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Hesiod)는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가난한 농부이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 '일과 나날(Works and Days)'은 그리스 신화와 우화로 가득 찬 교훈적인 서사시이지만, 여러 농업 기술을 담고 있는 농업서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도 나온다.
“오리온(Orion)과 시리우스(Sirius)가 하늘 중천에 떠 있을 때, 장밋빛 여명에 아르쿠투루스(Arcturus)가 보일 때쯤, 포도 덩이를 잘라 집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 포도에게 10일간 태양과 밤을 보여주어라. 그 후 5일간은 그늘로 덮어주어라. 그리고 6번째 날 디오니소스를 즐겁게 해줄 선물로 만들어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 신과 별들이 빛나는 낭만적인 시로 읽히겠지만, 션 태커리(Sean Thackrey)는 이 대목에 진심이었다. 그는 더욱 자세한 조사를 통해 19세기 중반까지도 포도를 딴 후에 야외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고 별 아래에서 발효를 하곤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와인을 만들었다. 다른 와인메이커들은 그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미친 천재(mad genius)'라고.

[션 태커리. 그냥 와인 좋아하는 미국 할아버지 느낌이다]
션 태커리는 194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오리곤주 리드(Reed) 대학과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미술사(art history)를 공부했지만, 졸업은 실패했다. 북 에디터로 일하다가 친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작은 아트 갤러리를 열었다. 여기에서는 자신의 관심을 살려 19세기 초기 사진 작품들을 전시했다(당시 사람들은 이런 사진 작품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 이 곳은 초창기 사진 작품의 선구자적 갤러리로 평가받으며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진다.
그는 1977년 볼리나스(Bolinas)라는 북부 캘리포니아 작은 해변가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이 마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몇 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소위 히피나 은둔자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이곳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도로(State Route 1)에서 볼리나스로 향하는 길에 있는 도로 표지판이 자꾸 없어지곤 했는데, 알고보니 이 곳 주민들이 훔쳐 간 것이었다. 현재까지도 볼리나스를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은 존재하지 않는다(주민 투표를 통해 완전히 없애버렸다).
션 태커리는 집 뒷마당이 허전해 보여, 심미적인 이유로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재미 삼아 와인을 만들어보았는데, 여기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된다. 와인 양조가 자신이 좋아하던 예술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1981년부터 제대로 와인 양조를 하기로 결심하였는데, 와인에 대한 교육이 전무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경험만으로 와인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가 유일하게 참고한 자료는 취미로 모으기 시작했던 헤시오도스의 서사시 등 골동품 고서들이었다. 박테리아 문제가 발생해 이를 해결하고 싶어 UC 데이비스 대학에서 수업을 잠깐 듣긴 했지만, 그에게 그곳에서 배운 과학적인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와인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하여 오로지 과거와 역사만 본 사람이었다.
와인에 대한 고서를 모으고 또 모았는데, 여기에는 6세기경 이집트 파피루스에 적힌 와인 구입 영수증도 있었다. 1826년에 출판된 미국 와인 가이드도 있었다. 그러한 고서와 자료를 총 740권가량 모았는데, 세계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와인 책과 문헌을 모은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는 고서를 번역하고 웹사이트에 올리기도 했다. 단지 재미와 몇몇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그랬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고서 컬렉션은 작년 4월 뉴욕의 한 출판사에 판매가 되었다. 가격은 2백만 달러(약25억)였다.
