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루아르(Loire)의 앙리 부르주아(Henri Bourgeois), 뉴질랜드 말보로(Marlborough)의 끌로 앙리(Clos Henri)에서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피노 누아(Pinot Noir) 품종으로 빼어난 와인을 만드는 장-마리 부르주아(Jean-Marie Bourgeois)가 한국을 찾았다.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와인 복합문화 공간 도운 스페이스에서 그의 설명을 들으며 앙리 부르주아와 끌로 앙리의 주요 와인들을 시음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한국을 찾은 앙리 부르주아의 오너 와인메이커, 장 마리 부르주아]
부르주아 가문은 루아르 동쪽 상세르(Sancerre) 지역 중심부 샤비뇰(Chavignol) 마을을 기반으로 10대를 이어 와인을 양조해 왔다. 처음 1.5헥타르로 시작한 포도밭 규모는 현재 72헥타르에 이른다. 단지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포도밭은 상세르와 푸이 퓌메(Pouilly-Fumé)의 테루아를 대표하는 주요 구획들이다.
현대적 와이너리의 기반을 다진 사람은 장 마리의 아버지 앙리 부르주아다. 그는 1950년대부터 상세르의 테루아를 드러내는 와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1960년대에는 장 마리와 레미(Rémi) 형제가 합류해 새로운 테루아를 찾아 포도밭을 매입하며 규모를 넓혀 나갔다. 오늘날에도 가족 경영의 전통이 이어져 장 마리의 아들 아르노(Arnaud)와 리오넬(Lionel), 그리고 조카 장 크리스토프(Jean-Christophe)가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앙리 부르주아에 기여하고 있지만, 명함에는 직책 대신 비네롱(vigneron)이라고만 적혀 있다. 모두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장 마리 부르주아는 “좋은 와인은 좋은 포도에서 나오는 것이며, 좋은 포도를 얻기 위해 모든 가족이 함께 힘을 모으는 것이 앙리 부르주아가 추구하는 가치이며 방식”이라고 밝혔다.

[상세르를 대표하는 세 가지 테루아]
상세르와 푸이 퓌메에 있는 앙리 부르주아의 포도밭은 130여 구획에 흩어져 있다. 앙리 부르주아는 1984년부터 테루아별로 와인을 양조한다. 때문에 같은 품종, 유사한 양조 방식으로 만든 와인이 테루아에 따라 어떤 개성을 드러내는지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상세르의 테루아는 크게 석회암(Limestone), 키메리지안(Kimmerigian), 부싯돌(Silex) 세 가지로 나뉜다. 석회암 토양은 상세르 서쪽에 주로 분포하며 전체 면적의 60% 정도를 점유한다. 배수가 잘 되는 토양으로 신선한 과일 풍미가 물씬 드러나는 와인이 나온다. 키메리지안은 부르고뉴 샤블리(Chablis)를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바로 그 토양이다. 점토질에 주라기 화석들이 많이 섞여 있는 토양으로 상세르 중앙부에 약 10%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 와인은 넉넉하고 복합적이며 독특한 아이오딘 뉘앙스가 풍긴다. 마지막 부싯돌 토양은 상세르 동쪽 루아르강과 인접한 부근에 많다. 상세르 지역의 15% 정도를 점유하며 포도 재배 및 포도밭 관리가 대단히 힘든 토양으로 악명이 높다. 견고한 구조와 함께 특유의 스모키 미네랄이 매력적인 와인이 나온다. 참고로 맞은편 푸이 퓌메에도 부싯돌 토양이 많이 존재한다.
앙리 부르주아는 2023년부터 모든 포도밭에 에코서트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충분히 자연 친화적인 방식으로 포도밭을 관리해 왔다. 재배하는 포도 품종 비율은 피노 누아 20%, 소비뇽 블랑 80% 정도다. 현재 상세르를 대표하는 품종은 소비뇽 블랑이지만, 옛날에는 원래 피노 누아였다고 한다. 하지만 필록세라의 습격으로 포도밭이 황폐해진 후 적응력이 좋은 품종을 선택한 것이 바로 소비뇽 블랑이었다.

