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스토리

토스카나의 우아한 명품, 일 보로(Il Borro)

2023년 9월 10일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대표가 토스카나의 명품 와인 일 보로(Il Borro)를 홍보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페라가모가 왜 와인을 홍보할까? 취재하기 전 미리 들어가 본 일 보로의 웹페이지에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일 보로는 페라가모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와이너리다. 그리고 방한한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페라가모 설립자의 손자로 일 보로의 총 책임자였다. 솔직히 패션 브랜드에서 만드는 와인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진 않았다. 명품의 들러리 역할을 하는 와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기자의 잘못된 선입견이었음을 미리 고백한다. 일 보로 와인을 시음한 뒤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 보로 와인을 소개하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대표]


수입사인 에노테카코리아의 압구정점 매장에 들어선 페라가모 대표는 무척 수수한 차림새였다. 얼핏 봐서는 한국에 출장 온 평범한 외국인처럼 보일 뿐이었다. 시음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악수를 청하며 그는 직접 일 보로의 역사와 와인 하나하나에 대해 설명했다. 와인메이커라고 소개하더라도 깜빡 속을 정도로 전문 지식이 상당했다. 와인에 대한 깊은 열정이 마음에 와닿았다.


일 보로의 역사와 현황

토스카나 출신인 페라가모 가족에게 일 보로가 위치한 발다르노(Valdarno) 계곡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피렌체에서 남동쪽으로 약 한 시간 거리인 이곳으로 가족들은 가끔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러다 일 보로 마을이 눈에 들어온 것은 1985년. 언덕 위에 자리한 마을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지만 1000년의 역사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고 모든 환경이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이곳은 이탈리아 왕가 출신인 사보이아 아오스타(Savoia Aosta) 가문의 소유였다. 1993년 일 보로를 매입한 페라가모 가족은 중세 마을을 복원했고 포도밭을 일궜으며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그 사업에 앞장선 사람이 가족 중 누구보다 와인에 진심이었던 살바토레 페라가모 대표였다.


[토스카나 발다르노에 위치한 일 보로 마을 (사진 출처: ilborro.it)]


현재 일 보로 마을에는 와이너리도 호텔과 농장을 운영 중이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아름다운 호텔은 토스카나의 정취를 맘껏 느낄 수 있도록 우아하게 단장했고, 유기농 농장에서는 페라가모 가족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모든 식재료를 재배하고 있다. 물론 포도밭도 유기농으로 경작한다. 2015년 유기농 인증을 받은 일 보로의 포도밭에는 산지오베제, 샤르도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시라 등 다양한 품종이 건강한 자연에서 익어간다. 포도밭의 면적은 겨우 70헥타르. 전체 와인 생산량도 연간 20만 병 남짓이다. 일 보로 전체 면적이 1000헥타르나 되는데 왜 이렇게 와인 생산량이 적은 걸까? 나머지 땅은 모두 숲이기 때문이다. 숲이 가져다 주는 생물의 다양성(biodiversity)이야말로 건강하고 맛있는 와인에 필수 요소다. 그럼 이렇게 완벽한 환경에서 생산되는 일 보로 와인은 과연 어떤 맛일까? 시음한 일곱 가지 와인을 하나씩 소개한다.


[보로로사 로제와 레멜레 화이트]


보로로사(Borrorosa)

산지오베제 100%로 만든 로제 와인이다. 포도를 으깬 뒤 껍질을 한 시간만 침용시켜 연한 연어색을 얻었다. 섬세한 향을 지키기 위해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저온 발효했고 약 4개월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숙성을 거쳤다. 맛을 보면 로제 치고는 묵직한 바디감과 부드러운 질감이 매력적이다. 딸기와 라즈베리 등 풍부한 과일향이 입안을 과즙으로 듬뿍 채우는 느낌이다. 여운에서 달콤한 과일향이 길게 이어지며 마지막은 매콤한 향신료 풍미가 장식한다. 가벼운 스타일보다는 살집이 있는 로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맞는 와인이다.


레멜레(Lemelle)

레멜레는 레이블에 그려진 조개의 빗살 무늬를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샤르도네 100%로 만들었고 위에서 소개한 로제와 마찬가지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를 거친 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4개월간 숙성했다. 오크 풍미가 전혀 없기 때문에 샤르도네 본연의 매력이 한껏 살아 있는 스타일이다. 붉은 사과, 배, 레몬, 흰 복숭아 등 잘 익은 과일향이 풍부하고 향긋한 꽃 향과 짭짤한 미네랄리티가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블라인드로 시음했다면 샤블리 그랑 크뤼로 착각할 만한 와인이다.


