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스토리

와인 한 병에 담긴 '그르기치 힐스'의 전통과 혁신, 그리고 열정

높고 파란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이 슬며시 가을을 느끼게 하던 지난 10월 20일 오후,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Grgich Hills Estate)의 수출 매니저이자 가족경영 3세대인 마야 제라마즈(Maja Jeramaz)를 만나 그의 와인을 경험할 수 있었다. 도운 스페이스에서 열린 그르기치 힐스 프레스 세미나는 나파 밸리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그르기치 힐스의 양조 철학과 자부심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한국을 찾은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의 마야 제라마즈]


마이크 그르기치, 크로아티아 이민자에서 '샤도네이의 제왕'이 되기까지

2008년 미국 생산자 명예의 전당(Vintners Halls of Fame)에 이름을 올린 설립자 마이크 그르기치(Mike Grgich)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입지적 인물이다. 1923년 크로아티아의 한 포도 재배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와인 양조학을 배우며 와인메이커로서의 밑거름을 쌓았다. 양조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와 1976년 역사적인 '파리의 심판' 사건에서 유수의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샤또 몬텔레나 샤도네이(Chateau Montelena Chardonnay)를 만들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와인메이커로 등극했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크로아티아 이민자 그르기치의 몸값은 천문학적으로 올랐지만, 그는 유명세를 뒤로하고 가족 경영 와이너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장인정신을 바탕 삼은 자신의 양조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1977년, 대형 커피 사업체를 운영하는 오스틴 힐스(Austin Hills)와 파트너십을 맺고 그르기치 힐스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오스틴 힐스는 나파 밸리의 심장인 러더포드(Rutherford)에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와이너리에 투자할 수 있는 상당한 재력있 있었고, 마이크 그르기치는 뛰어난 양조기술과 경험이 있었기에 그르기치 힐스의 와인들은 초기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르기치가 예술작품을 만들듯 공을 들인 샤도네이는 '샤도네이의 제왕(King of Chardonnay)'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르기치 힐스가 전 세계 주요 만찬에 자주 등장하고, 와인 애호가는 물론 명사들에게까지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유럽의 전통, 미국의 개척과 혁신 정신, 그리고 나파 밸리의 열정이 한 병의 와인 속에 정직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 제공: 나라셀라]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만든 카베르네 소비뇽의 깊은 풍미

샤도네이로 명성이 자자한 그르기치 힐스이지만, 가을날의 꽃향기처럼 매력적인 풍미를 지닌 카베르네 소비뇽에 반한 이들 역시 많다. 그르기치 힐스의 카베르네 소비뇽은 전통적 양조 방식이 낳은 뛰어난 균형감과 복합적인 구조감으로 인해 이미 오래 전부터 애호가들의 추종을 받아왔다. 프랑스 유명 소믈리에들이 집필한 <전설의 100대 와인(100 Vins de Legende)>에서 전설적인 미국 와인으로 선정된 바 있는 그르기치 힐스의 카베르네 소비뇽은 우아함, 섬세함, 미묘함, 복합성이 절정에 달했다는 평을 얻은 바 있다.


그르기치는 이토록 뛰어난 와인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비결을 두고, 포도알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 포도의 당도를 알 수 있다며 자신은 그저 자연과 포도나무가 내는 소리에만 귀 기울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마이크 그르기치의 생전 모습, 제공: 나라셀라]


유기농법을 넘어 재생농업으로, 최고의 와인을 만든 철학 

2023년 12월, 마이크 그르기치는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그의 철학은 그르기치 힐스 와인에 담겨있다. 현재는 마이크의 딸, 바이올렛 그르기치(Violet Grgich)가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마이크의 조카 이보 제라마즈(Ivo Jeramaz)가 양조를 담당하고 있다. 프레스 세미나에서 와이너리의 철학과 비전을 들려준 마야는 이보 제라마즈의 딸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이보 역시, 마이크의 정신을 이어받아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 필요한 마법은 포도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는 일념으로 와인을 만들고 있다”라고 말하며, 그 일환으로 “20년째 재생 농업을 고수한다”고 전했다.