[이날 테이스팅 한 여섯 와인들(왼쪽 세 가지는 앙리 부르주아, 오른쪽 세 가지는 끌로 앙리)]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든 피노 누아로 만든 레드 와인이든, 잘 만든 상세르와 푸이 퓌메 와인은 음식과 아주 잘 어울린다. 소믈리에들이 앙리 부르주아의 와인을 선호하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포시즌즈, 힐튼, 메리어트 같은 특급 호텔들은 물론 대한항공 1등석에서도 앙리 부르주아 와인을 서비스하고 있다. 이날 장 마리 부르주아가 소개한 앙리 부르주아의 와인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푸이 퓌메(Henri Bourgeois Pouilly-Fumé) 2023. 신선한 허브와 은은한 재스민꽃 같은 플로럴 아로마가 독특한 미네랄 뉘앙스와 함께 우아하게 드러난다. 완숙 핵과, 라임 속껍질, 키위 같은 풍미가 신선한 시트러스 산미와 어우러지며, 부드러운 질감을 타고 세이버리 한 여운이 길게 이어진다. 우아한 소비뇽 블랑의 전형을 보여주는 와인.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낮은 온도로 효모 잔여물과 함께 5-6개월 숙성해 완성한다.
두 번째는 상세르 레 바론(Henri Bourgeois Sancerre Les Baron) 2023이다. 향긋한 꽃향기와 영롱한 미네랄이 밀도 높게 드러나며 그윽한 백도, 흰 자두 풍미가 뒤를 받친다. 입에 넣으면 상큼한 레몬 산미가 도드라지며, 은은한 과일 풍미와 함께 감초와 아니스 힌트가 피니시까지 이어진다. 앙리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함이 매력적이다. 푸이 퓌메와 유사한 방식으로 양조하기 때문에 풍미의 차이는 온전히 테루아에서 비롯된 것이다.

[앙리 부르주아 상세르 당탕(좌), 당탕에 사용되는 포도를 재배하는 포도밭에 많은 부싯돌(우)]
마지막은 상세르 당탕(Henri Bourgeois Sancerre d'Antan) 2022. 코를 대는 순간 향긋한 오크 뉘앙스 아래로 은은한 플로럴 아로마와 노란 핵과 풍미가 밀도 높게 드러난다. 놀라운 것은 이 엄청난 밀도를 뚫고 특징적인 스모키 미네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것. 위 사진에 보이는 부싯돌을 맞부딪힐 때 나는 냄새와 비슷한 향이다. 미디엄 풀바디에 부드럽고 둥근 질감을 타고 자두, 복숭아, 열대과일 풍미가 격조 높게 드러나며, 볶지 않은 아몬드 힌트와 신선한 치즈 뉘앙스가 복합미를 더한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10년 이상 다채롭게 변화해 갈 와인이다. 부싯돌 토양에 식재된 최소 60년 수령 고목에서 수확한 포도를 수확 직후 부드럽게 압착해 발효하는데, 25%는 새 오크통을 발효조로 사용한다. 효모 잔여물과 함께 12개월, 병입 후 6-12개월 숙성한다.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들과 견줄 수 있는 품격을 지녔다.

다음은 앙리 부르주아가 뉴질랜드 말보로에 설립한 와이너리 끌로 앙리(Clos Henri)다. 2000년 전후 프랑스 밖에서 소비뇽 블랑과 피노 누아를 재배하기 적합한 토양을 찾아 남아공, 칠레, 아르헨티나 등을 탐색하던 도멘 앙리 부르주아의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말보로였다. 당시 말보로는 현재와 같은 명성을 얻기 전이었다. 이곳을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토질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서늘한 기후였다. 피노 누아도 그렇지만 특히 소비뇽 블랑은 더위를 아주 싫어하는 품종이다. 그들이 정착한 와이라우 밸리(Wairau Valley)는 위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북쪽과 남쪽이 산맥으로 막혀 있다. 덕분에 동쪽의 클라우디 베이로부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질병을 방지하고 포도가 신선한 산미를 유지하게 돕는다.
2000년 그들이 구입한 토지는 포도가 전혀 식재돼 있지 않은 황무지였다. 장 마리는 “자신의 방식대로 포도를 심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재 110 헥타르 중 양질의 토양을 선별해 70 헥타르 정도만 포도밭으로 개간했다. 나머지 토양에는 포도밭을 둘러싼 숲을 조성했고, 끌로 앙리의 상징과도 같은 조그만 성당도 세웠다. 끌로 앙리의 모든 포도밭은 100% 유기농으로 관리한다. 말보로 전체 포도밭의 15%만이 유기농임을 고려하면 대단한 수치다. 테루아를 잘 드러내기 위해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끌로 앙리는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보호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적용하고 있다. 끌로 앙리 와인의 아름다운 레이블은 이러한 와이너리의 철학을 표현한 것이다.
