레드 와인을 생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이 화재 발생 전에 수확한 청포도로 화이트 와인만 생산했고, 그중 하나가 나파 밸리 소비뇽 블랑 2020이다.
[굴 요리와 조셉 펠프스 나파 밸리 소비뇽 블랑 2020]
이 와인은 나파 밸리 북쪽 세인트헬레나(St. Helena) 지역의 조셉 펠프스 자사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 100%로 만든 와인이다.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포도를 새벽에 수확했고 테루아의 맛을 살리기 위해 천연효모로 발효했다. 숙성은 400~500리터의 대용량 오크통(Puncheon)을 이용해 품종 고유의 신선함을 강조했다. 와인 잔을 코에 가까이 대자 사과, 레몬, 배, 멜론 등 다채로운 과일향이 상큼한 부케를 이루고 있었다. 한 모금 머금자 부드러운 질감이 경쾌한 신맛과 어울리며 입맛을 자극했다. 함께 곁들인 요리는 사바용 소스를 곁들인 굴이었는데, 와인의 질감과 사바용 소스의 부드러움이 무척 잘 어울렸다. 은은한 과일향이 굴의 풍미를 해치지 않았고 와인의 상큼함이 굴을 먹고 난 뒤의 비릿함을 개운하게 씻어주었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점점 살이 오르는 싱싱한 굴을 먹을 계획이라면 이 와인이야말로 최고의 페어링 파트너다.
소노마 코스트 프리스톤 샤르도네 2018 (Sonoma Coast Freestone Chardonnay 2018)
[게 요리와 소노마 코스트 프리스톤 샤르도네 2018]
이 와인은 프랑스 부르고뉴 스타일로 송이 전체(whole cluster)를 압착해 배럴에서 발효한 와인이다. 젖산 발효(malolactic fermentation)와 앙금 젓기(lees-stirring) 과정을 거쳐서 신맛이 날카롭지 않고 질감도 둥글다. 복숭아와 살구 등 핵과류 향이 달콤하고 멜론과 망고 등 열대과일향이 신선하다. 함께 조화를 이룬 꽃, 조개껍질, 연기, 버터 등의 풍미는 은은한 복합미를 이뤘다. 프리스톤은 나파 밸리와는 별도의 양조팀이 와인을 만든다고 한다. 와인을 압도하지 않도록 적절한 오크의 사용이 프리스톤 팀의 실력을 말해주는 듯하다. 와인의 풍성한 과일향이 게 요리의 풍미와 잘 어울렸고, 여운에서 길게 이어진 상큼한 레몬향이 느끼할 수 있는 게의 뒷맛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소노마 코스트 프리스톤 피노 누아 2018 (Sonoma Coast Freestone Pinot Noir 2018)
[오리 고기와 소노마 코스트 프리스톤 피노 누아 2018]
이 와인도 송이 전체를 압착해 만들었다. 13개월간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숙성을 거쳤는데 39%는 새 오크, 61%는 2년 된 중고 배럴을 사용했다. 딸기, 라즈베리, 크랜베리 등 달콤한 붉은 베리류의 향미가 한가득 올라왔고, 삼나무, 후추, 제비꽃, 연기 등의 다채로운 풍미가 매끈한 질감과 함께 우아함을 더했다. 누구든지 한 모금만 마셔봐도 금방 사랑에 빠질 정도로 부드러움과 풍부함이 매력적이다. 피노 누아와 오리고기는 서양에서 찰떡궁합으로 통하는 페어링이다. 오리는 독특한 풍미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지만, 프리스톤 피노 누아와 함께 즐긴다면 누구나 편히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와인의 풍부한 과즙이 오리와 만나자 비릿한 고기의 맛이 고소하게 바뀌는 마법 같은 반전이 일어났다.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2018 (Napa Valley Cabernet Sauvignon 2018)
[스테이크와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2018]
조셉 펠프스가 보유한 나파 밸리 포도밭 중 세인트 헬레나, 사우스 나파 밸리, 오크 놀 디스트릭트,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이 97%, 카베르네 프랑이 2%, 말벡이 1% 섞여 있다. 여러 곳의 포도를 블렌드해 만든 만큼 복합미가 뛰어나고 빈티지의 안정성 또한 탁월하다. 18개월간 오크 숙성을 거쳤는데, 새 오크가 40% 1~2년 된 오크가 60%이고, 프랑스산과 미국산이 절반씩 섞였다. 2018년이 평년보다 서늘한 기후를 보여서인지 카베르네 소비뇽의 클래식한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블랙커런트, 블랙베리, 검은 자두, 검은 체리 등 검은 베리류의 향미가 풍부하고, 연필심, 다크초콜릿, 바닐라, 코코넛, 토스트, 삼나무 등 오크 숙성에서 발달한 2차 아로마의 풍미가 조화로운 밸런스를 이뤘다. 적당한 보디감과 탄탄한 질감이 ‘베이비 인시그니아’라고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탁월한 밸런스를 보였다. 미디엄 굽기의 스테이크와 함께 즐기니 육즙의 고소함과 와인의 아로마가 아름다운 페어링을 이루고, 타닌이 고기의 질감과 어울려 스테이크의 맛이 한결 돋보였다.
