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한 달, 업계마다 2023년을 정리하는 콘텐츠가 쏟아졌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굵직한 뉴스를 짚어보고 키워드를 뽑아 순위를 매기기도 하며 결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함이죠. 우리는 앞으로 새롭게 채워나가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 해를 갈무리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일들과 오래 기억해야 할 이름들도 있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2023년의 마지막 주말, 새해를 준비하는 이즈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존재는 누구인지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대단한 세계를 구축했던 여러 인물들이 떠나갔고, 와인 분야에서도 한 획을 그었던 거장들이 세상과 이별한 한 해였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반세기가 넘는 와인 인생 동안 많은 업적을 남긴 두 사람이 우리를 떠났습니다.
지난 달 세상을 떠난 미켈레 끼아를로(Michele Chiarlo)는 피에몬테 지역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꼽힙니다. 1956년 자신의 이름으로 와이너리를 설립한 뒤 진취적인 행보로 일군 유산은 이제 그의 가족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부고가 들려왔을 때 저는 십수 년 전 참석했던 시음회를 떠올렸습니다. 당시 수입사에서 진행한 미켈레 키아를로의 시음회는 단 1분만에 신청이 마감됐을 정도로 인기가 뜨거웠습니다. 그 시절 와인애호가들에게 소중하고 즐거웠던 경험으로 남았던 미켈레 끼아를로의 바르베라 다스티,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모스카토 다스티 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친숙하게 즐기는 와인들입니다.
12월 중순에는 그르기치 힐스(Grgich Hills)의 설립자 마이크 그르기치(Mike Grgich)가 10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1950년대 크로아티아를 떠나 미국에 정착한 뒤 유명 와이너리들을 거치며 미국 와인의 역사적 순간을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1976년 '파리의 심판' 테이스팅에서 그가 생산한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 1973 빈티지가 1위를 차지한 일은 유명합니다. 크로아티아에서부터 오래 와인을 생산해온 가족의 역사는 미국에서 2세대와 3세대로 이어지는 중입니다. 저는 몇 년 전 취재차 참석한 자리에서 한국을 찾은 그의 조카, 이보 제라마즈(Ivo Jeramaz) 부사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와인은 곧 우리의 삶”이라고 했던 그의 말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 삶 또한 마이크 그르기치가 남긴 위대한 유산이겠죠.
연초에 별세 소식을 전했던 헤스(Hess) 와이너리의 도널드 헤스(Donald Hess)는 와인과 아트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열정으로 유명 아티스트들과 예술적 협업을 선보인 인물입니다. 그는 와인뿐 아니라 훌륭한 아트 컬렉션도 남겼습니다. 1968년부터 2004년까지 샤토 디켐(Chateau d'Yquem)을 운영했던 알렉상드르 뤼르 살뤼스(Alexandre de Lur Saluces), 알자스의 트림바크(Trimbach)를 이끌었던 위베르 트림바크(Hubert Trimbach) 역시 올해 우리와 작별한 이들입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상실감에 젖어 있을 땐 그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주어진 삶을 살다 보면 떠난 이들을 떠올리는 횟수도, 시간도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억이 희미해진 걸 느끼곤 하죠. 우리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은 볼 수 없고 소통할 수도 없으니, 그만큼 더 많이 생각하지 않으면 잊혀지기도 쉽습니다. 이제 곧 새해가 시작되고 우리의 삶은 계속되며, 와인 라이프도 이어집니다.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더라도, 떠난 이들이 세상에 남긴 소중한 자산과 기억은 마음에 오래 간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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