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해의 끝은 곧 새로운 해의 시작이니, 해가 바뀌어도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듭'은 중요하다. 지난 1년을 돌아보고 기억해야 할 순간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이맘때, 와인21 기자들은 각자의 '올해의 와인'을 선정했다.
2025년에도 수많은 와인을 시음하고 생산자들을 만났기에 단 하나의 와인을 고르는 일은 모두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해의 와인 라이프를 찬찬히 되돌아보는 과정이었고,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기자들이 선택한 와인들 속에서 올해 자주 등장한 '흐름'과 '이슈'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스파클링 와인의 성장세와 새롭게 주목받는 산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2025년 의미 있는 기념 해를 맞은 생산자의 와인도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총 11명의 와인21 기자가 선정한 2025년 올해의 와인을 공개한다.

김상미 칼럼니스트
샤토 드 보카스텔 Chateau de Beaucastel 2009
몇 해 전 우연한 기회에 샤토 드 보카스텔 2009년 빈티지를 운 좋게 구했다. 좀 더 숙성해 마시고자 꾹 참았다 드디어 올해 초 오픈했다.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미가 가득한 맛이 내게 큰 감동을 선물해주었다.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du-Pape)는 다양한 스타일로 생산된다. 포도 블렌딩 비율을 보면 무르베드르가 많은 와인이 있는데 샤토 드 보카스텔이 바로 그런 스타일이다. 무르베드르 비율이 높으면 숙성시킬수록 복합미가 증대되니, 가끔은 무르베드르가 많은 샤토네프 뒤 파프를 사서 묵혀두자. 기념하고 싶은 날 연다면 특별한 분위기를 한층 더 아름답게 장식해줄 것이다.

김성정 객원기자
샤토 호산나 Chateau Hosanna 2022
올 한 해 정말 뛰어난 와인들을 많이 만났지만 올해의 와인으로는 샤토 호산나 2022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겹겹이 피어오르는 향과 복합미, 섬세함이 유독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크리스티앙 무엑스(Christian Moueix)가 그의 부인 셰리즈(Cherise)와 함께 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감상을 나눴던 순간이 더없이 특별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이 빈티지의 우아함에 대해 극찬했고, 앞으로 시간이 만들어낼 잠재력에 대해 같은 기대를 품었다. 영하로 내려가는 겨울밤, 따뜻한 집 안에서 몸을 녹이며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와인.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몇 년 후 다시 열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김윤석 기자
돈 멜초 김환기 아트 에디션 Don Melchor Kim Whannki Art Edition 2021
박스를 열면 병풍처럼 펼쳐지는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압도적이다. 레이블과 박스의 작품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충분한데, 와인 또한 2024년 <와인 스펙테이터> 'Top 100'에서 영예의 1위에 올랐다. 눈도 황홀한데 코에서도, 입에서도 얼마나 환상적이던지.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나 탐낼 수밖에 없는 와인이다. 자린고비의 굴비는 무용지물이지만, 돈 멜초 2021 김환기 아트 에디션은 맛도, 품격도, 소장가치도 확실하다.

김태형 객원기자
도멘 라로쉬, 샤블리 프리미에 크뤼 푸르숌므 Domaine Laroche, Chablis 1er Cru Fourchaume 2008
지난 프랑스 출장 당시, 마레 지구 인근 오래된 식료품점(Épicerie)으로 홀리듯 들어갔다. 선반의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 와인에게 손이 뻗쳤다. 계절이 기억의 다발을 당기는 순간이 있다. 찬바람이 코끝을 스칠 무렵이면 문득 스치는 이름, 샤블리. 셀러 한구석에서 제 시간을 기다려온 와인을 첫눈이 내리던 밤 비로소 꺼내 들었다. 반짝이는 눈송이, 그 위로 피어나는 짙은 향기. 파리의 낡은 상점이 아니더라도 그 눈덮임이 당신의 잔에도 닿기를.

박예솔 객원기자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 나파 밸리 샤도네이 Grgich Hills Estate, Napa Valley Chardonnay 2022
'샤도네이의 제왕'으로 불리는 전설적인 와인메이커, 마이크 그르기치(Mike Grgich)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서 그르기치 힐스의 와인을 경험해 보진 못했다. 지난 가을, 도운 스페이스에서 열린 그르기치 힐스 프레스 세미나 덕분에 아주 근사한 샤도네이를 만날 수 있었다. 나파 밸리의 샤도네이는 버터리한 스타일이 많지만, 이 와인은 산도가 아주 좋고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라 음식과의 페어링 폭이 넓다. 마시는 순간, 바로 명성이 납득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와인이다. 복합적인 풍미가 앞으로 또 어떻게 변모할지 궁금하다. 몇 년 후, 2022년 빈티지를 다시 경험해보고 싶다.

안미영 편집장
나이팀버, 클래식 퀴베 Nyetimber, Classic Cuvee
올해 가장 반가웠던 와인이다. 오래전 런던에서 마신 경험이 있는데, 이번에 한국 론칭 행사에서 다시 만나며 가장 기본급 와인부터 놀라울 정도로 높은 품질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굳이 샴페인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스파클링 와인이다. 영국 스파클링 와인의 성장은 기후변화라는 환경적 요인뿐 아니라, 생산자의 역량과 축적된 노하우가 함께 작용한 결과다. 영국 빈야드에 최초로 샴페인 품종을 식재하고, 자체 빈야드의 포도만 사용하며, 일찌감치 싱글 빈야드와 프레스티지 퀴베를 선보여 명확한 정체성을 구축해온 나이팀버의 선구안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다.

