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의 설립자, 카를로와 단테 몬다비 형제 (제공: 나라셀라)]
미국 와인의 전설로 불리는 할아버지, 그 뒤를 이어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의 개척자로 알려진 아버지. 두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포도밭 관리와 와인 양조를 배운 형제는 와인 생산자이자 환경운동가로 성장했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자연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찌감치 보고 느낀 덕분이다. 형제는 자신들의 와이너리를 설립했고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와인은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고 있다. 고(故) 로버트 몬다비의 손자이자 팀 몬다비의 아들인 카를로 몬다비(Carlo Mondavi)와 단테 몬다비(Dante Mondavi)의 와인, '레인(RAEN)'에 관한 이야기다.
최근 카를로 몬다비가 한국을 찾아 레인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와인을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다. 2013년, 몬다비 패밀리의 4세대인 그가 동생과 함께 소노마 코스트(Sonoma Coast) 서쪽 끝에 설립한 레인은 이름에서부터 와이너리의 철학을 온전히 표현한다. 레인(RAEN)은 'Research in Agriculture and Enology Naturally'를 뜻하며 자연 속에서 농업과 양조학에 몰입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카를로는 자신들을 와인메이커가 아니라 재배자들, “와인그로어(Winegrowers)”라고 표현했다. 와인을 만든다기보다는 자연 속에서 좋은 와인을 키워낸다는 것,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방식에서부터 레인의 핵심적인 철학을 알 수 있다.
[한국을 찾은 카를로 몬다비]
카를로와 단테 형제에게 큰 영감을 준 존재는 당연히 가족이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철학자 같은 분이에요. 레인 와이너리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감을 주셨습니다.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의 기술적인 완성도 부분에서는 특히 피노 누아에 열정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할머니도 중요한 역할을 하셨죠. 우리가 추구하는 와인의 우아함이나 음식과 조화를 이루는 스타일은 할머니로부터 온 것이니까요.”
카를로와 단테 형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약 10여 년간 와인 생산에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게 찾은 곳이 태평양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한 세 개의 빈야드였다. 25에이커 남짓한 규모로, 시원한 바닷바람과 아침 안개의 영향을 받으며 독특한 토양 조건에서 우아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 그랑 크뤼 포도밭이다.
[레인의 빈야드 풍경 (제공: 나라셀라)]
이들에게 와인 양조는 오히려 쉬운 부분에 속한다. 이미 집안의 선대 와인메이커들이 많은 연구를 통해 풍부한 데이터를 쌓은 덕분에 과학적인 요소들을 적절히 적용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후대까지 내다보며 친환경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자연을 존중하고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반영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지속가능한 농법을 추구하는데, 이는 카를로 몬다비가 2016년 시작한 환경 캠페인 '모나크 챌린지(Monarch Challenge)'와도 연결된다.
“모나크는 나비의 한 종류예요. 제가 어린 시절엔 많이 본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개체수가 감소해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모나크 챌린지는 환경 보호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이처럼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들을 지켜 전 세계 농업이 생물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노력입니다. 포도 재배를 하면서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 화학비료나 제초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 것도 모나크 챌린지의 일환이죠.” 다른 포도 재배자들과 와인메이커들에게 영감을 주는 자연주의 운동을 선도하며 환경운동가로 활약하는 카를로는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한 전기 트랙터 사업인 '모나크 트랙터'를 공동 창립하기도 했다.
레인의 핵심적인 포도원인 프리스톤 옥시덴탈(Freestone Occidental)은 숲과 야생화, 토착 식물들이 어우러진 환경이다. 이곳은 야생동물 구조 및 방사 지역으로 지정돼 있으며 와이너리의 가족과도 같은 스라소니와 여우 등이 서식하고 있다. 카를로 몬다비는 레인의 포도원이 “유기농 인증을 받았지만 유기농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며 지속가능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퍼머컬처(Permaculture), 재생 농법(Regenerative Farming), 바이오다이내믹 농법까지 사용하는 '비욘드 오가닉(Beyond Organic)'이다.
[레인에서 2차 선별을 거쳐 사용하는 전송이 피노 누아 (제공: 나라셀라)]
포도는 수확 후 포도밭과 셀러에서 2차 선별 과정을 거친 뒤 전송이(whole cluster) 발효하고, 정제와 여과를 하지 않는다. 카를로는 2000년대 초반 전송이를 사용해 만든 부르고뉴 와인이 너무나 훌륭한 것을 경험한 뒤 레인의 설립 초기부터 전송이 발효를 시도해 왔고, 현재 화이트와 레드 와인 모두 전송이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2023년 빈티지 와인들을 카를로 몬다비와 함께 시음할 수 있었다. 2023년은 카를로가 와이너리 설립 이후 최고의 빈티지로 꼽는 해다. 놀랍도록 섬세하며 캘리포니아 와인이지만 마치 부르고뉴 와인처럼 알코올 도수가 대부분 12.5도이고 높아도 13도를 넘지 않는다. 비교적 서늘한 해였기 때문에 더웠던 해에 비해 한 달 정도 늦게 수확해 10월 초에 수확을 마쳤다고 한다. 포도송이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행타임(hang time)이 길었던 덕분에 충분히 깊고 복합적인 아로마를 갖춰, 지금도 좋지만 숙성잠재력도 매우 기대되는 빈티지다.
