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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초 곤디에서 빈산토의 매력에 푹 빠지다

안테프리메 토스카나(Anteprime Toscana) 2024의 열기가 한창이던 지난 2월 중순. 피렌체 시내 중심에 위치한 팔라초 곤디(Pazzo Gondi)에서 개최한 빈산토 디너에 초청을 받았다. 토스카나의 유서 깊은 가문인 곤디는 마르케시 곤디-테누타 보시(Marchesi Gondi-Tenuta Bossi) 와이너리를 운영하며 키안티 루피나(Chianti Rufina) 와인과 빈산토 카디날 데 레츠(Cardinal de Retz)를 생산하고 있다. 피렌체에 모인 전 세계 저널리스트 가운데 30명만 초대한 자리에 와인21이 초청을 받은 터라 나름 어깨가 으쓱했다. 비토 몰리타(Vito Mollica) 셰프의 토스카나 스타일 요리와 카디날 데 레츠 빈산토를 이탈리아 최초의 MW(Master of Wine)인 가브리엘레 고렐리(Gabrielle Gorelli)의 설명과 함께 맛볼 수 있었던 이 행사에는 마르케시 곤디와 팔라초 곤디의 소유주인 베르나르도 곤디(Bernardo Gondi) 후작과 그의 두 아들 제라르도(Gerardo)와 라포(Lapo)도 함께했다.


[(왼쪽부터) 고렐리 MW, 라포, 제라르도, 베르나르도 곤디 후작]


한껏 들뜬 기분과 함께 우려의 마음이 살짝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달디 단 빈산토를 디너의 전 과정에 페어링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걸까? 단맛 때문에 오히려 입맛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그런데 우려가 무색하게도 1988년부터 2006년 사이에 생산된 7개 빈티지는 한결 같이 요리와 환상의 궁합을 이루었고, 숙성된 빈산토의 깊은 맛과 빈티지마다 남다른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빈산토를 포함한 스위트 와인이 폭넓은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아무쪼록 이 기사를 통해 빈산토의 무한한 매력이 독자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란다.


본격적으로 빈산토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마르케시 곤디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자. 곤디는 피렌체에서 8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문이다. 금과 실크 같은 직물을 유통하고 금융업을 하던 곤디는 한때 메디치 가문과 사업 파트너로 일할 정도로 피렌체의 실세였다. 디너가 열린 팔라초 곤디도 시뇨리아 광장 바로 옆에 위치하며 1489년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각종 행사와 프라이빗 레지던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유명 인사가 머물다 간 곳이기도 하다. 지하에는 와인 셀러와 숍을 운영하고 있으므로 피렌체에 간다면 꼭 한 번 들러보기 바란다.


[팔라초 곤디의 아름다운 내부 모습]


현재 곤디 가문은 와인과 올리브 오일도 생산하고 있다. 키안티 루피나 지역의 315헥타르 부지에서 포도밭 20헥타르와 올리브 나무 30헥타르를 경작하고 있으며 테누타 보시(Tenuta Bossi)라는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가문의 긴 역사만큼이나 마르케시 곤디가 만든 와인의 전통 또한 남다르다.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가 남긴 '미셸 드 몽테뉴의 이탈리아 여행기(DuVoyage de Michel de Montaigne en Italie)'를 보면 곤디 가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580년 그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팔라초 곤디에서 머물면서 빈산토를 맛봤는데 그 기억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하자 리옹에 살던 곤디 집안 사람이 그에게 와인을 보내줬다는 것이다.

마르케시 곤디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트레비아노(Trebbiano)로 빈산토를 만든다. 포도는 10월 초순에 수확해 테누타 보시의 다락에서 약 3개월간 건조된다. 잘 마른 포도는 부드럽게 착즙한 뒤 각기 다른 크기의 오크 배럴에서 발효된다. 이후 10~12년간 숙성을 거치는데 이때 사용되는 배럴의 크기가 50~100리터로 작고 다양하며 숙성이 끝나면 병입해 1년간 추가 숙성시켜 출시된다. 참고로 마르케시 곤디의 빈산토에 붙은 '카디날 데 레츠(Cardinal de Retz, 레츠 추기경)'라는 이름은 곤디 가문의 선조로 프랑스에서 추기경까지 오른 레츠 추기경을 의미한다.