엄경은 객원기자
웬티, 리바 랜치 샤도네이 Wente, Riva Ranch Pinot Noir 2019
캘리포니아에 살면서도 늘 'Anything but Californian oaky Chardonnay'라는 취향을 고수해 왔다. 열대과일 풍미와 강한 오크가 중심이 되는 스타일을 평소에는 거의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즐겨 가던 핫팟 식당에서 선택지가 거의 없다는 이유로 가볍게 주문했던 이 와인이 뜻밖의 깨달음을 주었다. 펄펄 끓는 국물과 마라 소스로 뜨겁게 달아오른 혀에 이 샤도네이가 닿는 순간, 후비강 깊숙이 묵직한 과실과 오크 풍미가 두세 배로 증폭됐다. 이 와인이 이렇게 매력적이었나. 무엇보다 입안이 따뜻해지자 부드러운 산도가 한층 더 편안하고 조화롭게 다가왔다. 진하고 뜨거운 국물을 먹을 때 으레 높은 산도의 스파클링이나 화이트 와인을 매칭하곤 선뜻 잔에 손이 가지 않았던 과거의 경험이 스쳐 지나가며, 나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렸다. 높은 산도와 뜨거운 혀는 좋은 조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날 이후 나는 뜨거운 국물 요리가 메인일 때는 캘리포니아 샤도네이나 진판델과 같은 와인을 즐겨 매칭하게 되었다.

유민준 기자
메종 샹피 부르고뉴 샤르도네 뀌베 에드메 Maison Champy Bourgogne Chardonnay Cuvee Edme 2022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운 부르고뉴 와인은 라벨에 '부르고뉴 사르도네' 혹은 '부르고뉴 피노 누아'라고 적혀 있는 와인이다. 그랑 크뤼나 프리미에 크뤼 밭 이름이 명시된 와인은 그 와인의 특성과 수준을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단순히 '부르고뉴'라는 이름 아래에는 수만 가지의 스타일과 품질의 와인이 공존한다. 부르고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메종 샹피의 기본급 샤르도네인 이 와인은 사실 와인메이커 디미트리 바자스(Dimitri Bazas)의 시그니처 와인이다. 퓔리니, 뫼르소, 룰리의 샤르도네를 블렌딩했기 때문에 '부르고뉴 샤르도네'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다. 맛과 향 모두 놀라워 진지하게 테이스팅을 해야 하는 와인이다. 그럼에도 가격은 '부르고뉴 사르도네' 수준이다. 일반적인 와인 애호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와인은 결국 이런 와인이 아닐까? 올해의 와인으로 선정하기에 손색이 없는, 멋진 와인이다.

정선경 객원기자
샴페인 에글리 우리에, 밀레짐 Champagne Egly-Ouriet, Millesime 2013
올봄, 에글리 우리에의 밀레짐 샴페인을 처음으로 마셔봤다.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샴페인 하우스였고 마셔본 경험이 없었는데 첫 모금을 맛보고는 이내 충격에 빠졌다. 그간 샴페인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묘한 향, 샴페인이 이렇게까지 깊고 복합적인 맛을 낼 수 있다니! 마시고 나서야 이 샴페인이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을 받았다는 것과 그에 상응해 가격 또한 천정부지로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코 '내돈내산'으로 다시 마셔보긴 어렵겠지만 평생 잊지 못할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

정수지 기자
앙리 지로 아르곤 Henri Giraud Argonne 2016
오랜 시간 사랑해온 샴페인이지만, 2025년은 앙리 지로가 600주년을 맞는 해라는 점에서 아르곤 2016을 다시 마신 순간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잔에서 말린 감귤과 화이트 트러플, 미네랄과 짠맛이 켜켜이 겹쳐지며 '시간이 축적된 와인'이 무엇인지 다시 실감하게 했다. 잔이 비워질수록 스모키한 풍미와 기품 있는 여운이 길게 이어졌고, 한 해를 마무리하며 곱씹기에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정휘웅 칼럼니스트
발리, 벤녹번 빈야드 피노 누아 Valli Bannockburn Vineyard Pinot Noir 2022
뉴질랜드 피노 누아의 발전 속도가 기대 이상으로 빠르다는 인상을 남기는 와인이다.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숙성 잠재력과 개성이 모두 느껴진다. 매우 단단하지만 유연함도 잘 품고 있다. 유럽과 미국산 피노 누아의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언제나 대체재에 대한 갈증이 클 수밖에 없는데 뉴질랜드 피노 누아, 특히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 지역은 그 대체제로 서서히 부상 중이란 점에서 특별한 경험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묵직하고 깊이 있는 와인으로, 뉴질랜드보다는 부르고뉴 스타일이다. 제대로 즐겨려면 1시간가량 브리딩을 권하며, 이후에는 산미와 함께 약간의 단 느낌도 전달된다. 피니시가 길고 집중력도 상당하다. 약간 차게 시작한 뒤 서서히 온도를 올리며 마시는 것이 좋은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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