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도 와인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먼저 포도알을 큰 대야에 넣고 손이나 발로 잘 으깬다. 걸쭉해진 포도즙과 껍질을 항아리에 넣는다. 이제 항아리 안에서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오면서 발효가 시작된다. 거품이 잔잔해지면 원하는 시점에 액체를 잘 걸러내 통에 담는다. 끝!
정말 이렇게 하면 와인을 만들 수 있다. 다만 한국 포도는 와인으로 만들기에는 당도가 약한 경우가 많아 발효 전에 설탕을 약간 넣으면 더 맛있고 더 강한 스타일의 와인이 만들어진다. 발효 시 가끔 한 번씩 저어주면 좀 더 좋은 와인이 나온다. 집에서 과실주를 담근 경험이 있는 어르신들은 이런 노하우들을 잘 알고 있다. 포도가 자라는 모든 지역에서 이런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었다. 아마도 구석기인들도 움푹 팬 돌 안에서 저절로 발효된 와인을 발견하고는 이후 직접 따라서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토기 만드는 법을 깨닫고, 와인 양조 및 보관용 토기 항아리도 만들기 시작했다. 코카서스 산맥에 위치한 조지아에서 출토된 토기 항아리 조각에서 포도 성분이 발견되었는데, 이 시기를 추적해 보면 기원전 6천 년 전, 즉 지금으로부터 8천 년 전이었다[1]. 특히 이 지역은 와인 양조용으로 적합한 포도인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조지아는 전 세계 와인의 요람으로 인정받았다.
8천 년간 조지아에서는 이렇게 와인을 만들어 왔다. 수확한 포도를 토기 항아리에 넣고 발효한 뒤 원하는 시점에 만들어진 술을 따로 담아 보관한다. 정확히 동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 토기 항아리(조지아어로는 크베브리(Kvevri)라고 부른다)의 모양 역시 8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생산된 와인이 요즘 가장 핫한 와인 중 하나로 떠올랐다. 앰버 와인 혹은 오렌지 와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전 세계 내추럴 와인바와 레스토랑에서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 이런 와인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와인숍도 곳곳에 생기고 있다. 아니, 이런 신석기 시대의 방법이 왜 아직도 인기가 좋은 것일까? 이 글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앰버 와인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궁금증에 대해서도 풀어본다. 조지아 와인과 앰버 와인에 대한 지식을 업그레이드해 보자!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그리고 앰버 와인 (조지아 와인 협회 제공)]
앰버 와인? 오렌지 와인?
앰버 와인의 정의는 간단하다. 백포도 품종을 양조할 때 껍질을 함께 넣고 발효 및 숙성한 와인이다. 껍질에 있는 성분이 더욱 많이 추출돼 색과 맛이 진한 화이트 와인이 된다. 얼마나 오래 껍질과 포도즙을 접촉하는지에 따라서 색이 다른데, 보통 호박(앰버)색, 밝은 오렌지색, 주황색에서 적갈색까지 나타날 때가 있다. 와인 강사인 토니 밀라노프스키(Tony Milanowki)의 정의가 명쾌한데 그는 와인을 색깔에 따라서 4가지로 나눴다. 와인 양조 시 적포도 껍질을 통째로 넣으면 레드 와인, 약간만 넣으면 로제 와인이 된다. 백포도 껍질을 통째로 넣으면 앰버 와인, 약간만 넣으면 화이트 와인이 만들어진다[2].
21세기까지 이러한 양조 방식의 와인을 부르는 일반적인 용어는 없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진한 색의 화이트 와인을 헷갈려 하자, 2004년 영국의 와인 수입업자 데이비드 하비(David A. Harvey)가 '오렌지 와인'이라는 단어를 처음 제안했다. 그전에는 껍질째 발효된(skin-fermented) 화이트 와인, 스킨 컨택트(skin-contact) 화이트 와인 등의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조지아에서는 이런 와인을 앰버(amber) 와인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그라브너등 유명한 생산자들도 자신의 와인을 앰버 와인이라고 소개한다.
앰버 와인은 일반 화이트 와인과 어떻게 다를까?
포도껍질에는 다양한 성분이 함유돼 있다. 특히 와인의 향기를 결정하는 화합물들이 많은데, 양조 시 포도즙과 껍질이 일주일 이상 접촉하면 이러한 다양한 향성분들이 와인에 스며들게 된다. 따라서 앰버 와인은 향부터 일반적인 화이트 와인과 다르며 훨씬 더 복잡하고 풍부하다. 포도 품종과 접촉 시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다 복합적인 과일향에 차 같은 허브의 느낌이 더해지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늦가을의 달콤한 과일 향이라고도 표현한다.
향뿐 아니라 질감도 다르다. 포도껍질에 있는 폴리페놀 성분 덕분인데, 흡사 레드 와인처럼 와인에 타닌감을 더해 보다 구조감 있는 와인이 생산된다. 이러한 폴리페놀 성분은 와인의 산화를 방지해 일반 화이트 와인보다 더욱 오래 숙성할 수 있으며, 양조 시 이산화황 등 첨가물의 양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다만 맑고 깔끔한 맛의 화이트 와인에 익숙한 소비자라면 입안에서 느껴지는 타닌감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한 탄탄한 구조감과 복합적인 맛의 매력에 빠진 소비자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완성된 크베브리 (조지아 와인 협회 제공)]
앰버 와인은 모두 항아리에서 만들까?