신화와 전설에 영향을 받은 그의 와인 메이킹은 현대 와인 양조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일반적인' 양조법에는 관심이 없었고 트렌드 또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집 뒷마당 허술한 시설에서 와인을 양조했다. 계획적이거나 기술적으로 양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마당에 있는 유칼립투스 나무 아래에서 발효를 하였으며 자신이 만든 와인에는 별자리나 별의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보다는, 금주령 시기 몰래 밀주를 만드는 동네 양조장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와인 양조에 진심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맛있는 와인을 만들어냈다. 그는 평생 자신의 포도밭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몇몇 친구들의 포도밭에서 좋은 포도를 구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스택스립(Stags Leap District) 포도 생산자 네이선 페이(Nathan Fay)로부터 까베르네 소비뇽과 멜롯을 받아서 와인을 만들었다. 이 포도로 만든 그의 1981년 첫 공식 와인은 독수리자리라는 뜻을 가진 아퀼라(Aquila)였다. 그 뒤 시라를 포함한 론 품종들로 점차 옮겨갔는데, 어찌 보면 그는 그 후 캘리포니아에서 론 레인저스(Rhone Rangers)라고 불리는 와인메이커들의 시초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그런 명칭에 개의치 않았으며 자신을 무엇이라 정의하는 그 어떤 것에도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그는 주로 여러 품종이 블렌딩된 와인을 만들었다. 확실히 그는 각 품종의 포도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품종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매년 다른 포도밭에서 다른 품종의 포도를 가지고 와서 다른 비율로 섞어 와인을 만들었다. 론 품종만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산지오베제, 피노누아, 프티 시라등 품종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빈티지도 무시하곤 했다. 그의 대표와인 중 하나인 플레이아데스(Pleiades)가 대표적으로 그러한 와인인데, 와인에 빈티지 대신 에디션(edition) 번호가 적혀있다. 즉 자신이 몇 번째로 만든 와인이라는 번호를 붙인 것인데, 매년 출시되는 와인도 아니다. 그는 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와인을 공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표 와인인 오리온(Orion) 역시 블렌딩의 끝을 보여주는 와인이다. 이 와인은 나파밸리 산타헬레나(St. Helena)에 있는 앤드류 로시 빈야드(Andrew Rossi Vineyard)의 포도로 만드는데, 이 포도밭에는 1905년부터 심어진 오래된 포도들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이 포도들이 어떤 품종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그냥 이 포도밭에 있는 온갖 포도들을 필드 블렌딩(Field Blanding)하여 와인을 만든다. UC 데이비스에서 이 포도밭에 있는 포도 품종을 분석하는 시도를 한 적이 있는데,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도 모르는 이 포도들을 가지고 그를 대표하는 와인을 만들었다.
철저하게 무명이었던 그의 와인은 로컬들의 입소문을 타고 점차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 80년대 후반에는 로버트 파커도 그의 와인을 접하고는 높은 점수를 매기게 된다. 실제로 파커는 션 태커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신비하고 아이코닉 한 와인메이커 중 한 명” 1995년부터는 아트 갤러리를 떠나 풀타임으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 후 세계적으로 알려져 유럽과 일본에도 수출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유명세나 상업적인 성공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집 뒤뜰에서 와인을 만들었으며 매년 4천 케이스 정도의 와인을 만드는 것으로 항상 만족했다.
이렇게 보면 외톨이의 괴짜 와인메이커의 느낌이 나지만, 사실 그는 사람을 매우 좋아했다. 고서 읽기를 즐기며 5개 언어를 말할 수 있었지만,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는 매우 박식한 달변가이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표지판이 없어서) 찾아가기 힘든 보헤미안 마을 볼리나스에는 그의 팬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예술가 등이 자주 방문했으며, 그는 일이 바쁠 때가 아니면 흔쾌히 방문자들과 즐겁게 대화하며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사람 좋은 아저씨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가 중학교 때 살던 도시에서 한 치과의사가 '이쁜 미소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는 그 대회에서 2등을 했다. 편안한 그의 얼굴은 평생 그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였다.

[평생 사용한 오래된 트럭에 기댄 션 태커리]
이쯤에서 그의 철학을 알 수 있는 몇 개의 어록을 살펴보자.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깊이 생각할 만한 거리를 던져주는 말들이다.
“내 와인은 사람과 같아요(My wines are like a person). 그들은 수다 떨고, 변화하고, 매번 마실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죠. 매일 다르고 매시간마다 달라요. 이러한 복잡성이 와인을 재미있게 만들죠.” 그가 진정으로 와인을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2003년 와인스펙테이터와의 인터뷰 내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파캡이나 보르도 와인은 나에게 너무 고상해요. 만일 그 와인이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에요. 그런 와인을 왜 마시죠?”
“와인 메이킹은 요리나 그림 그리는 것과 같아요(Winemaking is more like cooking or painting than farming or manufacturing). 진정한 요리사는 정확한 수치에 의존하지 않아요. 자신의 직관과 경험을 따르죠. 예술 또한 한 작품이 정확히 다시 반복될 수는 없어요”. 실제로 그는 항상 와인을 요리하듯 만들었다. 매번 다른 재료로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따랐다. 그리고 항상 다른 와인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를 감에만 의존하는 와인메이커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는 철저하게 실험주의자였다. 자신이 원하는 와인을 얻기까지 매우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며 경험을 쌓았다. 요리사가 레시피 하나 만들기 위해 갖가지 시도를 하는 것처럼, 화가가 작품 하나를 그리기 위해 수많은 드로잉 연습을 하는 것처럼 그는 40년간 와인을 만들면서 계속 실험하고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경험을 쌓았다.
