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무명씨 입니다. 지난 주말 신규사업계획 구상을 핑계로 다녀온 상춘여행의 느낌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전 일년 중 이맘때를 가장 좋아합니다. 하사한 봄꽃들이 그 자태를 자랑하며 온 산과 들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이고, 나무들이 지난 겨울의 인고를 벗어 버리고 신선한 푸르름으로 옷을 갈아 입을 때를 말입니다. 우리 산하가 정말 사랑스럽더군요. 하지만 곳곳에 남아 있는 산불의 상흔이 못내 가슴 한 구석을 답답하게 했답니다.
저한텐 아주 오래된 친구가 있습니다.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서로의 대소사를 챙기고 사심없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정말 오래된 와인처럼 좋은 친구지요.
사실 이 친구와는 10년 전 대학로의 어느 호프집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저는 3학기 째를 다니며 용산에 샵을 오픈한지 만 1년이 되어 있었고, 저보다도 더 늦게 학교에 들어 온 친구들을 축하하느라 생맥주를 들이 붇고 있었지요.
아~, 그러고 보니 이맘때였군요. 기억이 납니다. 코끝을 스치던 라일락 향내가....
고향 친구 중 한놈이 좋은 후배를 소개에 준다며 불러낸 것이 그 아이 였습니다. 출입문을열고 들어선 그녀를 처음 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흰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자켓, 그리고 청바지를 걸친 단아한 모습이 얼마나 이뻐보였는지. 전 그때만 해도 아주 손진한 총각이었거든요. 한창 잘나가던 사업체 때문에 일주일에 이틀 있던 수업을 제외하고는 대만, 미국, 유럽, 일본 등지를 정신없이 다니느라 대학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흔한 미팅은 커녕 동기들 이름조차 못 외우고 있었고, 이민간 첫 사랑의 결혼 소식에 시린 가슴 달래며 가끔 쓴 소주잔을 혼자 기울이던 때였답니다.
그런 부산촌놈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지요. 그날 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너무 흥분(?)해서 그만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맥주에 취해버렸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일이지만 그때는 꽤 심각 했어요. 밤이면 밤마다 떠오르는 그 아이 모습에 잠 못이룬 적이 하루이틀이 아니었고, 큰 결심하고 찾아간 하숙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고급차에서 늘씬하게 잘생긴 놈들의 배웅을 받으며 내리는 모습에 낙심하여 돌아서기를 몇번. 바쁜 회사일에 쫓겨 차츰 찾는 일이 드물어지고, 어느날인가의 전화통화에서 분명한 거절 의사를 전해들었을 때는 더 이상 절망할 힘도 남아 있질 않았드랬습니다.
그 뒤론 가끔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아니면 저희 집 파티 때, 여러 경로를 통해 듣는 근황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요. 그러면서 세월이 흘렀어요. 전 그동안 끝없이 성장하던 사업체가 외우내환으로 인하여 갑자기 파산하여 졸지에 오갈데 없는 파산자 신세가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며 재기의 노력을 했고, 그 아인 어느덧 졸업을 하여 직장생활을 여지껏 하고 있답니다.
지금은 도대체 어떤 사이길레 이렇게 서론이 기냐구요? 글쎄요. 그건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지요. 지금부터가 이번 여행에 얽힌 얘기 입니다.
"오빠다. 잘 지내니?"
"어머, 네, 오빠! 어쩐 일이세요?"
"너 이번에 생일이잖아? 못난 오빠가 선물이나 하게. 며칠이지?"
"4월30일이요. 근데 뭐 사줄껀데요?"
"글쎄, 너 샴페인 좋아하잖니. Dom Perrignon을 살 테니, 시간이나 좀 내라"
"어머, 정말!? 근데 어쩌나 친구가 동해로 여행가자고 하던데....."
"그래? 그럼 사무실로 보낼 테니 친구랑 바다 보면서 마셔!"
"그래도 돼요? 오빠한테 너무 미안 하잖아."
