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그 자체로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컬트 와인은 고급와인을 넘어 신화처럼 여겨진다. 컬트 와인이란 희소성과 높은 가치로 인해 특정 마니아층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전설이 된 와인을 의미한다. 마치 한정판 스포츠카나 희귀한 예술 작품처럼 수집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며 컬트 와인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별한 경험이자 특권으로 여겨진다.
컬트 와인은 흔히 쓰이는 용어지만 명확한 기준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다만 컬트 와인이라 불리는 와인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뛰어난 품질은 기본이며 대형 와이너리가 아닌 소규모 양조장이나 독립적인 와인 생산자들이 생산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생산량이 극히 적어 자연스럽게 희소성이 높아지고, 높은 수요에 의해 시장 가격이 출시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다. 일부 컬트 와인은 경매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컬트 와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나파 밸리 오크빌(Oakville)에서 생산되는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이다.

[스크리밍 이글의 포도밭 전경, (출처: cluboenologique.com, Rob Black)]
스크리밍 이글의 탄생
스크리밍 이글의 역사는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성공한 부동산 중개인이었던 진 필립스(Jean Phillips)는 나파 밸리에 포도밭 부지를 매입했다. 그녀는 와인 양조 경험이 전혀 없었고, 자신이 개척한 와이너리가 훗날 전설적인 컬트 와인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매입한 포도밭에는 1940년대부터 여러 품종의 포도나무가 식재돼 있었지만, 필립스는 이를 모두 정리하고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를 심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와인을 만들던 필립스는 1990년대 초, 나파 와인의 대부로 불리는 로버트 몬다비(Rovert Mondavi)에게 자신이 만든 카베르네 소비뇽을 시음해 달라고 부탁했다. 몬다비는 깊고 풍미가 가득한 그녀의 와인에 감탄하며 즉시 병입할 것을 권유했다. 이후, 샤토 몬텔레나(Château Montelena)의 소유주인 보 배렛(Bo Barrett)의 아내이자 와인메이커인 하이디 피터슨 배렛(Heidi Peterson Barrett)과 협력해 첫 1992년 첫 상업용 와인을 만들었다. 이것이 스크리밍 이글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전설이 된 와인
1995년 스크리밍 이글의 명성을 드높이게 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가 1992년 빈티지에 99점이라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준 것이다. 당시 생산량이 단 200케이스(약 2,400병)에 불과했던 이 와인은 곧바로 미국 와인 수집가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와인으로 떠올랐고, 이후 빈티지들도 지속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컬트 와인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스크리밍 이글의 인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높아졌다. 2000년에는 1992 빈티지의 6리터짜리 대형 와인이 자선 경매에서 무려 50만 달러(약 7억 원)에 낙찰됐다. 와인의 품질을 넘어 그 희소성과 상징성이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스크리밍 이글은 하나의 컬트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2006년 이 와이너리는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아스날 FC와 미국 내셔널 풋볼 리그(NFL)의 로스앤젤레스 램스(Los Angeles Rams) 등 전 세계 유명 스포츠팀의 구단주로도 유명한 스탠 크랑키(Stan Kroenke)와 스포츠 에이전트 출신 찰스 뱅크스(Charles Banks)에게 매각됐으며, 2009년 스탠 크랑키가 단독 소유주가 되었다.
