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유학생활을 하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곳이라 그럴까, 언제부터인가 화이트 와인 마니아가 되어서 일까, 잠잠해질만하면 찾아오는 ‘프리울리 앓이’가 올해는 연말이 되도록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출출한 주말 오후, 산 다니엘레 돌돌 감은 바삭통통 그리씨니에 프리울라노 한 잔을 홀짝이다보니, 마음은 어느새 화이트의 땅으로 달려가고 있다.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Friuli Venezia Giulia)는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미식문화의 숨은 보물창고라 생각하는 지역이기도 한데, 간식이 남긴 긴 여운도 있고, 오늘은 그 안에서 자타공인 이탈리아 최고의 ‘프로슈토 크루도, 산 다니엘레’를 꺼내볼까 한다.

<아, 짧다. 그리씨니 길이가 저 정도는 되어야 프로슈토 좀 말아먹는구나 싶을 텐데...>
출처 : San Daniele del Friuli - Mario Dondero 작가
프로슈토(Prosciutto)는 라틴어 ‘perexsuctum(물기를 빼낸)'에서 나온 말로,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식 햄을 이르는 말이다. 돼지 외에 지역에 따라 소, 양, 염소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프로슈토는 익히지 않고 그대로 숙성시키는 크루도(crudo)와 익혀서 먹는 꼬또(cotto) 두 종류가 있는데, 최고의 찬사를 받는 쪽은 전자,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크루도에는 ’산 다니엘레(San Daniele)‘와 ’파르마(Parma)‘가 있다. 두 명칭 모두 각각의 프로슈토 크루도가 탄생하는 지역의 이름으로, 산 다니엘레와 비슷하면서도 참 다른 파르마 그리고 파르마가 생산되는 에밀리아 로만냐(Emilia Romagna)주는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풍성한 식문화를 가져 ‘뚱녀(La grassa)'라는 별명까지 있는 음식 인심 좋은 지역으로,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이다.
프리울리를 연주하는 맛있는 기타, 산 다니엘레
산 다니엘레가 생산되는 산 다니엘레 델 프리울리(San Daniele del Friuli)는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 주 한 가운데 위치하는 소도시이다. 켈트 시대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 역사적인 프로슈토가 하필이면 이 자그마한 동네에서 탄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탈리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자연조건 때문이다. 알프스의 시원한 산공기와 아드리아 해의 짭짤한 바닷바람, 거기에 미니 습도 조절기의 역할을 하는 탈리아멘토 강까지!

<산 다니엘레 델 프리울리는 알프스 아랫자락에 위치하지만,
맑은 날에는 푸른 바다가 보일 정도로 바다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출처 : 산 다니엘레 관리조합 교육자료 - Troppo buono(너무 맛있어) - Roberto Luciani
산 다니엘레는 로마 시대부터 그 특유의 기타(만돌린) 모양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족을 제거하는 타지역의 프로슈토와 달리, 뒷다리 전체를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보기에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작업이 상당히 까다로워지지만, 천천히 건조시키며 숙성을 유도하는 데에는 이편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소량 수입된다고 하는데,) 라이벌 관계에 있는 파르마에 비해 생산업체의 수도 훨씬 적고, 생산량 역시 1/5에 그치는 것도 여기에서 부분적으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맛기타 몸통의 단면에 라드반죽을 붙이고 있는 모습>
출처 : San Daniele del Friuli - Marco Signorini 작가
-> 산 다니엘레는 돼지의 대퇴골두(허벅지 살 한 가운데 톡 튀어나온 뼈의 머리부분) 주변에서 발굽까지를 모두 사용한다.
산 다니엘레에 쓰이는 돼지는 ‘라지 화이트(Large white)’와 ‘랜드레이스(Landrace)'종으로, 질 좋은 곡물과 훼이(whey)만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9개월이 되어 160kg는 나가야 도축이 가능하다.
-> 훼이 : 치즈를 만들 때, 우유에서 응고된 커드를 건져내고 남은 액체를 이르는 말로, 시트로 산을 넣어 리코타를 만들기도 하는 바로 그 액체이다.