"임마! 미안하긴 뭘. 갔다와서 얼굴이나 한번 보여주라. 이거 이렇게 뵙기 힘드니 원..."
"네. 알겠어요"
"생일 축하한다. Welcome to 30|s Club. 혹시 변동 사항 있으면 연락 주고. 전화 끊으마"
"감사합니다."
- 메일 I -
그리운 오빠,
돔 페리뇽? 우와~ 멋진데!!!
어떤 친구가 동해로 여행가자고 하던데...우짤까?
후후.
4월 마직막 날(30일)이 내 생일이야....
꼭 안챙겨도 돼.
그냥...맘만으로도 고맙군.
토욜날, 새벽 3시? 4시? 까지 술 마셨는데...사실, 3살이나 어린 소년이었거든.
근데, 내 비극은 그 사람이 너무 근사한데,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던 거야....
차라리, 오빠랑 담원 갔었으면...술 먹고도 괜시리 월요일인 오늘까지 기분이 나쁘구나..후후.
선생님 어찌 지내는 지 사실 많이 궁금하고, 털보 아저씨도 건재한 지 궁금해...
오빠,
우리 오빠.
고마워, 소식 전해줘서....
소주 한 병 마신 OO이가.... :)
- 메일 II -
동해로 여행가서 마시는 건 어떨까?
주책이지?!
아무튼 살아있어 소식 들으니 다행이군!
사실은 너무 반갑구!
술은 마시는 건 좋은데, 사람은 가려라~~
주중에 시간 괜찮은 날을 잡으렴. 같이 샤르도네나 한잔하게!
"오빠! 나야"
"엉, 왠일이냐 니가 전화를 다하고"
"근데, 오빠 진짜 동해로 갈 수 있어?"
"까짓거, 못갈 것도 없지"
- 사실 전 준비하던 신규사업부문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투자자들의 압력을 피해 어디라도 달아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거든요.
"난 토,일,월이 시간이 되는데 오빤 어때?"
"글쎄. 일정을 확인 해 봐야 하겠지만, 금요일 밤에 출발해 일요일날 돌아 오는 것이 어떨까?"
"괜찮은데, 그럼 난 뭘 준비하면 되지"
"그냥 약간의 cash만 준비해라,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알았어. 고마워!"
"19:30분에 Pickup 하마. 별다른 일 있으면 전화해라. 끊는다."
그리곤 열심히 남은 업무를 진행 하고는 와인을 사러 갔죠.
* 와인리스트 *
CHATEAU MOUTON-ROTHSCHIELD, 1993, PAUILLIAC.
- 조심하세요. 이놈의 무거움은 여러분은 죽음으로도 이끌 수 있답니다.
CHATEAU HAUT BRION, 1993, GRAVE.
- 혹시 마법을 믿으십니까? 주문에 걸린 CARBERNET SAUVIGNON을 마시면 영원히 그 마법에서 헤어 나질 못할 겁니다.
DOM PERRIGNON, 1992, MOET ET SANGDON
- 샴페인 속에는 몇 개의 거품이 있는 지 아시는 분? 알던 모르던 관계 없습니다. 뻬르뇽 한잔이면 모든 근심 걱정이 우주 저편으로 사라져 버릴테네까요. 백만개 거품들의 축복을!
네, 맞습니다. 무리했지요. 지난 연말 이후의 쇼핑 리스트 중 가장 과다한 지출을 했답니다. 그래도 즐거웠어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준비였거든요. 사실 지난 몇 년동안 휴가때 한번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고, 심지어 설날이나 추석날도 출장을 가는 일이 허다하여, 이런 게릴라식의 억지 휴식이 아니고는 재충전의 기회를 갖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제게 주어진 기회를 소중히 활용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건방지게 보였다면 용서하세요.
아무튼 저녁 무렵 그 아이를 집 앞에서 태우곤 고속도로를 탔습니다. 규정 속도 지켜가며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아뿔사! 글쎄 이 친구가 지갑을 놓고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전 과도한 쇼핑 탓에 현금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예약한 호텔을 가기전에 현금서비스기를 찾아 헤매다가 나무 피곤해 그냥 어떻게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호텔로 향했습니다. 다행이 주머니를 뒤져보니 숙박비를 거의 맞출 수 있었구요.
