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태양을 피하는 방법, 영화와 책 그리고 와인


7월 상순 서울 기온이 1908년 이래 37.1도라는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폭염이 몸을 지치게 하는데, 이번 주말은 더 덥다고 한다. 폭염과 폭우를 몇 차례 반복하며 이 여름은 지나갈 것이다. 그래도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시원하게 칠링한 스파클링이나 화이트 와인을 가장 맛있게 즐기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기도 하다. 멀리 떠나는 여름휴가보다는 집이나 가까운 호텔에서의 휴식이 더 필요한 이들에게 함께하면 좋을 영화와 책, 그리고 와인을 추천한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


“네 이름으로 날 불러 줘.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

-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2018년 개봉

사랑에 빠지기에 6주는 충분한 시간일까? 물론이다. 더구나 한여름 아름다운 이탈리아 북부의 햇살 가득한 별장에서라면.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제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여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 중 하나가 됐다. 작가 안드레 애치먼(Andre Aciman)의 소설 <그해, 여름 손님>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막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설렘과 충만한 육체의 기쁨을 탁월한 감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83년 어느 여름, 17살 소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와 부모님이 함께 머무는 별장에 24살의 대학원생 올리버(아미 해머)가 손님으로 방문한다. 엘리오와 올리버는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6주다. 6주가 지나면 그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 짧은 환희와 긴 이별… 이루어지지 못할 소년의 첫사랑은 더 애틋하게 반짝인다. 영화 속의 대사를 살피다 보면 문학과 음악 등 예술에 대한 레퍼런스가 상당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의 파편들>이라는 책이 등장하는데,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 만물은 고정되지 않고 늘 변한다는 의미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고 했다. 17살 소년 엘리오가 겪고 있는 첫사랑의 들뜸과 여름 별장의 목가적인 풍경은 생의 빛나는 어느 한순간일 것이다. 그렇지만 함께 수영하고 자전거를 타고 악기를 연주하고 사랑을 나눴던 소년의 그해 여름은 그 자체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벨라비스타, 알마 그랑 퀴베 로제 Bellavista, Alma Grande Cuvee Rose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저녁 식사 테이블 위에는 늘 와인이 함께했다. '이탈리아 북부 어딘가'라는 표현 외에 정확한 지명은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 초반에 올리버가 은행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 조언을 구할 때, 엘리오의 아버지는 “크레마로 가봐”라고 말한다.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에 위치한 크레마는 아마도 그들의 별장과 가까울 것이다. 롬바르디아주에서는 이탈리아의 샴페인이라고 불리는 스파클링 와인 '프란치아코르타(Franciacorta)'를 생산한다. 마을 이름이기도 한 프란치아코르타는 로마시대부터 포도를 재배해 중세시대 수도사들이 와인을 만들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에 벨라비스타가 있다. 1977년에 설립된 벨라비스타는 '아름다운 풍경'이란 의미에 걸맞게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알프스까지 보이는 전망을 갖춘 약 200헥타르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생산하는 모든 퀴베가 병입 숙성 최소 18개월을 훨씬 넘는 숙성기간을 거치기 때문에 독특하고 향기로운 아로마가 대표적인 특징이다. 알마 그랑 퀴베 로제는 살구, 복숭아 등의 리치 풍미가 가득하다.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살구나무에서 딴 과실을 입에 가득 베어 문 것처럼 매혹적인 풍미가 시원한 버블감과 함께 더위를 식혀줄 것이다.

 


비에 디 로만스 데씨미스 피노 그리지오 Vie di Romans Dessimis Pinot Grigio

여름이 되면 유독 더 생각나는 품종이 있다. 바로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주의 대표적인 화이트 품종, 피노 그리지오다. 무겁지 않은 바디감에 산도가 좋아 식전주로도 더할 나위 없는데, 특히 무더운 여름날 땀 흘린 후 충분히 차가워진 피노 그리지오를 시원하게 들이키면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비에 디 로만스 데씨미스 피노 그리지오'는 잘게 썬 복숭아, 딸기의 아로마와 크리미한 질감, 여운에서 장미꽃과 오렌지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균형 잡힌 화이트 와인이다. 비에 디 로만스는 이탈리아 북동부의 알프스 초입에 위치한 프리울리 이손조(Friuli Isonzo) 지역의 와이너리다. 1980년대 크뤼급 와인 피에레(Piere)를 출시하며 시장에 충격을 준 비에 디 로만스는 1990년대부터 모든 와인을 싱글 빈야드로 재구획하고 지역 최초로 '숙성된' 화이트 와인을 선보였다. 마시는 순간 기분 좋아지는 비에 디 로만스 데씨미스 피노 그리지오는 마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속 엘리오의 여름을 닮았다. 생의 찬가와도 같은 소년의 달콤한 여름밤을 닮은 와인 한 잔과 영화를 함께 즐겨보면 어떨까.