껍질과 함께 발효한 백포도주인 앰버 와인은 어디에서 발효하든지 상관없다. 실제로 오크, 스테인리스 스틸, 콘크리트 에그 등 다양한 발효통에서 앰버 와인이 생산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앰버 와인은 토기 항아리에서 양조돼 왔으며, 이 방법으로 더욱 복합적인 앰버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고 평가하는 생산자들이 많다.
발효용 점토 용기도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사용됐던 암포라(amphora), 스페인식 티나하(tinaja), 포르투갈식 탈랴스(talhas) 등 조금씩 다른 크기와 모양이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많은 앰버 와인 양조자들이 조지아의 크베브리를 가장 선호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프리울리(Friuli)지역을 대표하는 앰버 와인 생산자인 요슈코 그라브너(Josko Gravner)나 파올로 보도피베크(Paolo Vodopivec)도 조지아의 장인이 생산한 크베브리를 이용해 전통적인 조지아 방식으로 와인을 양조한다.
크베브리로 생산한 와인은 어떻게 다를까?
크베브리는 200리터에서 3000리터까지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진다. 대를 이어 도제식으로 기술을 전수받은 장인들이 직접 흙으로 빚어 만드는 토기이므로 모양과 크기가 전부 조금씩 다르다. 2-3개월 동안 하단부터 한 줄씩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모양을 만들고, 2-3주간 건조 후 야외 대형 나무 가마에서 일주일간 굽는다. 며칠간 식힌 후 안쪽에 구멍이 있는 부분은 밀랍을 얇게 발라 완성한다.
크베브리는 뚜껑만 밖으로 나오고 땅 안에 묻는다. 전체가 땅에 묻혀있기 때문에 온도가 올라가는 발효 시에는 자연 냉각이 되고, 계절이 바뀌어도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도 뛰어난 온도 제어 효과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달걀 형태의 크베브리는 발효 시 내부에서 대류가 생성된다. 이러한 공기의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죽은 효모(lee)를 부드럽게 자극하는데 이로 인해 와인에 풍미를 더해주고 환원취를 막을 수 있다. 또한 크베브리는 아래로 갈수록 뽀족한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발효가 끝나면 여기에 죽은 효모와 씨 등 다른 고형물들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모인다. 중력의 영향으로 포도 껍질이 이러한 고형물과 와인 사이에 위치하며 과도한 추출이나 환원적 화합물로 인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막아주고, 수개월 동안 숙성되면서 타닌과 폴리페놀 성분이 느리고 부드럽게 추출된다. 이는 와인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한다.
토기로 만든 항아리는 자연스럽게 미량의 산소(micro-oxygenation)를 주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적은 양의 산소 주입은 산화를 막으면서도, 와인의 질감을 개선하고 전반적인 품질을 높인다. 크베브리를 만드는 점토는 조지아 중부 지방에 위치한 이메레티(Imereti)산을 최고로 치는데, 가장 불순물이 적으면서도 적절한 산소 주입이 가능한 토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의 흙으로 장인들이 직접 만든 크베브리야말로 양조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어떠한 첨가물 없이도 높은 수준의 앰버 와인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크베브리는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땅 속에 묻힌 크베브리들 (조지아 와인 협회 제공)]
앰버 와인과 내추럴 와인은 어떻게 다를까?
사실 아직까지도 내추럴 와인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당연히 규제나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농사를 지을 때는 화학물질을 쓰지 않고, 와인을 만들 때도 가능한 인위적인 처리를 하지 않아야 한다. 와인을 필터링하지 않고 바로 병에 담아야 한다' 등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철학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몇 가지 철학에도 이견이 존재한다.
앰버 와인의 경우 와인 양조 시 스킨을 오랜 시간 접촉하는 화이트 와인 양조 기법을 사용한다. 물론 이런 기법으로 와인을 양조하는 사람들은 전통을 중시하고 인위적인 처리에 대한 반감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가 내추럴 와인 생산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조지아의 전통적인 포도 재배 및 양조 문화도 내추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와이너리들은 일반적인(관습적인) 양조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스킨 컨택트 방식으로 앰버 와인을 생산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대로 크베브리나 토기를 사용하지 않고 앰버 와인을 생산하는 양조자들도 있다. 기술적으로 이러한 와인 모두 앰버 와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를 진정한 앰버 와인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소비자 개인이 결정할 문제다.
앰버 와인의 맛이 다 똑같다고?