인시그니아 2018 (Insignia 2018)
인시그니아는 매해 생산하는 포도 중에서 품종을 막론하고 제일 좋은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조셉 펠프스의 철학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이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90%의 비율을 차지하지만 기타 포도는 빈티지마다 다르게 선택된다. 2018은 카베르네 소비뇽 87%에 프티 베르도 8%, 말벡 3%, 카베르네 프랑 2%를 블렌드해 만들었다. 진하고 검붉은 색이 사람을 빨아들일 것처럼 매혹적이고 카베르네 소비뇽 특유의 그린 페퍼 향이 풍부한 검은 베리향과 어울려 풍성한 부케를 이루고 있었다. 부드럽고 묵직한 질감은 매끈한 타닌과 함께 입안에 한 가득 양감을 선사했다. 여운에서는 감초와 초콜릿 향이 달콤한 과일향과 함께 끝없이 이어져 식후에 다크초콜릿과 즐긴다면 근사한 디저트가 될 것 같다.
[인시그니아 2017과 2018]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인시그니아 2017이 서프라이즈로 등장한 것이다. 2017과 2018은 완전히 다른 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확연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2018이 강건하고 남성적이라면 2017은 여성적이고 우아했다. 2017는 카베르네 소비뇽 94%에 말벡 4%와 카베르네 프랑 2%가 블렌드 된 와인인데, 2018보다 붉은 베리류의 풍미가 더 많고 꽃향과 함께 후추처럼 톡 쏘는 향신료 향이 화사함을 더했다.
매년 기후도 다르고 포도 품종과 비율도 다르지만 연이은 두 빈티지를 시음해보니 인시그니아는 결코 한 가지 스타일을 고집하는 와인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매년 조셉 펠프스가 수확한 최고의 포도로 만든 단 하나의 명품, 그해의 최상을 보여주는 와인이 인시그니아인 것이다. 인시그니아 2019는 어떤 맛을 보여줄까? 벌써 기대가 앞선다.
작성 2021.11.27 12:26수정 2021.11.27 12:30
2005년부터 유럽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와인과 사랑에 빠졌다. 2012년 회사를 그만두고 와인에 올인, 영국 Oxford Brookes University에서 Food, Wine & Culture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석사 논문 'An Exploratory Study to Develop Korean Food and Wine Pairing Criteria (한국 음식과 와인의 조화)'는 2014 Global Alliance of Marketing & Management Associations(GAMMA) Conference에서 소개된 바 있으며, 학술지 'Beverages'에도 게재됐다. (http://www.mdpi.com/2306-5710/3/3/40). 2015년 영국 런던 Wine & Spirit Educational Trust(WSET)에서 Diploma를 취득했으며, 그리스, 마데이라, 스페인 등 국가별 와인 공인 강사 자격을 보유하고 있다.
2014년부터 5년간 주간동아에 와인칼럼을 연재했으며, 2019년부터는 이코노미 조선에 칼럼을 연재중이다. 한림대학교에 출강 중이며 WSA와인아카데미 대표강사로 WSET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와 신세계 백화점에서는 취미로 와인을 즐기는 분들께 쉽고 재미나게 와인을 강의하고 있고, 기업체, 공무원, 럭셔리 브랜드와 백화점 VIP 등을 위해서도 '인문학과 와인' 등 다양한 주제로 인기 있는 특강을 진행 중이다. 베를린 와인 트로피, 아시아 와인 트로피, 한국 주류대상 등의 심사위원 및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캘리포니아, 스페인, 그리스, 호주 등 와인 세미나의 페널과 통역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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