“떼루아는 포도재배의 차별주의자와 같아요(Terroir is a viticultural racism)” 그는 AVA나 AOC등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땅을 기준으로 구획을 나누는 것은, 정치가들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지역구를 나누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그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곤 하는데, 실제로 그는 떼루아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너무 과하게 집착하는 것을 비판하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와인메이커로서 나의 유일한 목적은 즐거움을 만드는 것이에요(My only purpose in the entire universe as a winemaker is to produce pleasure)” 실제로 이 말이 그의 와인 철학의 모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적인 지식, 규율, 트렌드 등에 관심을 쏟는 대신, 그의 유일한 목적은 사람들이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글라스 안에 즐거움을 담아 사람들과 대화하며 즐길 수 있는 와인을 만드는 것이 그가 유일하게 추구하는 바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추구한 즐거움은 이제 더 이상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2022년 5월 30일,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암으로 79세의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와인스펙테이터, 와인엔수지애스트, 잰시스로빈슨, 뉴욕타임즈 등 많은 매체와 와인 평론가들이 그에 대한 추모 기사를 쏟아냈고 함께 안타까워했다. 예술가이자, 학자이자, 와인메이커이자, 수집가이자, 선구자이자, 친구이자, 영감을 주는 사람이자, 무엇보다 규칙을 깨는 사람(rule-breaker)으로서의 그의 삶은 정말 캘리포니아 와인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와인메이커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직관과 감각에 따라서 와인을 만들었다. 하지만 엄청난 실험광이기도 했다.
직접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가 와인을 만들 때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스타일을 그대로 재현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사실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긴 하다. 피카소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기록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최근에 보틀샤크의 대표 데이비드가 션 태커리 와이너리를 방문하여 라이브러리 릴리스를 비롯한 5종의 와인을 국내에 들여왔다. 다행히도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와인을 비롯하여 맛있게 숙성된 고인의 와인들을 함께 마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각 와인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덧붙여 본다.
플레이아데스 27(Pleiades 27)
위에서 소개한 대로 빈티지는 따로 없다. 2020년 11월에 병입이 이루어졌다는 정보는 입수했다. 산지오베제, 프티 시라, 피노누아, 비오니에, 시라 등이 블렌딩되었다고 한다. 즉 션 태커리가 이 재료들을 가지고 27번째 레시피로 만든 와인이다. 상당히 밝고 맑은 루비색을 띠고 있다. 체리 등 레드 과일 계열의 향이 많이 느껴지는데 은은한 꽃 향과 향신료 느낌에 여러 품종이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와인 엄청 맛있다. 밸런스가 너무 잘 잡혀 있어 한 모금만 마시더라도 깜짝 놀라게 된다. 은은하게 오크 터치로 인한 뒷맛도 있다. 독학으로 이런 와인을 만들어내다니. 사람들이 '미친 천재'라고 불린 이유가 분명 있는 듯하다. 물론 40년간 실험을 통한 경험과 감각으로 탄생한 와인이겠지만. 플레이아데스는 여러 별들이 함께 있는 성단의 이름이다. 이름처럼 여러 품종들이 서로 어우러져 함께 빛나고 있다.