도축 및 선별 과정을 거쳐 24시간 안에 산 다니엘레 델 프리울리에 도착하는 신선한 돼지 뒷다리의 평균 무게는 14kg. 염지는 보통 냉장 온도에서 킬로그램 당 하루로 계산하므로, 건염과정은 약 보름에 걸쳐 진행된다. 이어 적당한 압력을 가해 평평한 모양을 잡아 준 다음에는, 삼투압 작용에 도움이 되도록 습도 7~80%, 4~6도의 환경으로 옮겨 2~3개월간 충분히 휴지를 시킨다. 이 기간이 지나면 소금 사우나로 적당히 물기가 빠진 산 다니엘레에 솔질과 세척을 해 주는데, 마치 마사지로 각질제거도 하고 사우나 후 시원하게 샤워를 하는 것처럼, 산 다니엘레도 ‘단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 이제 ‘숙성의 전당에 족을 들여놓아야 할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9월의 어느 날,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숙성실 모습>
숙성실은 수십 개의 기다란 창이 바다와 산을 향해 남북으로 난 특이한 구조로 지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적당히 평평해지고 탄탄해져 제법 프리울리 ‘맛기타’의 모습이 엿보이는 생후 4~5개월의 베이비 프로슈토는 이제 이 ‘숙성의 전당’에서 시원한 산공기와 짭짤한 바닷바람을 한껏 들이쉬며 그 특유의 섬세한 풍미와 부드러운 식감을 갖추게 된다. 이 때 프로슈토의 단면이 마르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라드 반죽을 1~2회 정도 꼼꼼히 붙여준다. 라드, 곡물가루, 후추를 적절히 섞어 만든 프로슈토 전용 매직크림으로 보들보들한 육질 보호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프로슈토 숙성정도를 후각으로 가늠하는 피불라(Fibula) 테스트>
->'피불라', 지방과 살코기 사이의 경계에 살짝 찔러 넣는 이 얇고 가는 뼈바늘은 말의 경골(정강이뼈)에 붙어 있는데,
날카로우면서도 탄력성이 있어 내부 조직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
사육 9개월 이상, 염지에서 숙성까지 13개월 이상. 거의 2년에 걸친 기다림이 끝나면, 최종 테스트가 남는데, (세상사 모두 그렇듯,) 산 다니엘레에서 생산되는 모든 프로슈토가 DOP(원산지보호명칭) 카테고리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중 75% 정도에만 불도장이 찍히기 때문이다. 아, 문신 한 번 새기기 참 힘들다!
어떤 식재료든 그 생산 과정을 알고 나면 후각과 미각에서 그쳤던 맛의 지평선이 오감으로 퍼지며 입안에서의 즐거움도 배가 된다. 그리고 어떻게 먹는 것이 그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을지 고민 아닌 고민도 하게 되는데, 산 다니엘레의 경우, 그리씨니에 돌돌 말아 먹거나 살짝 소금기가 있는 크래커위에 얹어 먹는 것이 가장 클래식한 시식법이다. 이 때 프로슈토 슬라이스는 얇으면 얇을수록 좋다. 물론 두께는 어떤 식재료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숙성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하지만, 산 다니엘레는 다른 지역의 프로슈토에 비해 더 얇게 썰어 먹는 것이 특징이다. 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그 부드러운 식감에 ‘살살 녹는다’는 표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 여기에 씀씀한 피니시의 상쾌한 프리울라노 한 잔만 곁들이면, 숙성된 프로슈토의 섬세한 맛과 완벽하게 어우러져 마음까지 사르르... 프리울리 지역은 주민와인 프리울라노(Friuliano) 외에도 리볼라 쟐라(Ribolla Gialla), 피노 그리죠(Pinot grigio),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샤르도네(Chardonnay) 등 수려한 화이트로 유명한 곳이니, 같은 땅에서 난 화이트와 환상의 페어링이 줄을 잇는다.
프로슈토는 멜론, 무화과와 같이 달콤한 과일과 곁들여 전채요리로 먹는 경우도 많은데, 생과일과 생햄을 그대로 먹는 방법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잖이 있다. 과일이 싫다면, 고소한 모짜렐라는 어떤가. 어떤 음식을 곁들이든, 산 다니엘레를 먹을 때는 프리울리의 화이트, 특히 프리울라노를 꼭 기억하자. 물론 복합적인 풍미의 메인 요리에 사용할 때에도 역시 궁합을 맞출 레드의 리스트는 차고 넘친다!
올 가을 산 다니엘레 델 프리울리 방문 시 많은 도움을 주신 프로슈토 관리조합(Consorzio di Prosciutto di San Daniele)의 엘레나 코치 씨(Elena Cozzi)와 바가토(Prosciuttificio Artigianale Rino Bagatto di Bagatto Dante & C. snc)사의 로렌초 바가토(Lorenzo Bagatto)씨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참조 사이트>
프로슈토 산 다니엘레 관리조합 : www.prosciuttosandaniele.it
바가토 프로슈티피쵸 : www.prosciuttibagatto.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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