“바이오다이내믹 인증과 유기농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유기농법을 좀 더 발전시킨 재생 농업을 실천하고 있는데, 전 세계에서 약 20곳 정도의 와이너리만이 이를 유지할 정도로 그 자격을 인증받기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재생 농업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유기농 농법을 준수해야 한다. 두 번째 조건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토지를 개간하지 않는 것이다. 토양에 압력을 가하면 물이 포도나무 뿌리까지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좋은 배수를 위해 땅을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개간을 하면 탄소가 많이 배출되고 토양 미생물에도 악영향을 준다.


마야는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섭리를 따른다”고 말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2월이 되면 그르기치 와이너리는 다른 농장에서 양들을 빌려온다. 양들은 비료용이나 토양 보호용 식물인 커버 크롭(Cover Crop)을 먹고 배설하면서 토양에 양분을 공급한다. 또한 생물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꽃과 채소가 함께 자랄 수 있도록 돕는다. 해충 문제도 자연스럽게 관리한다. 부엉이나 새들을 유인해 해충을 잡아먹게 함으로써, 토양과 작물의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재생 농업의 마지막 단계는 바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마야는 “와이너리 직원들의 99%가 멕시코 출신”이라며, “외국인 노동자들의 역할이 나파 밸리 와이너리에서 핵심적이므로 그들이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과 대우를 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는 이 까다로운 재생 농업을 유지함으로써 에이커당 3,000~7,000달러 정도의 비용 절감 효과를 얻는다. 그들은 절감된 비용으로 더욱 좋은 와인을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


[그르기치 힐스의 카르네로스 빈야드, 제공: 나라셀라]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 나파 밸리 소비뇽 블랑 Grgich Hills Estate, Napa Valley Sauvignon Blanc (Fume Blanc) 2022

나파 밸리 남부의 매우 서늘한 카르네로스(Carneros)와 아메리칸 캐니언(American Canyon) 지역의 자가 소유 포도밭에서 재배한다. 와인은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6개월간 숙성하며, 신선하면서도 오크의 은은한 뉘앙스가 구조감을 더해준다. 소비뇽 블랑은 산도가 높아 자칫 날카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르기치 힐스의 소비뇽 블랑은 오크 숙성 덕분에 기분 좋은 부드러움을 경험할 수 있다. 마야는 “장기 숙성도 충분히 가능한 와인으로, 지금 마셔도 좋지만 10년 정도 숙성시켜도 매우 뛰어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2018년까지는 퓌메 블랑(Fumé Blanc)을 와인 레이블 상단에 명시했지만, 현재는 소비뇽 블랑을 상단에 표기한다. 이는 소비자들이 와인 품종을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바꾼 결정이다. 그럼에도 퓌메 블랑을 계속 표기하는 이유는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와의 우정과 관계가 있다. 소비뇽 블랑을 오크 숙성한 퓌메 블랑은 바로 와인메이커 로버트 몬다비로부터 시작됐으며, 마이크 그르기치와 로버트 몬다비는 깊은 우정을 나눈 사이다. 와이너리 역사와도 관계가 깊은 셈이다.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 나파 밸리 샤도네이 Grgich Hills Estate, Napa Valley Chardonnay 2022

소비뇽 블랑과 마찬가지로 샤도네이 역시 나파 밸리의 가장 서늘한 남단, 아메리칸 캐니언과 카르네로스 포도밭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다. 시원한 해양성 바람과 아침 안개가 포도의 숙성을 천천히 진행시켜, 복합적인 풍미를 형성하고 생동감 있으면서 자연스러운 산도를 유지하도록 돕는다. 마야는 “샤도네이는 그르기치 힐스의 플래그십 와인”이라며, “음식과 페어링이 좋은 샤도네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파 밸리의 샤도네이는 일반적으로 버터리한 스타일이 많은데, 그르기치 힐스의 샤도네이는 산도가 무척 좋고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르기치 힐스는 지향하는 와인 스타일을 위해 프렌치 오크만을 사용하며, 이 와인은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10개월간 숙성한다. 지금 마셔도 좋지만, 산도가 매우 좋아 앞으로 10~15년 정도 충분히 숙성 가능하다.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 나파 밸리 로제 Grgich Hills Estate, Napa Valley Rose 2022

