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해외뉴스

삼합과 와인?

삼합과 와인?

오랜만에 집사람과 양재동 농협 ‘하나로마트’로 장보러 갔다.

일요일 오후 4시인데 얼마나 붐비던지 나처럼 뚱뚱한 사람은 비집고 돌아다니기 조차 힘들다. 거기다 1분이 멀다 하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반짝세일 방송은 그 많은 사람들의 진행 방향을 흔들어 놓아 아비규환이 따로 없네.

필요한 것들을 사고 나서 우리도 세일방송이 나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들 아직 살만 한 가 보다. 세일을 해도 엄청 비싼 한우고기를 장바구니 가득 쌓아간다. 그 모습을 보니, 우리도 뭔가 사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이 인다.

물 좋고 꽤 커 보이는 제주 먹갈치 3 마리에 단 돈 만원 -인파를 뚫고 들어가 사는데 성공.
중짜 생태 3마리에 5,400원 – 그저께 서울와인엑스포 ‘마세토’ 줄에 서서 와인이 동이 날 까봐 초조해 하던 생각이 나네 - 결국 성공.
아주 굵고 큰 대하 6 마리에 30,000원 – 집사람 왈 “당신이 와인을 포기하면 애들한테 저런 거 맘 놓고 사다 먹일 텐데…” – 못들은 척하고 계속 앞으로 전진.
엄청 부드러워 보이고 색깔이 고운 돼지사태, “싸다!” 간만에 고기 좀 먹자고 우겨서 2kg 구매 – 못 믿겠지만, 우리 네 식구에게는 고기 2kg 정도는 한끼 식사량이다.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네 글자가 발을 붙잡았다. –‘삭힌 홍어’ 300g에 14,000원
‘돼지고기 수육 + 삭힌 홍어 + 묵은 김치 = 삼합(三合)’의 공식이 머리를 때렸다.
본인이나 아이들도 못 먹는 거라고 절대 반대하는 집사람의 원성을 뒤로하고 한 팩 집어 들고 계산대로 튀었다. ㅎㅎㅎ 계산대의 긴 줄에 서서 집사람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내 생각은 ‘삼합에 맞는 와인은?’하며 나의 와인저장고(Vertical Show Case 개조한 것) 안에 보관된 와인들을 마음 속으로 하나하나 들추어 보고 있었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장이라는 특권을 십분 이용하여 결국 오늘 저녁의 하이라이트는 ‘삼합’으로 낙착. 방송에서는 여러 번 보았는데 아직까지 전문 식당을 찾지 못해 못 먹어 보았던 별미를 오늘 드디어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돼지고기 수육과 삭힌 홍어는 완벽해 보이지만 김치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공장김치인데다가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다. 아이들과 집사람은 벌써 홍어 냄새에 코를 붙잡고 있다. 절대 먹지 않겠다는 투다. ‘수육을 제외한 김치, 삭힌 홍어 그리고 와인 모두 발효 음식이다. 어쩌면 잘 맞을 수도 있겠다!’하고 밀어 부쳤다.

CHATEAU BLASON D''ISSAN 1999의 맛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어떤 분이 불평하신 기억이 났다. 오늘은 삼합의 파트너로 이 놈을 간택하기로 마음 먹고 개봉을 해보니 콜크에 넘친 흔적이 비친다. 다른 분들의 품평에 의한 선입견 때문인가? Tasting 해보니 향에서 희미하게 화학약품 냄새가 나는 가 싶고 입안에서 분말이 섞인 듯한 느낌과 시큼한 기분이 약하게 느껴졌지만 이미 집안에 진동하고 하고 있는 홍어 냄새 때문인지 뭐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들다.

김치 한 쪽에 수육 한 점 올리고 삭힌 홍어 한 점을 올려 한 입 가득 넣고 씹기 시작했다.



아! 이 오묘한 맛이란.

삭힌 홍어의 역한 냄새와 맛은 어디로 가고 없고 부드러운 수육의 고소한 맛에 속까지 시원해지는 삭힌 홍어의 효과만 남아 김치와 함께 기가 막힌 맛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시 말해 세가지 음식의 각자의 맛은 숨고 새로운 맛이 나타난 것이다. 혹시 홍어가 제대로 삭지 않아 그런가 하고 홍어만 따로 먹어 봤는데 꽤 많이 진행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와인이다. CHATEAU BLASON D''ISSAN 1999이 과연 어울릴 것인가?

입안에 삼합의 잔량이 좀 남아있는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와인잔을 코로 가져갔다. 이상하게 과일향 이외에는 느껴지는 향이 없다. 좀 더 코를 잔 안으로 깊게 넣고 맡았더니 아까 보다는 복잡한 보르도의 기분이 느껴진다. 아주 작은 양을 입술에 살짝 묻히고 동태를 살펴 보았다. 심하게 역한 현상이 있을 까봐 걱정했는데 아직 괜찮다. 가볍게 한 입 물었다.

…… 놀랍다. 삼합과 만난 CHATEAU BLASON D''ISSAN 1999은 다른 잡맛은 모두 없어지고 풍부한 과일향과 맛을 내고 있다. 게다가 아까 따로 tasting할 때 느꼈던 분말이 섞인 듯한 기분은 전혀 없이 아주 매끄러운 와인으로 변했다. 가장 중요한 Finish 또한 완전히 익지 않은 김치에서 나오는 산도가 도움을 주기 때문인지 깔끔한 뒷 맛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집사람도 감탄사를 연발한다. 와인과 음식을 같이 한 여러 경험 중에서 이렇게 와인이 맛있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란다. 혹시 삼합이 너무 괴로운 맛을 내어서 와인이 반대로 너무 맛있게 느껴지는 것 아니냐는 내 질문에 집사람은 삼합을 한 입 크게 넣고 정말 맛 있게 먹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강한 향을 내는 발효음식 두 가지(삭인 홍어, 김치) 때문에 와인의 맛을 제대로 못 느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 강한 삭힌 홍어의 향과 맛도 삼합의 상태에서는 크게 부드러워져 기분 좋고 맛 좋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을 고려하면, 와인 또한 그들의 시너지 효과에 편승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신기하다고 느낀 작은 녀석이 해물탕의 새우와 CHATEAU BLASON D''ISSAN 1999의 조화를 시도해 본다. 그 녀석 얼굴을 찡그리더니 ‘아이구, 너무 비려!’ 해물탕의 새우와는 부딪힌다.
삭인 홍어와 와인만의 조화는 삭인 홍어의 강렬한 향과 맛 때문에 도무지 와인 맛을 모르겠다.

삼합의 정석대로 묵은 김치를 같이하게 되면 또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집 식의 삼합과 CHATEAU BLASON D''ISSAN 1999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조화이다. 물론 극구 반대했던 집사람도 2kg의 돼지고기 수육, 300g의 삭인 홍어, 김치 한 포기를 와인 한 병과 함께 해치우는데 크게 일조하였고, 맛있는 묵은 김치를 구해서 다시 한 번 시도하자고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CHATEAU BLASON D''ISSAN 1999 MARGAUX는 1998산을 하도 맛있게 마신 기억이 있어서 구매하게 되었는데 운송상의 문제였는지 상태가 그래서 정말 아쉬웠지만, 이번에 가족들과의 저녁식사를 더욱 즐겁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내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프로필이미지

기자 페이지 바로가기

작성 2003.04.10 00:00수정 2003.04.10 00:00

Copyrights © 와인21닷컴 & 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25 감베로 로쏘
  • 조지아인스타그램
  • 김수희광고지원
  • 2025 조지아 와인 시음회

이전

다음

뉴스레터
신청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