[폴리쎄나와 페트루나]


페트루나(Petruna)

페트루나와 폴리쎄나는 둘 다 산지오베제 100%로 만든 레드 와인이다. 둘의 차이라면 페트루나는 암포라에서, 폴리쎄나는 오크에서 발효하고 숙성했다는 점이다. 11개월간 암포라에서 숙성된 페트루나는 병입 후 다시 12개월간 병숙성을 거쳐 출시됐다. 영롱한 루비빛이 매혹적이고 풍미에는 잘 익은 체리와 자두 등 붉은 과일 향이 가득하다. 거기에 약간의 흙내음이 복합미를 더한다. 풍부한 과즙, 중간 바디감, 매끈한 타닌의 밸런스도 탁월하다. 콘크리트와 달리 암포라는 미세하게 공기가 통해 타닌을 부드럽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산지오베제의 순수한 매력이 돋보이는 와인이다.


폴리쎄나(Polissena)

페트루나가 여성적이라면 폴리쎄나는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와인이다. 18개월간 바리크(1/3 새 오크) 숙성을 거쳤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풍미가 느껴진다. 바리크 숙성이 끝난 뒤에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추가로 6개월간 마무리 숙성을 거쳤다. 맛을 보면 페트루나와 달리 폴리쎄나에서는 검게 익은 자두와 블랙 체리 등 검은 과일 향이 느껴진다. 바디감도 더 묵직하고 밀가루처럼 촘촘한 타닌이 입안을 기분 좋게 조여준다. 산지오베제의 힘과 우아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와인이다.


[보리지아노, 피안 디 노바, 일 보로]


보리지아노(Borrigiano)

보지리아노는 '일 보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 산지오베제에 시라와 메를로가 블렌드된 와인이다. 2019년산까지는 페트루나, 폴리쎄나와 함께 2011년 토스카나에 새로 생긴 DOC인 발다르노 디 소프라 DOC(Valdarno di Sopra DOC)로 출시했으나 2020년산부터는 토스카나 IGT(Toscana IGT)로 출시하는 와인이다. 커다란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친 이 와인은 루비빛이 선명하고 잘 익은 과일향과 함께 향신료 향이 그윽하다. 바디감이 무겁지 않고 타닌이 매끈하며 산도가 높지 않아 부드러운 스타일이다. 페라가모 대표가 불고기와 가장 잘 어울릴 것으로 추천한 와인이기도 하다.


피안 디 노바(Pian di Nova)

시라 75%와 산지오베제 25%를 블렌드한 와인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한 뒤 중고 바리크에서 1년간 숙성시키고 다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6개월간 마무리 숙성을 거친 와인이다. 영롱한 루비빛에서 밝고 풍부한 붉은 과일향이 가득 피어나고 향신료 향이 입맛을 돋운다. 바디감이 묵직하고 질감이 벨벳처럼 부드러워 따뜻하고 둥근 느낌이다. 피자와 파스타는 물론 매콤한 양념이 가미된 우리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와인이다. 레드 와인 팬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스타일이다.


일 보로(Il Borro)

일 보로의 아이콘급 와인이다. 일 보로는 원래 '시냇물'이라는 뜻이지만 지금은 와이너리와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 메를로 50%, 카베르네 소비뇽 35%, 시라 15%가 블렌드 된 이 와인은 우리가 떠올리는 수퍼 투스칸의 모범적인 요소를 모두 갖췄다. 메를로는 2000리터의 큰 오크통에서, 카베르네 소비뇽과 시라는 중고 바리크에서 18개월간 숙성한 뒤 모두 블렌드해 6개월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추가 숙성을 거쳤다. 묵직한 바디감에 진한 검은 과일 향이 산뜻한 산미와 완벽한 밸런스를 이루고, 삼나무, 훈연, 담배 등 복합미가 와인에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며 열기에 부족함이 없는 명품 와인이다.


와인을 모두 시음한 뒤 페라가모 대표와 잠시 이런저런 여담을 나눴다. 가장 궁금했던 점은 왜 와인에서 페라가모 브랜드가 전혀 보이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페라가모 대표에 따르면 패션 브랜드 외에도 페라가모는 부동산, 유통, 호텔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으며 와인도 그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패션 브랜드에만 페라가모를 쓰기로 합의했다는 것. 페라가모라는 이름을 남용할 필요도 없고 각 사업마다 페라가모의 브랜드 파워에 기대기보다 각자의 경쟁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일 보로 와인도 좋은 품질로 소비자의 인정을 받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표명했다. 와인들을 맛보고 나니 기자도 일 보로에 굳이 페라가모라는 브랜드가 필요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일 보로의 와인들은 토스카나의 명품 와인으로서 밝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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