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현지 취재] 이탈리아의 구두굽 풀리아를 가다 (1) - 만두리아

서울에서 풀리아(Puglia)의 브린디시(Brindisi)까지는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직항이 없으니 아부다비에서 한 번, 로마에서 또 한 번 경유를 해야만 했다. 로마에서 브린디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온몸이 무겁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곧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과 함께 창문 너머로 파란 바다와 평평한 풀리아 땅이 눈에 들어오자 이탈리아의 구두굽 풀리아에 드디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힘이 솟는 것 같았다.


풀리아는 동쪽으로 아드리아해, 서쪽으로 이오니아해를 두고 있는 좁은 반도다. 이곳의 와인 역사는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정착하며 시작됐다. 더운 지중해성 기후인 이곳은 매년 포도 수확이 풍성해 로마시대부터 주요 와인 산지로 꼽혔고 중세시대에는 풀리아의 두 도시인 바리(Bari)와 브린디시가 와인 교역지로 활발했다. 19세기 말 유럽이 필록세라로 인해 몸살을 앓으며 와인 생산에 큰 타격을 입자 풀리아는 질보다 양으로 와인을 생산했고 이런 방식이 오래 지속되며 풀리아 와인은 벌크 와인 또는 색과 바디감을 보충할 때 쓰는 블렌딩 와인으로 이미지가 굳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며 풀리아는 품질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남다른 개성을 가진  와인을 생산하며 전 세계 와인 시장에서 주목 받고 있다. 풀리아의 주요 산지를 둘러보고 와이너리를 방문하며 꼼꼼히 적어둔 노트를 총 세 편의 기사로 정리해 보았다. 그 첫 번째 기록은 만두리아(Manduria)로 시작한다.


이탈리아 남부의 보석, 만두리아


[드넓은 평지의 포도밭 너머로 멀리 이오니아해가 보인다]


만두리아는 묵직한 레드 와인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산지다.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이곳은 여름에는 기온이 높아 무척 덥지만 이오니아해에서 불어오는 서풍이 더위를 식혀주어 당도와 산도의 밸런스가 좋은 포도를 생산한다. 석회질 기반암 위에 자리한 지표층에 철 성분이 많아 토양에 붉은빛이 도는 이곳은 점토질 땅이 수분을 잘 보존해 강우량이 적은 여름에도 포도가 메마르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 높은 지대가 별로 없고 땅이 평평하기 때문에 포도의 맛이 일관된 것도 이 지역의 특징이다.


만두리아를 대표하는 포도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프리미티보(Primitivo)다. 미국에서는 진판델(Zinfandel)이라고 불리는 이 품종은 이름 속 프리미(primi, 첫번째)라는 단어의 뜻처럼 싹은 늦게 트지만 일찍 익는 것이 특징이다. 포도나무당 수확량은 많아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린 하베스팅(green harvesting, 포도 열매의 색이 변하기 시작할 무렵에 행하는 솎아내기)으로 수확량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 필수다. 프리미티보는 대부분 알베렐로(Alberello)라는 부쉬 바인(bush vine, 덤불 트레이닝) 방식으로 재배되므로 손 수확을 해야 하고 생동감 있는 풍미를 와인에 담기 위해 주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한다. 포도의 당도가 높아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14% 이상인 것이 많고 색은 진하며 바디감이 묵직하다. 진하고 풍부한 아로마에서는 블랙베리, 검은 자두, 말린 무화과, 갖가지 향신료 등의 풍미가 느껴진다. 오크 숙성을 거치면 타닌이 한층 부드러워지고  와인에 바닐라, 삼나무, 훈연 등의 풍미가 더해져 고급스러운 와인이 생산된다.


칸티네 산 마르짜노(Cantine San Marzano)


[산 마르짜노의 마세리아]


만두리아에서 첫번째로 방문한 와이너리는 만두리아 와인의 잠재력을 전 세계에 알린 산 마르짜노였다. 1962년 협동조합으로 시작한 이곳은 현재 1,200명의 포도 생산자와 1,500헥타르의 포도밭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기술을 탑재해 풀리아 와인의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는 프리미엄급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기자를 초대한 곳은 과거에 농장이었던 곳을 모던한 스타일로 개조한 마세리아(masseria, 농장)였다. 옛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세련된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한 마세리아 내부에는 현대적인 테이스팅 룸이 있었다. 포도밭과 함께 허브 농장도 운영하고 있는데 재배하는 세이지만 6,000 종이 넘는다고 한다. 포도밭 중간중간에 트룰리(Trulli)라고 부르는 원뿔 모양의 하얀 돌집은 과거 농부들이 쉼터로 사용하던 곳으로 이제 와인 투어를 하는 관광객들의 숙소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산 마르짜노는 현재 여러 품종으로 전통방식 스파클링 와인을 비롯해, Salento IGP, Puglia IGP, Salica Salentino DOC, Primitivo di Manduria DOC 등 다양한 등급의 레드, 화이트, 로제를 생산하고 있다.