"안 피곤하니? 그냥 잘까!"
"오빠, 뭐 사왔는데?" <-오는 내내 잤거든요.
"응, 이거, 저거, 그거"
"WOW, 우리 한 병만 먹고 자면 안될까? 내가 브리에랑 과일이랑 좀 갖고 왔거든."
"괜찮겠어? 그래 그러지 뭐, 차에 가서 잔이랑 챙겨 올 테니 대충 준비해라"
차 트렁크에서 잔과 와인을 꺼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며칠전 사두었던 CaliforniaRose Sparkling도 함께 꺼냈습니다. 또 가지러 오기 싫어서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결국 두번째 스파클링까지 비우게 되었고, 어느덧 취하더군요.
뽀이악은 절대 빈 속에 혹은 피곤할 때 드시지 마세요. 사람 잡습니다. 제가 그래도10년 구력은 가진 놈인데, 까짓 와인 한병에 그렇게 망가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물론 달콤한 로제의 향기가 사태를 더 악화 시키긴 했지만요. 안씻고 그냥 자겠다는놈을 등 떠밀어 욕실로 들여 보내 놓고는 엉망이 된 식탁을 정리하고 잔을 깨끗이 씻어 - 이거 정말 중요합니다. 드신 와인 잔은 주무시기 전에 꼭 씻어 물기를 제거 한 뒤 보관 하십시오. 비싼 잔일수록 뒷처리가 늦어지면 세월만큼 그 자국이 잔에 남는답니다. - 케이스에다 넣어 두고는 대충 씻고는 잠자리를 보는데, 아 글쎄 이놈이 막무가네로 같이 자자는 겁니다. 어허 이런 일이. 맨 정신에도 통제하기 힘들만큼 출중한 외모를 가진 친구가, 서로 거의 맛이 간 상태에서 그러니 이건 정말 난감하데요. 제어가 안되잖아요, 제어가. 그래서 절충안을 냈지요
"그래 알았다. 대신 넌 침대에서 자라. 난 밑에 자리 펴고 잘 테니, 난 침대에선 못자!!"
이렇게 엄포(?)를 놓고는 억지로 잠을 청하려는데, 옆에서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귓가에 입김이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긴장 되데요. 술취한 여성 때문에 긴장하긴 살다살다 처음 이었습니다.
"오빠, 자?!" <- 반쯤 꼬부라진 목소리로
"..."
"그럼, 안 괴롭힐 테니, 나 Good Night Kiss 해주라. 그럼 얌전히 옆에서 잘게"
|에라, 모르겠다|
후다닥, 덥썩~~~.
독한 와인 때문이었는지, 달콤한 키스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길었던 좋은밤 키스 뒤에 바로 꿈나라로 가더군요. 다행이도 그날 밤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구요.
아참, 여러분들 소중한 이와의 친밀한 순간이 기대되는 자리에서는 주저하지 마시고좋은 와인을 드세요. 그것이 왜 길어 졌냐면은 전 그 아이의 입술에서 와인을 느꼈답니다. 성숙한 여인의 향기와 함께 온 몸의 감각을 자극하는 그 맛의 정체는 바로 다름아닌 여인의 몸에서 다시 태어난 무통 로쉴드 였습니다. 전 되도록 오랫동안 그맛을 음미하고 싶었구요. 그날밤 전 정말 단잠을 잤습니다. 천국의 꿈을 꾼 것 같기도 해요.
다음날 아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서는 씻고 방 치우고는 길을 나섰습니다.그 친구는 바다를, 전 산을 보고 싶어 간성의 통일전망대서부터 남쪽으로 쭉 내려 오기로 했습니다.
