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과 평론가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아르헨티나 와이너리, 엘 에네미고(El Enemigo). 엔트리급부터 아이콘급 와인에 이르기까지, 평론가들로부터 받은 점수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한 해만 반짝 그런 것이 아니다. 특정 평론가에게만 높은 점수를 받는 것도 아니다. 매년 다양한 와인 평론가와 와인 매체로부터 꾸준히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한국을 찾은 엘 에네미고의 하우스 소믈리에이자 브랜드 앰배서더 요아킨 디아즈(Joaquín Díaz)를 한남동의 레스토랑 오만지아에서 만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 엘 에네미고의 프리미엄 와인 그랑 에네미고의 2017년 & 2020년 빈티지 평가 점수 ]
엘 에네미고는 자타공인 아르헨티나 최고의 와이너리 카테나 자파타의 소유주 니콜라스 카테나(Nicolás Catena Zapata)의 막내딸 아드리안나 카테나(Adrianna Catena)와 카테나 자파타의 수석 와인메이커 알레한드로 비힐(Alejandro Vigil)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와이너리다. 카테나 자파타와 DNA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물려받은 유전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유전자는 바로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의 유전자다. 이는 엘 에네미고라는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 에네미고는 영어로 'enemy'. 그러니까 적이라는 뜻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이 싸움이 우리의 인생을 정의하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전투만을 기억한다: 우리 자신을 정의했던, 근원의 적, 우리 자신과의 싸움” (출처: enemigowines.com)]
아드리안나 카테나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레이블에 그려진 싸우는 괴물들의 이미지를 포함해 전반적인 보틀 디자인 또한 그녀의 지식과 취향을 반영한다. 그녀는 역사적 인식과 타고난 도전 정신을 와인에 고스란히 투영했고, 파트너 알레한드로 비힐은 그녀의 철학을 고스란히 와인에 반영해 주었다. 알레한드로 비힐은 카테나 자파타가 소유한 와이너리의 총괄 와인메이커이자 토양 전문가, 농학자다. 그는 남미 최초로 로버트 파커(Robert M. Parker Jr.)로부터 100점을 받은 와인을 생산했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났으니 단지 훌륭한 와인이 아니라 개성과 품격을 겸비한 와인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엘 에네미고의 브랜드 앰버서더 요하킨 디아즈]
요아킨 디아즈와 함께 처음 마신 와인은 그란 에네미고 토론테스(Gran Enemigo Torrontes) 2021. 토론테스는 아르헨티나의 토착 화이트 품종으로 국내 와인 애호가에게도 제법 알려진 품종이다. 일반적으로 아르헨티나 북부 살타(Salta) 지역의 고원지대에서 많이 생산한다. 주로 화려한 아로마와 진한 과일 풍미, 적당한 신맛과 가벼운 유질감이 특징이다. 경우에 따라 씁쓸한 미감이 남기도 한다. 그런데 그란 에네미고 토론테스는 좀 다르다. 상큼한 시트러스 풍미에 은근한 플로럴 허브 뉘앙스가 곁들여진다. 입에 넣으면 신선한 신맛과 영롱한 미네랄이 어우러지며, 견고한 구조가 세련된 미감을 선사한다. 이는 4년간 최적의 양조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다양한 발효 용기와 숙성 용기, 양조 기술들을 실험한 결과 클레이 암포라에서 배양 효모 첨가 없이 10일 동안 발효한 후 프렌치 오크에서 18개월 숙성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포도는 엘 에네미고의 근거지 멘도사(Mendoza) 지역 괄타자리(Gualtallary)의 해발 1,600미터 고지대에서 소량 재배한 토론테스를 엄선해 사용한다. 페르골라(Pergola) 방식으로 포도나무를 길러 작열하는 햇볕으로부터 포도의 신선함을 지킨다. 라벤더, 인동덩굴 같은 꽃향기와 백도, 흰 자두, 서양배 같은 과일 풍미, 상큼한 레몬 산미가 진정 매력적인 와인이다. 와인만으로도 훌륭하지만, 오만지아에서 선보인 생선 세비체와 문어 요리와도 아주 잘 어울리는 가스트로노믹 와인이었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나 오마카세 스시야에서 하우스 와인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와인은 엘 에네미고 말벡 (El Enemigo Malbec) 2021. 말벡 하면 묵직하고 강건한 스타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엘 에네미고 말벡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검은빛이 감도는 짙은 보라색에 블루베리, 블랙베리, 블랙체리, 블랙커런트 등 밀도 높은 베리 풍미, 톡 쏘는 후추와 다크 초콜릿 피니시가 아르헨티나 말벡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윽한 말린 장미 아로마와 영롱한 미네랄, 실키한 질감은 엘 에네미고만의 개성을 보여준다. 각 빈티지별로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등 다른 품종을 소량 블렌딩해 복합미를 더한다. 2021 빈티지는 말벡 89%에 카베르네 프랑 6%, 쁘띠 베르도(Petit Verdot) 5%를 블렌딩했다.