끌로 앙리의 대표적인 테루아 역시 세 가지다. 빙하석의 일종인 오티라(Otira). 점토질과 강의 조약돌이 섞인 와이마웅가(Waimaunga), 풍화된 점토질(Wither & Broadbridge)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토양에 포도나무를 빽빽하게 심고 관개를 하지 않는 드라이 파밍(dry farming)으로 포도밭을 관리한다. 포도나무는 생존을 위해 경쟁하며 뿌리를 깊이 내릴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수확량은 상당히 적지만 테루아를 확실히 반영하는 포도가 나온다. 장 마리는 “이제 말보로에 정착한 지 20여 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테루아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면서 앞으로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 더욱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끌로 앙리의 세 가지 와인들]
이어서 끌로 앙리 와인 3종을 테이스팅 했다. 이번에는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과 함께 피노 누아로 양조한 레드 와인 2종이 포함됐다. 시음해 보니 프랑스 DNA가 이식된 말보로의 소비뇽 블랑과 피노 누아는 확실히 일반적인 말보로 와인들과 느낌이 달랐다.
끌로 앙리 에스테이트 소비뇽 블랑(Clos Henri Estate Sauvignon Blanc) 2023의 경우 일반적인 말보로 소비뇽 블랑에 비해 풋풋한 잔디 같은 아로마는 정제돼 있고 그린 허브, 아스파라거스 같은 신선한 야채 향과 싱그러운 시트러스 풍미, 영롱한 미네랄이 드러난다. 입에 넣으면 상큼한 신맛과 어우러지는 복숭아 같은 핵과와 자몽 같은 시트러스 풍미가 미세한 단맛과 함께 편안하게 다가온다. 중용적인 스타일의 소비뇽 블랑으로 누구나 맛있게 마실 수 있다. 포도를 수확 즉시 압착해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해 신선한 풍미를 살리고, 효모 잔여물과 함께 6개월 숙성해 부드러운 질감과 풍미를 더한다.
끌로 앙리 에스테이트 피노 누아(Clos Henri Estate Pinot Noir) 2022는 붉은 체리와 베리 풍미에 은은한 토스티 오크와 베이컨 힌트가 아주 가볍게 더해진다. 충분히 스월링을 해 주면 딸기, 붉은 자두 등의 과일 풍미에 감초 같은 약재 뉘앙스가 살아난다. 기본급 피노 누아임에도 촘촘한 타닌과 생생한 산미가 제법 강건한 구조를 형성한다. 고전적 스타일의 피노 누아. 끌로 앙리의 다양한 테루아에서 재배한 피노 누아로 양조하여 대형 프렌치 오크통에서 10개월 숙성한다.
마지막으로 끌로 앙리 와이마웅가 피노 누아(Clos Henri Waimaunga Pinot Noir) 2020. 에스테이트 피노 누아에 비해 확실히 짙은 루비 레드 컬러. 글라스에 코를 대는 순간 고급 오크 뉘앙스가 확연히 드러나며 흑연 같은 미네랄과 붉은 꽃 향기, 신선한 붉은 체리, 베리, 커런트 풍미가 고혹적으로 드러난다. 입에 넣으면 실키한 타닌과 신선한 산미가 조화롭게 드러나며, 검붉은 베리와 자두 풍미가 다양한 스파이스, 미네랄 뉘앙스와 함께 복합적인 풍미를 선사한다. 섬세함과 강건함을 겸비한 피노 누아로 10년 이상의 장기 숙성 잠재력을 지녔다. 참석자 중에는 부르고뉴 와인이 연상된다는 의견을 피력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름과 같이 와이마웅가 진흙 토양에서 재배한 포도를 손 수확해 20%는 줄기를 제거하지 않고 사용한다. 발효 전 침용 및 발효 기간은 3주 정도이며, 프렌치 오크(20% new)에서 12개월 숙성한다.
장 마리 부르주아는 자신의 와인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한국인들이 자신이 와인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조금이라도 더 한국 애호가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앙리 부르주아와 끌로 앙리의 와인들. 아마 앞으로도 꾸준히, 더 많은 사랑을 받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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