불리오니, 리파소 발폴리첼라 클라시코 수페리오레  Buglioni, Ripasso Valpolicella Classico Superiore

이탈리아 북부를 대표하는 와인 산지 중, 북동부에 위치한 베네토(Veneto)를 빠트릴 수 없다. 그중에서도 불리오니는 지속적인 투자와 열정으로 품격 높은 아마로네를 생산하는 와이너리로 정평이 나 있다. 그들은 복합적인 아마로네부터 단순하지만 좋은 품질의 발폴리첼라 클라시코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펙트럼의 토착 와인을 생산한다. 불리오니의 리파소 발폴리첼라는 전통적인 리파소 양조 방식에 따라 생산된다. 1월에 아마로네를 만들기 위해 건조한 풍미 깊은 포도를 착즙하고 껍질을 9월 갓 수확한 포도에서 얻은 발폴리첼라 와인과 다시 접촉해 2차 발효를 거친다. 체리나 딸기 등의 붉은 과실과 달콤한 향신료, 바닐라의 향이 조화로운 발폴리첼라 리파소는 이탈리아 북부의 가장 로맨틱한 와인 중 하나다. 벨벳 같은 질감까지 부드럽고 화사한 소년의 첫사랑과 닮았다.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


“이렇게라도 완주에 이를 수 있다면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고 바랐을 때 어떤 익숙한 손길이 열매의 팔을 잡고 가만히 흔들어 깨웠다.”

- 듣는 소설 <첫 여름, 완주> 김금희 작가, 2025년 출간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는 박정민 배우가 운영하는 출판사 무제의 시리즈, '듣는 소설'의 첫 번째 책이다. '듣는 소설'이란, 종이책이 출간된 후 오디오북이 만들어지는 기존의 제작 순서와 달리 오디오북을 먼저 만들고 종이책을 출간하는 것으로 차별성을 둔다. 오디오북은 전국의 장애인 도서관에서 먼저 공개하고 차후에 비장애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서점에 배본한다. 박정민 배우의 이러한 색다른 도전은 시각 장애인인 아버지를 위한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가 평소 존경하던 작가에게 취지를 밝히며 원고를 청탁했고, 김금희 작가가 흔쾌히 그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첫 여름, 완주>의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금희 작가는 이제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많은 문학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유의 감수성과 재치 넘치는 문장력은 이번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첫 여름, 완주>는 주인공 손열매가 완평군 완주 마을에 내려가 보내는 여름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떼인 돈을 찾기 위해 찾아간 그곳에서 열매는 마을의 여러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서서히 마음의 다정함을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눈을 감고 소설의 오디오북을 듣다 보면, 어릴 적 즐겼던 라디오 극장이 떠오른다. 고민시, 김도훈, 최양락, 염정아, 김의성, 박준면, 배성우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배우들이 열연을 펼친 오디오북은 듣는 재미가 상당하다. 종이책을 눈으로 쫓아가며 오디오북을 함께 들어보니,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다. 종이책의 디자인도 언급하고 싶다. 비디오 대여점이 익숙한 세대라면 책을 감싼 슬라이드 케이스가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모티프로 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치 직접 만든 팥 앙금과 얼음 알갱이가 오도독 씹히는 옛날 팥빙수 같은 맛이랄까? 자연 친화적인 레트로 감성이 여러모로 돋보이는 멋진 이야기다. 무더위도 잊게 될 만큼.