이는 '클래식 음악은 다 똑같던데?'와 비슷한 말이다. 조지아뿐 아니라 이미 전 세계에는 수천 명의 앰버 와인 생산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각기 다른 앰버 와인을 만든다. 일단 품종이 다르다. 조지아에서는 주로 르카치텔리(Rkatsiteli), 므츠바네(Mtsvane), 촐리코우리(Tsolikouri) 등 토착 품종으로 만드는데, 이들은 전부 다른 향과 맛을 낸다. 이탈리아/슬로베니아[3]에서는 리볼라 지알라(Ribolla Gialla) 품종을 주로 이용하는데, 몇몇 유명 생산자의 와인은 인기가 워낙 좋아 구하기 힘들다. 앰버 와인의 양조 방식은 포도의 고유한 아로마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뮈스카나 게부르츠트라미너 같은 아로마틱한 품종으로 만든 앰버 와인은 매우 개성이 강하다. 일반 와인에 비해 앰버 와인을 접할 기회가 적어서 아직 이처럼 다양한 앰버 와인들을 만나보지 못했을 뿐이다.
또한 앰버 와인은 스킨 컨택트 시간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스타일로 만들 수 있다. 이는 로제 와인이 적포도 껍질에 얼마나 접촉했는가에 따라 다양한 색과 풍미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껍질 접촉을 약하게 한 앰버 와인은 색도 연하고 훨씬 산뜻하다. 아마도 마시기 전까지는 화이트 와인과 구분하기 힘들 수도 있다. 2-3주간 껍질 접촉을 거치면 부드러운 질감을 지닌 미디엄 바디의 앰버 와인이 탄생한다. 앰버 와인다운 풍부한 향과 맛을 선사하지만 숙성 없이 마셔도 한결 마시기 편하다. 그보다 더 오래 숙성시키면 훨씬 더 풍부하면서도 강렬한 풀바디 앰버 와인이 만들어진다. 숙성이 좀 필요하긴 하지만, 구조적인 면에서 레드 와인과 큰 차이가 없으며 앰버 와인 고유의 풍미가 강렬하게 전달된다. 클래식 음악도 계속 듣다 보면 시대와 작곡가에 따라서 차이가 확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앰버 와인도 조금 더 탐구하다 보면 매우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앰버 와인은 어떤 음식과 잘 어울릴까?
앰버 와인은 백포도에서 나오는 과일 향과 활기찬 산미에 레드 와인 같은 질감과 구조를 지니고 있다.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의 특징이 모두 있으니 기본적으로 다양한 음식과 함께 즐길 수 있다. 서양식 코스 요리에 단 한 병의 와인을 매칭할 경우 화이트나 레드 와인보다 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으며, 실제로 여러 힙한 레스토랑에서 이를 시도하고 있다. 한식처럼 다양한 맛의 음식이 한 번에 나오는 식문화에도 역시나 잘 어울린다.
조지아에서는 몇 시간 동안 혹은 하루종일 와인과 음식을 즐기는 수프라(supra)라는 문화가 있다. 전통적으로 조지아인들은 자신의 집에 있는 크베브리에서 꺼내온 앰버 와인과 함께 끊임없이 나오는 다양한 음식을 즐긴다. 즉, 앰버 와인은 여러 음식과 어울리도록 발전해 온 술이다. 앞으로 이어질 와인21의 [조지아 와인 스페셜] 연재에서는 음식과 함께 즐기는 조지아 와인에 대해 더욱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크베브리 (조지아 와인 협회 제공)]
조지아에서는 크베브리에 포도와 함께 넣는 씨, 껍질, 줄기 등을 언급할 때 무척 인상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이러한 고형물을 어머니(the mother)라고 부른다. 이 '어머니'는 크베브리 안에서 와인이 변질되지 않도록 오랜 시간 보호해 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크베브리 바닥에 가라앉아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실제로 크베브리는 어머니의 자궁을 닮아 있다. 조지아에는 아기가 태어나면 갓 만든 와인을 크베브리에 채워서 그 아이가 결혼하는 날까지 그대로 두는 의식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 죽었을 때 크베브리를 반으로 잘라 그 안에 시신을 넣고 땅에 묻는 일도 흔했다. 크베브리는 조지아 문화에서 와인 양조용 토기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크베브리에 포도즙과 함께 넣은 껍질과 씨, 즉 '어머니'는 수개월간 포도즙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점차 자신의 모습을 하얀 포도즙에 덧입힌다. 포도즙은 점차 호박색으로 변하며 더욱 풍부한 향과 맛이 더해진다. 인간이 성장하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머니를 닮아가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렇게 앰버 와인은 크베브리 안에서 더욱 풍부한 풍미를 지닌 와인으로 성장한다. 아름다운 금빛 호박색을 빛내면서.
[1] Patrick McGovern, et al., Early Neolithic wine of Georgia in the South Caucasus.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Vol. 114, No. 48, 2017
[2] 정확히 말하자면, 일반 화이트 와인은 발효 시 껍질을 제거하지만 발효 전 저온침용(cold-soak) 등으로 껍질에 있는 방향족 화합물만 추출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3] 북동부 이탈리아와 서부 슬로베니아는 조지아 다음으로 꼽는 앰버 와인 생산지다. 2차대전 이후 생긴 국경으로 인해 다른 국가로 나뉘어졌지만 사실상 같은 문화권이다. 이 아드리아해 인근 지역 역시 앰버 와인에 대한 오랜 전통이 있으며 21세기에 들어 새로운 부흥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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