[트라마리, 세산타니 로제, 세산타니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


산 마르짜노에서 시음한 첫번째 와인은 트라마리(Tramari)였다. 이 와인은 프리미티보로 만든 Salento IGP 등급의 로제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양조해 오렌지, 자몽, 복숭아, 라즈베리 등 과일향이 신선하고 조개껍데기 같은 미네랄 향이 매력적이다. 트라마리는 두 바다 사이라는 뜻. 와인 이름처럼 가벼운 해산물 요리와 잘 어울리며 애피타이저와 함께 식전주로 즐겨도 좋고 피자와 파스타 등 다양한 음식에 가볍게 곁들이기 좋은 스타일이다. 


세산타니(Sessantani)는 와이너리 설립 60주년 기념으로 출시했다가 반응이 좋아 2년마다 2만 병 한정으로 생산하고 있는 로제 와인이다. 이 와인도 프리미티보로 만들었으며 와인의 30%를 그을리지 않은 프랑스산 오크 배럴에서 3개월간 숙성시켜 응축된 풍미와 묵직한 바디감이 인상적이다. 신선한 체리와 무화과 등 과일향이 풍부하고 질감이 부드러우며 구조감도 탄탄해 로제지만 숙성잠재력이 있는 스타일이다. 기름에 조리한 해산물이나 크림 소스 파스타처럼 바디감이 있는 음식과 즐기기 좋은 와인이다. 


마지막으로 맛본 세산타니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 DOC는 프리미엄급 레드 와인이다. 고목에서 수확한 프리미티보로 만들어 검은 베리류의 진한 풍미가 일품이며 후추와 시나몬 등 향신료 향과 은은한 오크 향이 복합미를 더한다. 매끄러운 질감과 적당한 무게감이 입안을 부드럽게 채우고 우아한 아로마가 코를 즐겁게 희롱하는 느낌이다. 다양한 육류와 두루 잘 어울리는 와인이지만 다크초콜릿과 함께 디저트로 즐겨도 좋을 스타일이다. 이 와인들 외에도 국내에는 산 마르짜노의 다양한 와인들이 수입되고 있으니 구입해서 맛본다면 풀리아 와인의 다채로운 매력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두토리 디 만두리아(Produttori di Manduria)


[콘크리트 탱크를 재활용해 만든 와인 박물관]


1932년 설립된 프로두토리 디 만두리아는 400명의 회원과 900 헥타르의 포도밭을 보유하고 있는 풀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협동조합이다.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이곳은 만두리아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혁신적인 기술을 접목해 우수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프로두토리 디 만두리아는 특히 프리미티보 와인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데, 이곳의 커머셜 디렉터인 조반니 디미트리(Giovanni Dimitri)는 프리미티보 특유의 순수한 과일향을 잘 살리려면 오크 사용에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두리아로 여행 갈 계획이 있다면 이곳은 필수 방문지다. 프로두토리 디 만두리아의 맛있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과거에 사용하던 거대한 콘크리트 탱크를 개조해 와인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포도 재배 도구들은 물론 다양한 생활 용품들도 전시돼 있어 이탈리아 남부의 생활상을 느껴볼 수 있다.


[프로두토리 만두리아를 대표하는 리리카, 엘리지아, 소네토]


프로두토리 디 만두리아가 생산하는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 DOC  중 대표적인 와인 3종 중 첫번째로 시음한 와인은 리리카(Lirica)였다. 이 와인은 프로두토리 디 만두리아의 베스트 셀러이며 작년에 감베로 로쏘로부터 트레 비키에리(trebicchieri, 최고점인 잔 세 개)를 받았다. 각기 다른 토질의 밭에서 손 수확한 프리미티보로 만든 이 와인은 대형 슬라보니아 오크통에서 6개월간 숙성을 거쳤다. 블랙체리와 검은 자두 등 잘 익은 과일 향이 산뜻한 산미와 훌륭한 균형을 이루고 생강, 아니시드, 오크 등의 풍미가 복합미를 더한다. 중간 정도의 적당한 바디감은 매끈한 타닌, 풍부한 과즙과 함께 부드럽게 입안을 채운다. 


리제르바 등급의 엘리지아(Elegia)는 프랑스산 중고 바리크에서 12개월간 숙성한 뒤 추가 병숙성을 더해 총 24개월 숙성을 거쳐 출시한 와인이다. 블랙베리, 라즈베리, 블루베리 등 다양한 야생 베리류의 아로마와 함께 말린 자두의 달콤한 향이 감미롭고 제비꽃의 향긋함이 우아하다. 육두구, 정향, 바닐라 등 향신료 향도 매력적이다. 타닌이 부드럽고 질감이 매끈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며 중국에서 특히 인기가 많은데 향신료 향이 강한 매콤한 음식과 특히 잘 어울린다고 한다. 