모비아, 푸로 Movia, Puro

소설 <첫 여름, 완주>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와인은 슬로베니아의 내추럴 와인 '모비아 푸로'였다.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으로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 모비아는 자연 친화적인 소설 속 가상공간 완주 마을과 닮았다. 1820년 크리스탄치치(Kristančič) 가족이 설립한 모비아는 슬로베니아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키며 가족 소유로 이어온 거의 유일한 와이너리다. 현 오너인 8대손 알레스 크리스탄치치(Aleš Kristančič)는 슬로베니아에서 오렌지 와인의 부흥을 일으킨 1세대 내추럴 와인 생산자 중 한 명이며, '달의 움직임과 자연의 흐름에 따라 와인을 탄생시키는 천재 와인 양조자'로 불린다. 모비아는 이탈리아 북동부 콜리오(Collio)와 슬로베니아 브르다(Brda) 지역의 국경선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지중해성 기후로 알프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브르다의 점토질 토양 덕분에 뛰어난 산도와 풍부한 아로마를 가진 고품질 포도가 생산된다. 특히 모비아를 세계에 알린 대표 와인, '모비아 푸로'는 샤르도네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으로, 100% 순수한 와인을 만들고자 무수히 시도한 끝에 맺은 노력의 결실이다. 병 입구를 아래로 세워서 보관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내추럴 스파클링 와인이며 물속에서 보틀을 오픈한다. 자신만의 방식과 이러한 독특함으로 모비아는 세계 와인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레인 소노마 코스트 로열 세인트 로버트 뀌베 피노 누아 Raen, Sonoma Coast Royal St. Robert Cuvée Pinot Noir  

<첫 여름, 완주>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을 한 명 꼽자면, 아마 '어저귀'일 것이다. 김금희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인물에 대해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근원적으로 인간문명이 가진 허술함과 불안함을 지적한 바 있다. 인류의 문명이 자연적 질서와 어긋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는, 우리가 지닌 원초적인 감각으로 생을 반복하고 있는 존재를 상상하며 인물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와인 양조자 중에서도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이가 있을까? 아마 와이너리 '레인(RAEN)'의 설립자 카를로 몬다비(Carlo Mondavi)와 단테 몬다비(Dante Mondavi)를 떠올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미국 와인의 전설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의 손자이자 컨티뉴엄(Continuum)의 팀 몬다비(Tim Mondavi)의 아들인 단테와 카를로는 1996년부터 포도 재배와 와인을 배우며 성장했다. 할아버지 아버지는 늘 그들에게 에너지와 영감의 원천이었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자연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찌감치 보고 느낀 덕분에, 이들은 '좋은 와인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키워내는 것(Fine wine is grown, not made.)' 이라는 철학으로 가장 자연에 가까운 와인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2013년 두 형제는 와이너리 레인을 설립한 후 포도밭을 유기농법, 생물역학농법, 재생농법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그들의 와인은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2023년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가 발표한 'Top 100 와인' 중 4위에 오른 '레인 소노마 코스트 로열 세인트 로버트 뀌베 피노 누아'는 테루아를 짐작케 하는 미네랄의 존재감과 타이트하며 단단한 타닌, 긴 피니시와 깊이를 보여주는 섬세한 와인이다.



휴먼셀러, 그랑제로 샤도네이 Human Cellars, A Los Granjeros Chardonnay

휴먼셀러는 미국 오리건에서도 손꼽히는 내추럴 와인 생산자다. 그들이 만든 그랑제로 샤도네이에는 '훌륭한 와인은 훌륭한 농부로부터 탄생한다'는 와이너리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있다. 내추럴 와인답게 라벨부터 눈길을 끄는데, 라벨에 사용된 일러스트는 아티스트 에밀리(Emily)가 색연필로 직접 작업한 작품으로, 각 인물의 외곽선을 하나의 이어진 선으로 표현했다. 이 일러스트에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과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세 명의 실제 농부들이 등장한다. 와이너리 측은 “이 농부들이야말로 자연을 존중하는 농업 철학으로 깊은 영감을 준 인물들”이라고 설명하며, 훌륭한 와인 뒤에는 늘 뛰어난 농부의 손길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 라벨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과 농업의 가치를 되새기는 상징이다. 핵과류의 아로마와 내추럴 오크에서 오는 바닐라 힌트. 마치 말보로 소비뇽 블랑 같은 신선한 과실향이 인상적인 그랑제로 샤도네이는 잘 익은 과실이 입안의 리치함을 더해주는 내추럴 와인이다. 내추럴 와인이지만 숙성 중 래킹(racking) 작업을 거치며 내추럴 특유의 향이 완화되고 크리스피한 피니시가 돋보인다. 편하게 즐기기에 좋다. 땅과 사람, 자연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휴먼셀러의 그랑제로 샤도네이를 즐기며 <첫 여름, 완주>의 이야기에 빠져보면 어떨까.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날개를 달고 이 여름을 더욱 빛내줄 것이다.

프로필이미지박예솔 객원기자

기자 페이지 바로가기

작성 2025.07.25 15:05수정 2025.07.28 10:09

Copyrights © 와인21닷컴 & 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 이벤트 전체보기

최신 뉴스 전체보기

  • 조지아인스타그램
  • 김수희광고지원
  • 2025 감베로 로쏘

이전

다음

뉴스레터
신청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