그럼 이제 팔라초 곤디에 도착해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페어링해 맛본 카디날 데 레츠의 테이스팅 노트를 순서대로 살펴보자. 와인이 바뀔 때마다 고렐리 MW가 빈티지별 특성을 잘 설명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비아노 100%로 만든 빈산토가 빈티지마다 이토록 확연히 다른 맛과 향을 보여준다는 점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 카디날 데 레츠 2002: 도착하자 처음 받아든 빈산토다. 팔라초 곤디의 옥상과 테라스에서 피렌체의 야경을 감상하며 푸아 그라와 미니 크로켓 등 총 7종의 핑거 푸드와 함께 즐겼는데 마른 과일의 달콤함과 경쾌한 산미의 조화가 완벽했다. 2002년이 서늘한 빈티지여서 와인의 산미가 강렬했기 때문인지 스위트 와인임에도 불구하고 입맛을 돋우는 에피타이저 드링크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카디날 데 레츠 빈산토 1997]


카디날 데 레츠 1997: 디너의 첫번째 코스인 사냥 고기와 푸아 그라 크림에 곁들여 서빙됐다. 1997년은 봄의 서리 피해가 커서 수확량이 적었지만 여름이 덥고 건조해 포도의 풍미 집중도가 탁월했다. 그래서인지 말린 살구의 달콤한 아로마가 풍부했고 묵직하고 매끈한 질감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살짝 느껴지는 훈연 향이 사냥 고기 특유의 육향과 오묘한 조화를 이뤘다.


  • 카디날 데 레츠 1999: 고렐리 MW에 따르면1999년도 무척 더운 해였다고 한다. 그래서 포도를 조기 수확해서 만들었고 덕분에 1999빈티지는 1997보다 시트러스 향이 더 많아 빈산토가 한결 신선한 풍미를 자랑했다. 페어링된 리조토에서도 시트러스 향이 나서 가히 완벽한 궁합을 맛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카디날 데 레츠 1988: 7종의 빈산토 중 가장 오래된 빈티지다. 놀랍게도 7종 중 맛이 가장 드라이했는데 한 모금 마시자마자 입안에서 커피 향이 폭발했고 이어서 샌달우드, 말린 대추, 말린 과일 향이 연이어 피어올랐다. 36년이나 지난 빈티지가 어쩜 이렇게 매력적인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함께 즐긴 메추리 고기의 약간 텁텁한 듯한 풍미를 빈산토의 상큼한 산미가 깔끔하게 씻어주는 듯했다.


[라포 곤디가 카디날 데 레츠 빈산토 1988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카디날 데 레츠 2006: 7종의 빈산토 중 가장 어리고 당도가 가장 높은 빈티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빈티지여서 와인의 풍미 또한 농밀했다. 곶감, 대추, 캐러멜, 호두 등을 꿀과 함께 버무려 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스틸턴, 로크포르, 블루 치즈와 함께 시음했는데 어느 치즈와 더 잘 어울리는지 고르기가 난감할 정도로 궁합이 두루 잘 맞았다.

  • 카디날 데 레츠 2000: 아몬드와 민트 향이 느껴지는 아이스크림과 함께 맛본 빈티지다. 복숭아와 살구 같은 과일향과 함께 감초와 위스키 터치가 매력적이었다. 살짝 느껴지는 매캐한 훈연 향이 아이스크림과 맛깔스런 조화를 이뤘다.

  • 카디날 데 레츠 2001: 디너의 마지막을 장식한 빈티지다. 무화과와 살구 등 마른 과일향의 달콤함과 함께 크리미한 질감이 식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초콜릿과 더없이 잘 어울렸고 경쾌한 산미가 입안을 깔끔하게 마무리해주었다.

기자는 이 날 저녁 3시간이 넘도록 빈산토만 마셨지만 돌이켜 보니 일반 와인 디너보다 오히려 더 많은 와인을 마시고 말았다. 빈산토가 어떻게 이토록 입맛을 사로잡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지 예전에 미처 몰랐던 경험이었다. 카디날 데 레츠는 연간 생산량이 1,500병에 불과하고 아직 우리나라에 미수입이다. 수입된다면 아마도 기자가 가장 먼저 사러 가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쪼록 그날이 빨리 오길 빌어본다.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과 함께 즐기면 맛이 환상적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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