그리고 이날의 메인 와인, 그랑 에네미고(Gran Enemigo) 싱글 빈야드 와인 2종을 시음했다. 두 와인의 생산 방식은 완전히 동일하다. 약 45일에 이르는 긴 수확 기간 동안 생리적으로 완숙한 포도만 엄선해 수확한다. 줄기를 제거하지 않은 포도송이를 일부 사용하며, 2~3번 사용한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배양 효모 첨가 없이 자연스럽게 발효한다. 숙성에는 100년 된 푸드르(foudre)를 사용해 오크 뉘앙스가 과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유의한다. 사용한 포도 품종 또한 카베르네 프랑 85%, 말벡 15%로 동일하다. 그러니 두 와인의 차이는 온전히 테루아의 반영으로 만들어지는 셈이다.
먼저 그랑 에네미고 차카예스 (Gran Enemigo Chacayes) 2017. 차카예스는 해발 1,100미터의 석회질 충적 토양 포도밭이다. 식재 밀도가 헥타르 당 7,000그루로 제법 빽빽하다. 짙은 검보랏빛 컬러에서 블랙베리, 블루베리 풍미가 밀도 높게 뿜어 나오며, 촘촘하면서도 둥근 타닌이 벨벳 같은 질감을 선사한다. 견고한 구조감과 세련된 미감을 겸비한 와인이다. 은은한 정향 허브와 후추, 버섯 힌트가 복합미를 더한다. 지금도 맛있지만 앞으로 10년 이상 숙성할 수 있는 와인이다.
그랑 에네미고 엘 세피조 (Gran Enemigo El Cepillo) 2017은 해발 1,300미터의 해양 석회암 위에 산악 경사면에서 흘러 내려온 붕적토(colluvial)가 덮인 포도밭이다. 식재 밀도는 헥타르 당 8,000그루로 역시 높다. 와인 스타일은 차카예스와 완전히 다르다. 붉은 자두와 산딸기 등 붉은 과일 풍미가 주를 이루며 붉은 장미 잎, 히비스커스 등 고혹적인 플로럴 허브 뉘앙스가 우아하게 감돈다. 섬세한 신맛, 약간의 동물성 힌트와 젖은 토양 뉘앙스가 미묘함을 더한다. 이런 와인이라면 피노 누아 마니아라도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엘 에네미고는 와이너리의 아이콘 와인들을 말벡이 아닌 카베르네 프랑 중심으로 양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도전과 혁신을 추구하는 엘 에네미고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새로움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오랜 기간 다양한 실험을 통해 토양에 맞는 품종을 찾고, 품종에 적합한 양조 방식을 확인한다. 그들의 와인이 와인 평론가들과 애호가들 모두에게 극찬을 받는 이유다.
Copyrights © 와인21닷컴 & 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