2016년 빈티지부터 만들기 시작한 로제 와인이다. 프랑스 전통 세니에 방식으로 만들었으며, 압착하지 않은 적포도의 신선한 과즙만을 추출해 5~6주간 저온 발효시켜 향과 풍미를 극대화했다. 블렌딩 비율은 빈티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2022년 빈티지의 경우 카베르네 소비뇽 42%, 진판델 33%, 메를로 20%, 카베르네 프랑 4%, 소비뇽 블랑 1%을 블렌딩했다. 고품질 로제 와인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카베르네 소비뇽의 비율을 과감히 높였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022년 빈티지는 1,000케이스(12,000~15000병) 정도로 소량 생산해,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 미국 내에서 로제에 대한 평판이 매우 좋다고 한다. 다양한 음식과 매칭할 수 있으면서 편안하고 뛰어난 품질의 로제를 경험할 수 있다.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 나파 밸리 멀롯 Grgich Hills Estate, Napa Valley Merlot 2021

나파 밸리 남부, 샌프란시스코 만을 향해 펼쳐진 서늘한 포도밭에서 재배한 멀롯을 주로 사용하며, 기온이 조금 더 높은 포도밭의 멀롯도 함께 블렌딩해 복합미와 균형감을 갖춘 와인으로 완성했다. 20개월간 프렌치 오크통에서 숙성했으며 2021년 빈티지의 경우, 멀롯 81%, 카베르네 소비뇽 14%, 카베르네 프랑 4%, 쁘띠 베르도 1%를 블렌딩했다. 마야는 이 와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장 자주 마시는 와인”이라며, “음식과도 페어링이 좋고, 특히 소파에 앉아 편안하게 즐기는 와인으로 주로 마시고 있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Grgich Hills Estate, Napa Valley Cabernet Sauvignon 2020

나파 밸리의 손꼽히는 세부 산지인 욘트빌(Yontville)을 중심으로 러더포드, 칼리스토가(Calistoga)에서 재배한 포도를 사용해, 풀바디이면서 우아하고 순수한 과실미와 테루아의 캐릭터가 뚜렷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생산했다.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20개월간 숙성했으며 블렌딩 비율은 카베르네 소비뇽 85%, 멀롯 11%, 쁘띠 베르도 5%, 카베르네 프랑 1%다.

2020년 9월에는 나파 밸리에 큰 산불이 발생했다. 그들은 산불의 영향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2019년의 주스와 2020년의 주스를 전문적인 기관을 통해 검사했으며, 결과는 산불로 인한 영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야는 “빈야드의 포도 껍질이 두꺼워 포도 알맹이까지 연기가 침투하지 않은 것 같다”며, 어려운 빈티지임에도 뛰어난 퀄리티의 와인이 완성된 것에 감사함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 욘트빌 올드바인 카베르네 소비뇽 Grgich Hills Estate, Yountville Old Vine Cabernet Sauvignon 2019

욘트빌 올드바인 카베르네 소비뇽은 마이크 그르기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특별한 와인으로, 2020년 빈티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출시되지 않는다. 기존의 카베르네 소비뇽과는 다른 스타일로, 나파 밸리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1959년에 식재된 카베르네 소비뇽에서 양조한 와인이다. 반세기가 넘는 60여 년 동안 땅 깊숙이 뿌리를 내린 올드바인은 테루아의 깊이와 농축미, 복합미를 집중적으로 표현한다. 2019년 빈티지의 경우, 블렌딩 비율은 카베르네 소비뇽 86%, 쁘띠 베르도 8%, 카베르네 프랑 6%다. 와인이 가진 깊이와 부드러운 힘이 지난 세월을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는 2003년부터 100% 자가 소유 포도밭에서 생산한 포도로만 와인을 만들어 왔다. 따라서 2003년 이후 출시된 와인 레이블에는 'ESTATE' 표기가 명시되어 있다. 다른 곳에서 포도를 구매해 생산했을 때는 연간 생산량이 약 10만 케이스였으나, 현재는 6만~6만 5천 케이스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생산량은 줄었지만 품격은 더욱 높아졌다. 레이블에 적힌 'ESTATE'는 그들의 빛나는 유산을 설명해주는 듯하다.

프로필이미지박예솔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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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5.10.30 09:00수정 2025.11.0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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