안드로메다 피노누아(Andromeda Pinot Noir) 2006
이제 안드로메다로 떠날 차례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 와인 마린 카운티(Marin County) 와인이다. 대부분 사람에게 생소한 지역일듯싶다. 개인적으로도 이 카운티 와인 처음 접해본다. 마린 카운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교를 건너면 시작되는 해안가를 끼고 있는 지역이다. 일단 땅값이 무척 비싼 지역이고, 서늘한 해양성 기후이다. 따라서 포도를 재배하기에 무척 도전적인 지역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션 태커리가 살던 볼리나스가 이 카운티에 있기 때문에, 그는 주변 포도밭의 포도를 받아 와인을 만든 듯싶다. 피노누아 100% 와인답게 딸기 및 체리류의 레드 프루트 향을 담고 있는데, 16년이나 지난 와인인지라 숙성으로 만들어지는 오묘한 흙 향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역시나 기분 좋은 밸런스를 선사하는데 정말 이 와인 부르고뉴 와인 같다. 이런 와인을 블라인드로 가져간다면, 미국 와인이라는 것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거기에 마린 카운티 와인이라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카시오페아 피노누아(Cassiopeia Pinot Noir) 2006
이번에는 카시오페아로 가보자. 또 다른 피노누아 100% 와인으로 멘도치노 카운티 앤더슨 밸리(Anderson Valley)에서 가져온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이 지역 역시 피노누아가 유명하다. 앞선 와인과 포도의 차이가 드러난다. 안드로메다 보다 좀 더 가죽 및 흙 느낌이 많이 나는데 더욱더 부르고뉴 와인 같다. 과실향이 예쁘면서도 힘도 좋다. 좋은 산미와 과실의 달콤함이 역시나 좋은 밸런스를 보여준다. 더욱 복합적인 향과 맛을 보여주는데 이 와인은 더 숙성해도 좋을 듯싶다. 앞선 안드로메다는 지금 마시기에 딱 좋게 숙성된 와인이고, 카시오페아는 셀러에 몇 년 더 보관해도 좋다. 역시나 아쉬운 것은 이 와인들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션 태커리 오리온(Sean Thackrey Orion) 1997
1991년부터 만들어온 션 태커리의 대표 와인 중 하나이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나파밸리 로시 빈야드에서 1905년부터 식재된 온갖 (알 수 없는) 포도를 필드 블렌딩해서 만든 와인이다. 나름 개인적으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즐겨 하긴 하지만, 이 와인의 품종들은 정말 모르겠다. 론 품종들이 제법 들어간 것 같긴 한데 미스터리하다. 그리고 1997년 빈티지여서 숙성된 느낌도 많이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 다 상관 없다. 왜냐면 맛있기 때문이다. 진하게 풍족한 맛이다. 그러면서도 재미있다. 약간 내추럴 와인스러운 느낌도 받을 수 있는데, 사실 션 태커리 자체가 캘리포니아 내추럴 와인의 시초이기도 하다(물론 그는 그러한 단어에 전혀 신경을 안 썼겠지만). 그는 사람의 힘이 아닌 하늘의 힘을 담아 최소한의 간섭으로 와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그에게 이러한 천재적인 양조 능력을 선사했나 보다.
션 태커리 이글포인트(Sean Thackrey Eaglepoint) 2000
또 다른 션 태커리의 대표 와인이다. 멘도치노 카운티의 이글포인트 빈야드에서 생산한 포도로 만들었다. 이 와인은 별 이름이 아니라 왜 포도밭 이름을 따서 지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사실 션 태커리의 첫 와인 아퀼라 자체가 독수리자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와인은 2000빈티지에만 만든 와인이다. 프티시라, 산지오베제 등 여러 포도들이 블렌딩되었는데, 아마도 그 해에 좋은 재료들이 들어와서 특별히 실력 발휘를 한 독특한 레시피의 셰프 스페셜 같은 와인이듯싶다. 이 와인 달콤하다. 물론 당도가 있는 와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달콤한 과실 향에 맛있는 과자 같은 고소한 향도 난다. 밝고 상쾌한 향에 지금 마시기에도 좋게 숙성이 잘 되어 있다. 물론 아직 산도가 살아있어 더욱 오래 보관도 가능하다. 밸런스 및 뒷맛의 풍미도 매우 좋은데 블렌딩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주는 와인의 정석이다. 그리고 이런 와인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무척 흥미롭다. 시간이 흐르면 은은하게 포트 와인향 같은 또 다른 달콤한 향을 선물받을 수 있다.

[5종의 와인 이미지. 와인 레이블 뒷면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
하지만 작게 적혀 있는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Sean A. Thackrey Vintner, Bolinas, California]
5종의 와인을 마시면서 그가 진정으로 추구한 것은 단지 즐거움(pleasure)이라는 사실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떤 품종을 섞던지, 어느 지역에서 가져오던지, 어떤 빈티지인지 상관없이 그는 진정 '즐거운 와인'을 만들었다. 고상한척하지 않는 편안하고 맛있는 와인이었다. 일반적인 와인 양조법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집 뒷마당 허름한 시설에서 만든 와인이지만, 그의 40년간의 경험과 열정은 이토록 맛있는 와인을 만들었다.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와인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쉽긴 하지만, 국내에 들어와 있는 그의 와인을 조금 더 마시면서 아쉬움을 달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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