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게리. 흐르는 듯한 모습의 디자인으로 유명한, 현존하는 최고의 건축가 중 한 명이다 (출처: 마르께스 데 리스칼)]
프랭크 게리의 치맛자락 프로젝트
“제가 태어난 해의 와인을 열어주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1929년에 태어난 백발의 노신사는 결국 프로젝트를 승낙한다. 구불구불한 언덕 위 포도밭이 가득한 땅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1858년에 지어진 후 거의 변화가 없던 낡은 와이너리를 가장 현대적인 건물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였다.
세계 최고의 건축가로 손꼽히는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에게 마르께스 데 리스칼(Marques de Riscal, 이하 리스칼)이 자신의 와이너리를 새롭게 지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게리는 처음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이미 파리와 시애틀,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이었고, 이 한적한 시골 마을의 프로젝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리스칼은 그에게 3일만 리오하에 와서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휴양차 가벼운 마음으로 리오하에 들른 게리에게 리스칼은 와인셀러를 열어 보여줬다. 이 셀러에는 1862년 첫 빈티지부터 최근까지 리스칼에서 생산한 140여 년간의 모든 빈티지 와인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런 방대한 컬렉션을 갖춘 와이너리는 전 세계에서 리스칼이 유일했다. 유명한 보르도 그랑 크뤼 샤토도 모든 빈티지의 와인을 다 보유할 수는 없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약탈을 당하기도 했고 피해도 컸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의 격전지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덕택에 방대한 와인 컬렉션을 유지하고 있던 리스칼의 셀러를 보고 게리는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1929년 자신의 탄생 빈티지의 와인을 대접하는 리스칼의 성의에 결국 프로젝트를 승낙하게 된다.
[마르께스 데 리스칼의 와이너리 건물. 메리어트 계열 럭셔리 호텔이기도 하다 (출처: 마르께스 데 리스칼)]
2006년, 드디어 마르께스 데 리스칼의 새 와이너리 건물이 완성됐다. 스페인 전통 무용인 플라멩코 무희의 치맛자락을 모티브로 한 이 건물은 분홍빛, 금빛, 은빛 지붕이 흡사 와인처럼 흘러내린다. 리오하의 전통적인 풍경 속 작은 마을에 위치한 건물로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디자인에 오픈 당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건물은 결국 프랭크 게리의 최고 역작이자 현재까지도 지구상에서 가장 현대적인 건물로 손꼽힌다.
현재 이 건물은 와이너리 외에도 64개의 룸이 있는 5스타 호텔로도 운영 중이다. 호텔은 메리어트에서 인수해 관리하고 있으며, 스페인 최고의 스파(Caudalie Vinothérapie Spa)를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와인 안에서 목욕을 하는 프로그램이 인기이다. 또한 리오하 출신 스타 셰프인 프란시스 파니에고(Francis Paniego)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미슐랭 레스토랑도 함께 자리한다. 1년에 12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으며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 휴양지(1001 escapes)에도 소개됐다.
물론 이곳은 1858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와이너리를 증축한 곳이기 때문에 내부 셀러에는 리스칼의 모든 빈티지 와인이 보관돼 있다. 지극히 현대적인 외형의 와이너리 안에 숨 쉬고 있는 160여 년의 역사. 이러한 미래와 전통의 공존은 마르께스 데 리스칼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이다.
[2015년에는 1862~2012년 중 특별한 빈티지를 선택해 히스토리컬 빈티지 테이스팅을 개최하기도 했다 (출처: 마르께스 데 리스칼)]
리스칼의 무수한 훈장들
1850년대 프랑스에서 필록세라가 퍼지기 시작하기 무렵, 아직 피해를 입지 않았던 스페인에서는 이를 기회로 삼아 보르도의 저명한 와인메이커들을 국가 차원에서 초대했다. 그중 장 피노(Jean Pineau)는 리오하 와인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4년 이상의 장기 숙성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하지만 4년간 와인 판매를 못한다면 그 기간 동안 수입이 없다는 것 아닌가? 이에 부담을 느낀 와이너리들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단 한 명, 엘시에고(Elciego) 지역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던 기에르모(Guillermo Hurtado de Amézaga)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1858년 마르께스 데 리스칼 와이너리를 설립하고 장 피노를 리스칼의 와인메이커로 영입했다. 4년 후인 1862년 리스칼의 첫 번째 빈티지 와인이 출시됐고, 그 이후의 역사는 마르께스 디 리스칼 와인 병에 붙어 있는 무수한 훈장이 대신 말해준다.
