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패닉은 '왼손잡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라는 가사는 당시 젊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마니아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10% 정도의 사람이 왼손잡이지만 그들은 소수자다. 오랫동안 차별 받았고 여전히 교정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일단 용어부터가 그렇다. 오른손은 '옳은 손'이라는 뜻이며, 왼손의 '왼'은 '그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완화되긴 했지만 우리 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밥상머리에서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면 혼이 나곤 했다.

[왼손잡이 와이너리 몰리두커 (출처: 몰리두커)]
와인 컨설턴트 사라(Sarah)와 스파키 마르키스(Sparky Marquis)는 1999년 '올해의 호주 와인메이커'로 선정되는 등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받았다.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고 싶었던 그들은 와이너리의 이름을 고민하던 중 주변에 왼손잡이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호주 사투리로 왼손잡이라는 뜻의 '몰리두커(Mollydooker)'를 와이너리의 이름으로 결정하고 2005년 첫 빈티지 와인을 출시했다.
“당시 와이너리에서 일하던 11명의 직원 중 무려 7명이 왼손잡이였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왼손잡이죠. 제 동생도 왼손잡이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집에서는 저만 오른손잡이네요.”
사라와 스파키의 아들, 루크 마르키스(Luke Marquis)의 말이다. 지난 9월 4일, 몰리두커의 국내 수입사 CSR과 명동 마이클 바이 해비치(Michael's by Haevichi)가 함께 진행한 몰리두커 행사에 참석한 그는 모든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와인을 설명하고 얘기 나누기를 즐겼다. 취재를 위해 일부러 그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행사 마지막 무렵에서야 자리로 온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의 별명은 '블루 아이드 보이(The Blue Eyed Boy)'. 몰리두커의 대표적인 와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레이블에는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볼 수 있다.

[몰리두커의 블루 아이드 보이]
“제가 10살 정도였을 거예요. 이 사진을 찍고 17년이 흘렀네요. 이때는 이 와인이 얼마나 좋은 와인이었는지 잘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히 할 수 있죠. 이 와인은 저에게 종교와 같은(religious) 와인이에요.”
몰리두커는 이름만 왼손잡이가 아니다. 그들의 와인 양조 철학은 그들의 이름과 레이블 디자인만큼이나 독특하다. 루크는 몰리두커만의 독특한 점을 크게 3가지로 설명했다.
1. 몰리두커 쉐이크(Mollydooker Shake)
일반적으로 와인의 산화를 막고 보존력을 높이기 위해 대다수 와이너리들이 이산화황을 첨가한다. 하지만 몰리두커는 이산화황 대신 질소 기체를 넣는다. 질소는 사실 공기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매우 흔한 기체다. 하지만 다른 원소와 거의 반응하지 않아 안전하고 인체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으며, 와인을 오랫동안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단점이 한 가지 있는데, 와인을 오픈하면 질소 때문에 향과 맛이 눌려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와인을 흔들면 된다! 먼저 글라스에 와인을 약간 따른 후, 마개를 닫고 신나게 흔든다. 그러면 와인 안에 잠자고 있던 질소 기체가 뽀글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흔드는 과정을 한 번 더 해도 좋다. 쉐이크가 끝난 후 잠에서 깬 와인을 처음에 따랐던 와인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실제로 이 두 와인의 차이는 확연하다. 쉐이크를 하면 확실히 향이 많이 피어오르며 텍스처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2. 푸르트 웨이트(Fruit Weight)
사라가 제안한 개념으로 포도의 품질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포도알을 입에 넣었을 때 산도와 당도/풍미가 얼마나 균형을 이루는지, 그리고 그 강도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를 혀로 직접 측정한다. 이를 위해 포도가 자라는 동안 지속적으로 포도알을 직접 테이스팅하며 가장 적절한 수확 시기를 결정한다. 그리고 푸르트 웨이트의 강도에 따라 다른 와인을 만든다. 예를 들어 몰리두커의 가장 대표적인 와인인 벨벳 글루브는 95% 이상의 푸르트 웨이트 포도로 만들며, 러브 시리즈는 85-95%의 푸르트 웨이트 포도로 만든다.
보통은 산도와 당도를 측정하는 기구가 있는데 직접 입으로 측정하는 방식은 이례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와인에서 느껴지는 밸런스와 강도 등은 마시는 사람의 감각에 의해서 판단되며, 이를 가장 잘 측정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사람의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것이다. '올해의 호주 와인메이커' 출신 사라의 감각으로 생산하는 몰리두커 와인이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며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10대 와인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특별함 때문인 듯하다.
3. 워터링 프로그램(Watering Program)
또 하나의 선입견을 깨는 것은 포도 재배 방식이다. 보통 와인용 포도나무는 수분 결핍이 있어야 더욱 질 좋은 포도를 생산한다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몰리두커에서는 포도나무에 물을 충분히 주되, 매우 철저하게 계산된 방식으로 공급한다. 봄철 포도나무가 성장할 때와 수확이 끝났을 때쯤 물을 매우 풍족하게 주는데, 하루에 8시간 동안 물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포도가 달리기 시작할 때는 수분 공급을 중단해 포도나무 스스로 에너지를 저장하게 하고 이후 포도가 익을 때쯤 다시 물을 넉넉하게 준다.
맥라렌 베일(McLaren Vale)은 매우 뜨거운 지역이기 때문에 물을 다른 지역보다 많이 줄 필요는 있다. 하지만 포도의 생육기간에 따라 이렇게 세심하게 급수를 조정하는 것은 상당히 과학적이다. 사라는 몰리두커를 설립하기 10년 전인 1994년부터 워터링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행해 오고 있다. 오랜 기간 보완하고 완성한 워터링 프로그램은 와인의 색과 풍미를 개선하고, 프루트 웨이트도 최상으로 이끌어내는 중요한 재배 방식이다.