레인 소노마 코스트 레이디 마조리 샤도네이 RAEN Sonoma Coast Lady Marjorie Chardonnay 2023
레인에서 생산하는 두 가지 샤도네이 와인 중 하나. 마조리(Marjorie)는 카를로와 단테 몬다비 형제의 할머니 이름이다. 카를로는 “마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 로버트 몬다비의 이름 뒤에 가려졌지만 할머니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몬다비 패밀리가 지금의 위치에 올 수 있었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와인을 만들었다고 했다. 레인의 빈야드 중 소노마 코스트 서쪽 끝 험준한 지역에 자리한 포트 로스-씨뷰(Fort Ross-Seaview)의 2개 구획에서 수확한 샤도네이를 사용했다. 바다와 가까운 포도밭인 만큼 와인에서 미네랄리티가 굉장히 잘 느껴진다. 젖은 돌과 잘 익은 복숭아, 감귤, 꽃, 허니서클 등의 아로마가 아름답게 드러나고 우아하며 섬세한 와인이다. 제임스 서클링에게 99점을 받았다.
레인 포트 로스-씨뷰 찰스 랜치 샤도네이 RAEN Fort Ross-Seaview Charles Ranch Chardonnay 2023
레인의 또 다른 샤도네이 와인은 포트 로스의 시원한 태평양 해안선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생산한다. 바위가 많은 언덕 위에 위치한 빈야드이며, 암석으로 인해 배수가 원활한 토양에서 45년 수령의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있다. 풍성한 흰꽃과 복숭아, 레몬, 젖은 돌 등의 다채로운 향이 올라오고 생생한 산미가 조화롭다. 레이디 마조리 샤도네이가 특히 미네랄리티가 돋보였다면 찰스 랜치 샤도네이는 올드바인이 선사하는 깊이감에 버터리한 뉘앙스가 더해진다. 부드러운 질감과 긴 여운을 남기는 건 두 와인 모두 공통적이다. 2023 빈티지가 제임스 서클링 100점을 받았다.
레인 소노마 코스트 로열 세인트 로버트 뀌베 피노 누아 RAEN Sonoma Coast Royal St. Robert Cuvée Pinot Noir 2023
레인에서 생산하는 기본급 피노 누아 와인이다. 와인 이름의 세인트 로버트(St. Robert)는 로버트 몬다비를 의미하며, 소중한 가르침을 남겼던 할아버지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손자들이 바치는 헌정 와인이다. 해안가 포도원에서 엄선한 포도를 사용한 와인으로 레드 체리와 레드베리, 블랙베리, 딸기, 제비꽃, 숲의 아로마가 풍성하게 잔을 채우고 홍차와 허브 뉘앙스도 느껴진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미네랄과 단단한 타닌도 빼놓을 수 없다. 2023 빈티지가 제임스 서클링 99점을 받았고, 2021 빈티지는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Top 100' 와인 중 4위에 오른 바 있다.
[씨 필드 빈야드 (제공: 나라셀라)]
레인 포트 로스-씨뷰 씨 필드 피노 누아 RAEN Fort Ross-Seaview Sea Field Pinot Noir 2023
해발고도 460미터의 고지대 포도원에서 생산한 와인이다. 1.9헥타르 규모인 씨 필드 빈야드는 오래 전 바다의 기반암에서 나온 다양한 해저 토양으로, 대표적인 포트 로스 테루아를 보여주며 레인에서 가장 우아한 스타일의 피노 누아를 생산하는 곳으로 꼽힌다. 산도 유지를 위해 밤에 수확한 포도를 2차 선별해 전송이 발효했고 프렌치 오크통에서 10개월간 숙성했다. 새 오크통의 비율은 10% 정도다. 라즈베리, 딸기 등 붉은 과일과 오렌지 껍질, 장미 꽃잎, 젖은 돌, 캐모마일 등의 아로마가 이어진다. 생기 넘치면서도 고아한 인상을 전하는 와인이다. 2023년 빈티지가 제임스 서클링 99점을 받았다.
레인 프리스톤 옥시덴탈 보데가 피노 누아 RAEN Freestone Occidental Bodega Pinot Noir 2023
프리스톤과 옥시덴탈 사이에 자리하는 보데가 빈야드는 레인의 빈야드 중 가장 서늘한 테루아로 꼽힌다. 가파른 경사면에 위치한 단 0.7헥타르 규모의 오래된 포도원으로, 해발고도가 낮고 해안가 가까이에 위치해 아침 안개와 바닷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습하고 선선한 기후는 와인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야생 딸기와 블랙베리, 블랙 체리, 장미 꽃잎의 아름다운 아로마와 함께 젖은 돌, 블랙티, 숲바닥의 습하고 서늘한 느낌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좋은 산도와 미네랄, 부드러운 타닌, 뛰어난 집중도를 보여주는 와인이다. 레인이 추구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온전히 담겨 있고, 지금보다 앞으로 시간이 흐른 이후의 모습이 더 기대된다.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2023 빈티지가 제임스 서클링 100점을 받았다.
다섯 가지 와인이 모두 99점과 10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기록했지만, 카를로 몬다비는 지속가능성에 기여하는 와이너리에 수여하는 '로버트 파커 그린 앰블럼(Robert Parker Green Emblem)'을 받은 것이 그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세계적인 와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열정적인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는 그에게 와인메이킹과 환경운동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는 일이다. 우리의 행동이 곧 환경에 미치는 영향으로 이어지는 듯,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드는 방식 또한 우리에게 그대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꼭 닮은 와인, 레인은 이처럼 조화롭게 다져진 철학과 소신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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