특히 1895년 프랑스 보르도 박람회에서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전 세계 모든 와인을 제치고 리스칼의 와인이 1등을 했다. 박람회 역사상 프랑스 와인이 아닌 타 국가 와인이 처음 우승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에 명예 디플로마를 받았고, 이는 현재 마르께스 디 리스칼의 와인 레이블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95 보르도 박람회 우승 디플로마를 비롯한 여러 훈장들 (출처: 마르께스 데 리스칼)]
보르도 박람회 우승으로 인해 인기가 높아지자 여러 모조 와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리스칼은 와인을 금색 철사로 감아 진품 와인임을 표시했다. 이러한 전통은 여러 스페인 와이너리의 와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72년에는 스페인 서북부 루에다(Rueda) 지역의 잠재력을 깨닫고 오랜 노력 끝에 다시금 되살렸다. 이 지역은 현재 스페인 최고의 화이트 와인 생산지로 평가받고 있다. 1995년에는 리오하에 최초로 포도 분리 테이블을 도입하기도 했고, 마드리드 대학 등과 협업해 최신 와인 기술을 꾸준히 연구하며 활용하고 있다.
<와인 엔수지애스트((Wine Enthusiast)> 선정 2013년 최고의 유럽 와이너리, <드링크 인터내셔널(Drinks International)> 선정 2019년 가장 존경받는 와인 브랜드 8위, 2021년 2022년 연속 세계 최고의 빈야드 2위 등 최근까지도 수상내역이 끊이지 않는다. 그만큼 전통을 지키면서도 혁신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르께스 데 리스칼의 공동 오너, 호세 무구이로]
지난 6월 13일 수입사 (주)하이트진로의 초대로 마르께스 데 리스칼의 공동 오너인 호세 무구이로(José Luis Muguiro)가 한국을 찾았다. 스페인 특유의 열정이 가득 넘치는 노신사와 함께 마르께스 데 리스칼의 와인 6종을 테이스팅했다. 각 와인 모두 스토리와 매력이 넘치는 와인들이었다.
마르께스 데 리스칼 소비뇽 블랑(Marques de Riscal Sauvignon Blanc) 2020
리스칼이 루에다 지역을 발견했을 당시, 이 지역의 포도들은 셰리 양조용으로 남부 스페인 헤레스에 싼값에 판매되고 있었다. 리스칼은 이 지역을 완전히 새롭게 개발했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걸리는 힘든 일이었지만 결국 루에다를 스페인 최고 화이트 와인 생산지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74년 리스칼은 처음으로 이 지역에 소비뇽 블랑을 심어, 매혹적인 스페인 소비뇽 블랑을 탄생시켰다. 이 와인은 소비뇽 블랑 특유의 녹색 허브 아로마에 시트러스향도 있지만 노란 과실 향도 상당히 많이 느껴진다. 잘 익은 과실에서 느껴지는 풍성한 바디감에 산도도 그리 튀지 않아, 애피타이저로 와인만 마셔도 기분 좋은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스크루캡을 사용해 신선함을 더욱 오래 유지할 수 있으며 100% 유기농 와인이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젊은층 소비자에게 매우 인기가 좋다고 한다.
마르께스 데 리스칼 바론 데 시렐 비나스 센테나리아스(Marques de Riscal Baron de Chirel Vinas Centenarias) 2021
리스칼의 와인메이커가 루에다에서 세고비아로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2.5헥타르 정도의 포도밭을 발견했다. 무언가 다름을 느낀 그는 차에서 내려 이 포도밭을 더욱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필록세라의 피해를 받지 않아 접목을 하지 않은 매우 오래된 베르데호가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이 와인은 유럽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필록세라 시대 이전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워낙 고목인지라 와인 생산량도 적어 외국에서도 고급 레스토랑 위주로 판매되고 있다. 젠틀한 하얀 과실과 꽃향 사이에 아니스 같은 허브와 스파이스 뉘앙스도 느낄 수 있다. 상당히 높은 집중력을 지닌 묵직한 바디감의 와인으로 고목이 뿜어내는 깊이 있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워낙 풍미가 좋아 양고기 같은 붉은 육류와도 매칭이 가능할 정도다.