스크리밍 이글의 공식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일반적인 와이너리 홈페이지와 달리 '웨이팅 리스트(Waiting List)' 메뉴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스크리밍 이글 와인을 와이너리에서 직접 구매하려면 먼저 이 리스트에 등록한 후, 오랜 기간 기다려 와인 클럽에 가입해야 한다. 하지만 몇 년을 기다려도 기존 회원이 탈퇴하지 않는 한 연락을 받을 수 없으며, 실제로 대기 시간이 얼마나 될지 와이너리 측에서도 정확히 답변해 줄 수 없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출처: cluboenologique.com, Rob Black]
스크리밍 이글의 철학과 마케팅
스크리밍 이글은 희소성, 뛰어난 품질, 그리고 진 필립스의 확고한 철학이 결합된 와인이다. 그녀의 와인이 오늘날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비싸고 희귀한 와인 중 하나가 된 것은 운이 아니라 노력과 장인정신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스크리밍 이글의 철학은 희소성을 유지하고 품질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현재 와이너리의 연간 생산량은 약 500~800케이스에 불과하며, 아무리 수요가 높아도 생산량을 늘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와이너리 규모 자체도 작아서 대규모 생산이 불가능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외부인들이 와이너리를 신비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도 스크리밍 이글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비록 와이너리에서 이를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이곳은 외부의 방문이 거의 불가능하다. 세계 최고의 소믈리에들부터 유명 와인 평론가나 와인업계 주요 매체의 방문 요청이 거절되는 경우가 많으며, 당연하게도 공식적인 투어나 테이스팅룸도 운영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와이너리는 베일에 싸인 미스테리한 공간이 되었고, 희소 가치는 한층 더 높아졌다.
극도로 미니멀하면서도 상징적인 와인 라벨도 특별하다. 검은 배경 위에 하얀 독수리가 날아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일반적인 와인 라벨보다 작은 크기로 제작됐다. 대부분의 와이너리가 시간이 흐르면 디자인을 조금씩 변경하는 것과 달리, 스크리밍 이글은 라벨 디자인을 거의 변함없이 유지하며 브랜드의 일관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

스크리밍 이글 카베르네 소비뇽
현재 스크리밍 이글은 단 세 가지 와인만을 생산한다. 가장 최근에 판매하기 시작한, 희귀한 소비뇽 블랑은 오직 기존 와인 클럽 멤버들에게만 판매된다. 일부 경매에서는 병당 천만 원 이상을 호가하기도 했다. 더 플라이트(The Flight)는 2012년 출시된 메를로 베이스 블렌드 와인으로, 보다 부드럽고 섬세한 스타일이다. 그리고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플래그십 와인인 카베르네 소비뇽이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 품종으로 사용하고 카베르네 프랑과 메를로를 블렌딩한다.
스크리밍 이글의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밭은 바위가 많은 지형에 위치해 배수가 뛰어난 이점을 누리고 있다. 나파 밸리의 뜨거운 낮과 산 파블로 만(San Pablo Bay)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어우러져 포도 숙성에 최적의 조건이다.
와이너리는 지속가능한 농법을 적용해 포도밭을 관리한다. 포도밭의 피복작물을 통해 토양의 영양분을 증가시키고, 땅을 시원하게 유지해 포도의 숙성을 늦추고 신선도를 유지한다. 또한 잡초와 해충 관리, 친환경 퇴비를 위해 양과 닭을 활용하는 등 친환경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포도밭을 50개의 개별 블록으로 나눠 각각의 미기후와 토양 특성에 따라 맞춤형 재배와 양조를 진행한다. 양조 과정에서는 특정 블록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스테인리스 스틸, 오크, 콘크리트 탱크 등 각각 다른 용기를 활용해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세계적인 와인 저널리스트 일레인 추칸 브라운(Elaine Chukan Brown)은 스크리밍 이글 카베르네 소비뇽에 대해 “레이어링이 인상적이고 정교한 구조감과 풍성함을 갖춘 와인”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비너스(Vinous)의 안토니오 갈로니(Antonio Galloni)는 2021년 빈티지에 100점 만점을 부여하며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2021 카베르네 소비뇽은 지금까지 테이스팅한 스크리밍 이글 중 가장 강렬하고 폭발적인 영 빈티지 와인 중 하나입니다. 가물었던 해의 자연스러운 농축미가 돋보이며, 풍부한 타닌이 와인의 강렬함을 강조합니다. 흑연, 가죽, 감초, 구운 허브와 라벤더의 풍미가 검붉은 과일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대부분의 다른 빈티지 와인들은 어릴 때 마셔도 훌륭하지만, 2021 빈티지는 반드시 숙성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컬트 와인에 대한 열기는 식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스크리밍 이글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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