[루크와 함께한 몰리두커의 와인 5종]
이번 행사에서는 5종의 와인을 선보였다. 여러 종류의 프루트 웨이트를 지닌 쉬라즈 100% 와인이라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다. 사실 음식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도전적인 와인 구성이기도 하다. 마이클 바이 해비치는 많은 고민 끝에 쉽지 않은 페어링을 훌륭하게 선보였고, 와인과 함께 음식도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미스 몰리(Miss Molly) 2021
스파클링 쉬라즈로 사라가 춤추러 갔을 때의 모습을 레이블에 담았다. 몰리두커의 대표 와인인 복서(Boxer)를 2차 발효해 만들었으며, 미스 몰리는 복서의 여자 친구 이름이기도 하다. 거품도 상당히 섬세하고 상쾌하다. 쉬라즈의 진한 풍미는 그대로 살아있지만 마시기에 매우 편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와인이다. 스파클링 쉬라즈는 흰 살 생선부터 고기 요리까지 다양한 음식과 매칭이 가능하다.
더 복서(The Boxer) 2021
몰리두커에서 가장 유명하고 생산량도 많은 와인이다. 권투선수를 그린 레이블은 멀리서 보더라도 한눈에 몰리두커의 와인임을 알아볼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권투선수가 양손 모두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끼고 있다는 점이다. 잘 익은 블랙커런트, 플럼, 감초 향이 가득한 파워풀한 와인이며, 아메리칸 오크의 스윗함도 함께 지니고 있다. 2021년 복서는 프루트 웨이트가 68%인데, 이 정도만 되더라도 매우 잘 익은 맛과 풍미를 보여준다.
블루 아이드 보이(Blue Eyed Boy) 2021
루크의 그 와인이다. 포도를 밟고 있던 이 꼬마는 현재 몰리두커의 글로벌 세일즈 팀을 이끌고 있다. 2021년산은 프루트 웨이트가 79%인데, 이 차이가 풍미에서 그대로 드러나며 과실의 향과 맛의 강도가 한결 진하다. 바닐라, 커피 등의 뉘앙스가 부드럽게 이어지며 바디감이 더욱 두텁고 피니시도 더 길다.
카니발 오브 러브(Carnival of Love) 2021
몰리두커의 와인 중 가장 상을 많이 받은 와인이다. 2007년 <와인 스펙테이터> 10대 와인 중 8위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2012년에는 2위를 기록했다. 호주 최고의 와인 순위에서도 단골로 손꼽히는 와인이다. 프루트 웨이트는 88%을 기록했다. 이 와인은 스케일이 다르다. 산도와 풍미가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숙성 잠재력도 상당하다. 물론 과실향도 좋지만 호주 쉬라즈 특유의 허브 느낌이 한층 포인트를 더한다. 스파이시하지만 입안에서는 실키하게 흐른다.
벨벳 글로브(Velvet Glove) 2021
몰리두커의 플래그십 와인이다. 벨벳 천 주머니에 담겨 있고, 레이블도 벨벳이다. 병 디자인은 사라가 직접 했는데 2010년, 와인병뿐 아니라 모든 패키지 디자인을 망리하는 호주 패키지 대회에서 전체 1위를 차지했다. 프루트 웨이트는 95%. 가장 높은 실키함과 풍성함을 보여주며 이전 와인들보다 유칼립투스와 타임 등 허브향이 훨씬 다채롭다. 호주 플래그십 와인들은 어릴 때 마시기에는 너무 진한 경우가 있는데, 벨벳 글로브는 지금 마셔도 매력이 철철 넘치고 상당히 편하게 마실 수 있다. 그러면서 최고급 쉬라즈의 온갖 미덕을 다 담고 있다. 푸르트 웨이트라는 기준은 단지 맛의 강도를 측정하는 것만이 아닌 좋은 포도를 선정하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블루 아이드 보이, 루크 마르키스]
왼손잡이는 사실 스포츠계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특히 복싱 같은 격투기나 탁구 등의 라켓을 이용하는 스포츠에서는 유리한 점이 많다. 야구에서는 공이 빠른 파이어볼러 좌완투수라면 지옥에서라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왼손잡이 와이너리 몰리두커는 자신만의 와인 양조 철학으로 참 맛있는, 그리고 참 인상적인 와인을 만든다. 확실히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얘기할 때 다른 손을 드는 와이너리다. 그들의 와인에서 느껴지는 다름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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