마르께스 데 리스칼 레세르바(Marques de Riscal Reserva) 2018
리스칼은 1995년부터 재접목(re-grafting)에 대한 실험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젊은 포도에 고령의 포도 뿌리를 접목시키면 어린 포도에서도 고목의 풍미가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포도의 수확량은 그대로 유지됐다. 리스칼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이 결과에 고무된 리스칼은 2017년 180헥타르의 포도를 재접목했으며, 이는 현재까지 매우 성공적이다. 가장 클래식한 맛을 보여주는 레세르바 와인에도 15% 정도의 재접목 포도를 사용해 에이징 효과를 높였다. 리오하 와인의 시그너처인 달콤한 아메리칸 오크향에 진한 과일 바구니가 연상되는 풍족한 과일향을 보여준다. 상당히 부드러운 텍스처에 감초, 시나몬 류의 스파이시한 향과 맛도 매력적이다.
마르께스 데 리스칼 XR 레세르바(Marques de Riscal XR Reserva) 2017
보르도 와인메이커들에게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전통 하나가 있다. 와인을 양조하면서 특별히 뛰어난 와인이 담긴 배럴에 초크로 XR이라고 표시를 하고, 이 와인을 그 해 와인 품질의 기준점으로 삼는 것이다. 리스칼에서도 거의 백 년 가까이 이러한 전통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고 프랑스 출신 와인메이커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2015년부터 XR이라는 와인을 출시하게 됐다. 역시나 특별히 더욱 좋은 배럴에서 선택한 와인이 담겨 있다. 매우 정교한 향과 맛을 보여주는 와인으로 바디감이나 집중력도 나무랄 데가 없다. 아메리칸 오크를 이용한 전통적인 스타일이지만 무척 중후하고 맛있다.
마르께스 데 리스칼 바론 데 시렐 레세르바(Marques de Riscal Baron de Chirel Reserva) 2018
리스칼은 새로운 스타일의 리오하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보르도의 두 유명한 컨설턴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바로 샤토 마고의 디렉터 폴 폰탈리에(Paul Pontallier)와 보르도대학 교수 기 김베르토(Guy Guimberteau)였다. 그들의 조언을 받아 1986년부터 바론 데 시렐(Baron de Chirel)이라는 이름의 보르도 스타일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템프라니요에 카베르네 소비뇽도 함께 블렌딩했으며, 80년에서 110년 수령의 고목에서 수확한 포도만 이용한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원칙적으로는 리오하 DOCa에서 허용하지 않지만 리스칼은 1900년 초반부터 꾸준히 이 품종을 심어왔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오크 숙성도 프렌치 오크를 사용해 전통적인 리오하 와인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이 있다. 더욱 검고 묵직하며 진한 풍미와 타닌을 지닌다. 확실히 모던하고 새로운 리오하 와인의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프랭크 게리 셀렉션(Frank Gahry Selection) 2012
2001년 프랭크 게리가 새 와이너리 건설을 승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롭게 출시한 와인이다. 리스칼이 보유한 포도밭 중 가장 좋은 6헥타르 크기의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만 이용하며, 현재까지 2001, 2012, 그리고 2019년, 즉 가장 좋은 빈티지에만 출시했다. 원래 리스칼의 대부분 레드 와인은 템프라니요에 그라시아노 등을 블렌딩해 균형을 맞추지만 이 와인은 워낙 템프라니요의 품질이 좋아 오로지 이 품종만으로 생산한다. 최고의 템프라니요가 보여주는 검붉은 과실향에 약간의 허브 뉘앙스도 있어서 특별함을 더한다. 30개월 프렌치 오크 숙성을 거쳤으며 10년이 지나 은근히 숙성 뉘앙스도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 숙성 잠재력 또한 매우 뛰어나다. 생산량이 많지 않은 고가의 와인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한국에 가장 많은 양이 수입됐다. 와인병에는 프랭크 게리가 그린 스케치와 사인이 있어 소장 가치 또한 뛰어나다.
[(왼쪽부터) 소비뇽 블랑 2020, 바론 데 시렐 비나스 센테나리아스 2021, 레세르바 2018, XR 레세르바 2017, 바론 데 시렐 레세르바 2018, 프랭크 게리 셀렉션 2012]
6종의 와인을 시음하며, 다시 한번 리스칼이 추구하는 철학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스페인의 대표 와인 생산지 리오하 땅에서 165년에 이르는 스페인 와인의 전통을 지키는 맛은 여전하다. 고목만이 선사하는 매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양한 혁신도 찾아볼 수 있다. 프렌치 오크를 사용해 보다 모던한 맛을 만들기도 하고, 현대적인 스타일의 레이블을 사용하기도 한다. 품종에 따라 스크루캡도 사용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유기농 농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한다. 과거로부터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양조 기법으로 클래시컬한 와인을 만드는 것. 미래와 전통의 절묘한 조화,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마르께스 데 리스칼의 와인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일 것이다.
Copyrights © 와인21닷컴 & 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