소네토(Sonetto)도 리제르바 등급이며 2025 감베로 로쏘 트레 비키에리를 받았다. 생산량이 극히 적은 알바렐로 고목에서 수확한 프리미티보로 만든 이 와인은 포도의 농축미가 워낙 좋아 프랑스산 바리크(60~70% 중고)에서 24개월의 긴 숙성을 거쳤다. 진한 루비빛 색상이 매혹적이고 블랙베리, 자두, 무화과 등 검은 과일 향과 발사믹, 담배, 가죽, 후추 등 다양한 풍미가 복합미를 이루고 있다. 바디감은 묵직하고 질감이 매끈하며 풍성한 과일향과 산뜻한 산미의 조화도 훌륭하다. 알코올 도수가 16%나 되지만 모든 요소가 완벽한 밸런스를 이루고 있어 마치 마법처럼 알코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드리갈레 돌체 나투랄레]


만두리아에서는 프리미티보로 돌체 나투랄레(Dolce Naturale)라는 스위트 와인도 생산하고 있다. 프로두토리 디 만두리아의 마드리갈레(Madrigale)가 바로 그런 와인이다. 프리미티보를 9월 말까지 포도나무에 달린 채 말린 뒤 늦수확해 만든 이 와인은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짧은 숙성을 거친 뒤 바로 병입한다. 맛을 보면 말린 무화과, 대추야자, 블루베리잼 등 달콤한 과일향과 함께 은은한 향신료 향이 느껴진다. 과하지 않은 단맛이 신선한 산미와 맛있는 조화를 이루고 부드러운 타닌이 입안을 감미롭게 채운다. 만두리아 전통 디저트류와 자주 즐기지만 약과 같은 한과와도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고 매콤한 음식과 즐겨도 의외로 멋진 궁합을 보여줄 것 같다.


바르발리오네(Varvaglione)

1921년 설립된 바르발리오네는 풀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경영 와이너리 중 하나다. 현재 4대째 운영 중인 이 와이너리는 가문의 전통과 현대적인 기술을 토대로 풀리아의 테루아, 품종, 정서, 문화가 담긴 와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총 150헥타르의 포도밭을 지속가능 방식으로 경작하고 있으며 연간 5백만 병의 생산량 중 85%를 수출할 정도로 해외 시장에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바르발리오네의 현 오너이자 3대손 코시모 바르발리오네]


바르발리오네는 프리미티보로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프리미티보로 만든 이데아(Idea) 로제다. 2018년 프리미티보의 품질이 레드 와인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자 대신 로제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와서 '이데아'라는 이름으로 출시하게 됐다고 한다. 딸기, 복숭아, 레몬 등 과일향이 신선하고 장미의 향긋함이 느껴지는 이 와인은 상큼한 신맛이 경쾌한 밸런스를 유지해 샐러드나 해산물 같은 가벼운 음식은 물론 매콤한 한식과도 잘 맞을 스타일이다.


바르발리오네를 대표하는 와인으로는 12 에 메쪼 프리미티보(12 e Mezzo Primitivo)와 파팔레 리네아 오로(Papale Lineo Oro)를 꼽을 수 있다. 12 에 메쪼는 알코올이 17%까지 올라가는 프리미티보를 낮은 알코올로 가볍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2012년에 시작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이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12.5%, 그래서 이탈리아어로 12와 반을 뜻하는 '12 e Mezzo'가 와인의 이름이 됐다. 비결은 포도가 익자마자 바로 수확하는 것. 3개월간 바리크에서 짧은 숙성을 거친 뒤 출시하는 이 와인은 자두, 블랙베리, 블랙체리 등 검은 과일향이 신선하고 후추 등 향신료 향이 은은하다. 중간 정도의 바디감과 산뜻한 산미가 경쾌함을 부여해 누구나 부담없이 즐기기 좋은 와인이다. 파스타, 불고기, 돼지갈비와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다.


[파팔레 리네아 오로]


파팔레 리네아 오로는 바르발리오네의 아이콘급으로 프리미티보의 수확이 탁월한 해에만 생산되는 와인이다. 파팔레는 '교황의 땅'이라는 뜻. 이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밭이 예전부터 우수한 와인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했음을 증명한다. 레이블에 깨알같이 적힌 글도 이 땅에서 생산한 와인의 우수성을 알리는 1724년의 신문 기사라고 한다. 바르발리오네를 방문했을 때 맛본 2021년산은 자두, 블랙체리, 블랙베리 등 농익은 과일향과 함께 감초, 계피, 후추, 다크초콜릿, 에스프레소 등의 집중된 풍미를 보여주었고 묵직한 바디감과 산뜻한 산미의 밸런스도 훌륭했다. 함께 비교해서 맛본 2014년산에서는 무화과, 자두, 대추 등 마른 과일향이 달콤했고 캐러멜, 감초, 가죽, 훈연, 코코아, 버섯 등 3차향이 우아하게 발현되어 있었다. 힘, 우아함, 숙성잠재력을 겸비한 풀리아의 명품이다.


만두리아라고 하면 우리는 묵직한 프리미티보 와인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직접 방문해 보니 프리미티보는 로제, 레드, 스위트 등을 생산하는 다재다능한 품종이고 만두리아는 깊은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와 미래로 뻗어나가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산지였다. 왜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를 풀리아의 보석이라 부르는지 몸소 느껴볼 수 있었던 값진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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