7번 국도는 정말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허락하신 걸작품 중의 하납니다. 동의 하시죠?비록 하절기를 제외하고는 접근이 용의하지 않은 해변이, 철조망에 둘러싸인 불쌍한해변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너머에 넘실 되며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가 모든 시름을 잊게 해주더군요. 이름없는 해변에 쭈그리고 앉아 아무말 없이 눈을 감고 바다의 소리를 들었답니다. 그 친구에게서 인생의 무게가 그 중압감이, 그리고 외로움의 깊이가 느껴지더군요.
고성에서 막국수를, 낙산에서 생태찌게를, 강릉시내에서 강원도식 한정식을 먹었어요. 먹고 즐기자고 온 여행인데 굳이 이것저것 가릴 것은 없었지요. 7번도로를 오르락 내리락 하며 하루 더 머무를 곳을 찾던 중 해변도 개방 되어 있고 인적도 드문 곳에 여장을 풀었지요. 호텔프론트에서 제일 큰방을 달라고 하여 장비(?) 챙겨 들고는 방에 들어 섰습니다. 별로 크진 않았어요. 하지만 둘만의 파티 장소로는 딱 이었구요. 그밤의 시놉시스는 이랬답니다. 양초를 준비하고 오브리옹과 프와그라를 곁들인 바게트를 들고 해변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전야제(?)의 시작을 축하하고, 방에돌아와서 샴페인을 딴다. 그 이후는 아무도 몰랐죠.
그날밤은 시작부터 좀 꼬이기 시작했어요. 해변에서 마땅한 자리를 잡고 시작을 하려는 순간, 그놈의 탐조등 불빛이 집중적으로 저희를 비추는 거예요. 군대를 갖다온지가 오래되어 일조시간 이후 해변 출입은 금지된다는 걸 잊었던 것이죠. 아무튼 그조명발을 받구서도. 오브리옹을 두잔이나 비우고서야 일어 났어요. 조금만 늦었으면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중무장한 병사들과 조우 할뻔 했지요. 해변을 막 벗어나는데 한무리의 순찰대가 우리쪽으로 오는 것이 보이더라구요. 얼른 호텔로 돌아갔죠. 뭐,겁날 건 없는데 귀찮으니까~~~~
방에 올라가서 머리를 싸맷습니다. 그 곳을 정한 이유가 "해변가에서의 한 잔"이라는 컨셉 때문이었거든요.
"불을 다 끄고 촛불만 키면 바다가 보이지 않을까?"<-이거 큰일 날 콘티 아닙니까?
"그래 그러자. 그럼 케익은 언제 먹지?"
"바보야, 12시 지나서 하면 되잖아"
"오빠, 이 그라브는 어제 뽀이악 보다 훨씬 부드러운 것 같애. 배가 불러서 그런가?"
"그게 아니고, 본래 뽀이악이 좀 독해, 알코올 돗수도 조금 더 있고. 향수로 지면 쁘아종과 샤넬NO.5 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같은 보르도인데 너무 맛의 느낌이 틀리다."
"그건 지롱드강 서안과 동안의 테르와가 틀리기 때문이지, 한쪽은 석회질의 마른 땅이 다른 쪽은 진흙이 그 구성의 대부분을 이루거든. 거기에서 같은 카버네나 멜로를 심어도 틀린 맛의 와인이 생산되는 이유가 있지."
.............
좋은 와인으로 인한 기분 좋은 취기가 오르는 많큼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로의연애담, Single로서 사는 것의 장,단점, 그리고 필요 충분 조건. 왜 정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면 가슴이 그렇게 뛰어데는 지까지, 대화 주제의 한계는 없었죠.
그러다 시간이 되어 케익을 자르고는 축하를 했죠. |이제까지가 연습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실전이다. 30대 파이팅!| 이라며 어설픈 자축도 빼먹진 않았죠.
드디어 돔 뻬르뇽을 오픈할 순간이 왔습니다. 그전에 마셨던 오브리옹도 최상급 와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오늘의 하일라이트는 억만개 거품의 축복이었거든요. 조심스럽게 캡을 제거하고, 철망을 벗긴 뒤 오른손 엄지로 콜크를 감싸쥐고 왼손으로 병을시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돌리기 시작 했습니다. 병속의 단 하나의 거품도 그냥 헛되이 버리는 일을 없을 것이라는 굳은 다짐을 하며 말입니다. 드디어 |피식|하는 소리아 함께 콜크가 빠져나왔고 전 지체 없어 엎에 있던 샴페인 잔에 두 번에 나누어 따랐습니다.
순간 온 방안에 퍼지는 상쾌한 냄세.
잔 속엔 마치 살아있는 듯한 거품들의 폭발적인 움직임이 있었구요. 잔을 마주치는 것도 생략한체 우리는 첫잔을 정신 없이 비웠지요. 혹시 페르뇽을 드실 기회가 있는 분들은 그냥 꿀꺽하고 삼키지 마세요. 한모금을 머금고 혓바닥을 입천장에 대어 보십시오. 거품들이 입천장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한 없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그 행복감은 여러분을 잠시나마 모든 근심걱정에서 해방시켜 줄겁니다.
마지막 병이 바닥을 보일 무렵, 어느덧 대화는 끊기고. 감사하게도 이 친구는 취기를 못이기곤 잠이 들더군요. 어제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기 싫어 조용히 렌즈만 빼주고 침대에다 눕혔습니다.
계속 두자루의 양초는 타 들어가고 멀직히 창가에서 마지막 잔을 손에 들고 잠에 빠져든 그 친구를 바라보았습니다. 흔들리는 촛불에 비친 그 아이의 실루엣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오브리옹의 부드러움과 뻬르뇽의 상쾌함이 그 위에서 넘실대고 있었어요. 몇해전 앵커리지에서 보았던 오로라가 생각나더군요. 전 와인의 오로라를 한 여인의 몸을 빌어 보았답니다. 신께 감사 드렸죠. 이런 밤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고 또한 저의 이성이 제 방종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신 것 또한 감사드렸습니다. 계속 그 아이를 바라보던 순간 왜지 모를 느낌에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쏟아 지더군요. 누가 볼 사람도 없어 미쳐 훔쳐낼 생각도 않느체 흐르는데로 나 두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취기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때 포경수술 후 마취가 풀려 고래고래 악을 쓰며 울어 본 뒤 그렇게 눈물을 흘린적은 처음 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눈물이 마르더군요. 힘차게 코를 한 번 푼 뒤 - 아! 정말 시원 했습니다. - 마지막 잔을 들어 그 아이를 위해 건배를 했습니다. 건강하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라구요. 그리곤 저한테도 건배를 했죠. 유년의 치기를 그순수함만 남겨두고 저 검은 바다위로 던져버리라고요. 그 마지막 뻬르뇽은 조금 짠 맛이 느껴졌어요.
그랬습니다. 세상엔 수없이 많은 와인이 있듯 사랑의 형태에도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이제 그 친구와 전,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와 이동전화와 이메일로 가끔 서로의 생사확인을 하는 이전과 다름 없는 관계로 다시 돌아갈 겁니다. 그러다 다시금 세월이 흘러 와인여행을 떠날 수도 있겠죠. 1년 뒤, 3년 뒤, 5년, 10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안변하는 것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후회나 아쉬움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런 건 이미 다 남겨놓고 왔으니까요. 그져 감사할따름입니다. 인생사에 지쳐 잊고 살았던 것을 일깨울 수 있었으니까요. 아니 했다면더 좋았을 것을? 글쎄요. 각자 인생에서 결과를 책임지고자 하는 선택의 권리는 개인의 고유권한이 아닙니까?
이제 또 열심히 일을 해야죠. 다음 달 돌아올 엄청난 카드 값과 이번 달 빵꾸난 생활비를 메꿀려면, 그리고 또 맛있는 와인을 마시려면 말입니다.
누구 저랑 같이 와인의 마법에 걸리고 싶으신 분 없나요? 전 이글을 올리고 또 Rouge et Blanc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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