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와인이 맺어주는 찰나의 인연법

어느 오후, 광화문 주변을 거닐다 한 인연이 생각났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의 느낌이란 그런 것일까? 신기하게도 그 날 집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문자가 울린다. “혹시 시간되시나요? 다른 한 분과 해서 오래간만에 뵙고 싶어서요.” 좋은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었고, 직장 구하기 전에 고민도 많이 들어준 터라서 약속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 만이었을까? 그리고 사람이란 서로 간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와인으로 알게 된 수 많은 인연, 어느 덧 내 주변의 인연은 와인을 빼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넓어졌다. 좋은 인연도 많았지만 힘든 인연도 많았다. 만나니 결혼이라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나왔다.

 

“축하해요” 얼굴에는 고민하는, 새롭게 일을 시작한 마음에, 그 크고 또랑또랑한 눈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도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함께 하신 분은 그녀에게 이야기 하신다. “넌 이 분에게 고맙다고 해야 해. 네가 그 날 너를 자리에 초대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이 분이 너랑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오늘의 너는 없는 거야. 그 날 저녁 네가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너는 없는 것이야. 그 것이 인연법이란다. 이번 직장 열심히 다니고, 결혼 잘 하고.” 생각을 해보니 첫 인연이 생각났다. 와인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서 한 자리에서 만난 뒤, 다음에 자리에 불렀다. 와인이 질펀했고, 무슨 와인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끌벅적한 밤이었다. 그 때가 시작으로 되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가늘고 긴 인연을 잡아 왔다.

 

이처럼 기묘하리만치 연결이 되어서 시작되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연결하고 연결하고자 해도 연결되지 않는 인연도 있다. 얼마 전이었는가 다들 바쁜 일정 때문에 일요일 저녁으로 한 번 시간을 만들고자 연락을 취했다. 시간도 넉넉해서 충분히 모두 시간이 있다한다. 봄바람 살랑살랑하니 얼마나 좋은가? 와인에도 모두 식견이 대단하니 와인이 만들어줄 좋은 인연에 기대는 봄바람 마냥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병원 치료가 잘 못 되어서 안 된다 하고, 한 사람은 가족 여행, 한 사람은 담당자 근무 교체라 하여 갑자기 흩어지는 꽃잎 마냥 자리가 무산되었다. 인연은 내가 노력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운명이라는 것도 함께 있어야 한다.

 

와인과 나의 만남 역시 인연법이다. 아주 저렴한 와인인데도 불구하고, 꼭 마셔보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잘 만나지지 않는 와인이 있다. 반대로 가격이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절대 만나지지 않는 와인이 있다. 지난 10년간 나는 수 천 종의 와인을 마시면서도 보르도 그랑크뤼 다섯 와인 중 하나는 아직 경험한 적이 없는데 바로 라피트 로쉴드(Chateau Lafite Rothschild)다. 특이하게도 다른 와인들은 두 번 이상 경험이 있지만(물론 귀한 경험이었다.), 라피트 로쉴드 만은 한 번도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렇다고 굳이 애를 쓰지는 않는다. 인연이란 내가 애를 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운명이 함께 덧붙여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라피트 로쉴드를 만날 날도 오겠지만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것도 인연법인 것이다.

 

다만 와인과 내가 인연이 되어 만나는 순간은 병을 보관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와인을 열어서 나와 교감하는 불과 10분 혹은 1시간 남짓의 시간이다. 병이 와인이 아니라 병 속에 담긴 것이 와인이니 말이다. 정말로 짧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시간을 훌쩍 넘어서 그 와인이 만들어진 시간과 내가 살아가는 시간을 연결하고, 지금의 나로 하여금 그 인연을 마음 깊이 느끼게 만들어 주는 다리와 같은 것이다. 나는 그 느낌을 찰나의 인연으로 넘기지 않기 위해서 시음기를 쓴다. 천천히, 그리고 그 때 받은 느낌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기록을 남겨두려 애를 쓴다.

 

시음기를 쓸 때 나의 마음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다. 눈을 감고 잔의 스템(목의 가는 부분)에 손을 대어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잔속으로 코를 들이민다. 순간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영혼이 아로마라는 이름을 타고 나에게 넘어온다. 내가 시음노트를 쓰는데 있어 이 와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 찰나에 시작되고 이 찰나에 끝이 난다. 그 다음으로는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서 느린 손가락이 열심히 글로 써 내린다. 상상력의 문제도 아니다. 어휘력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와인이 이야기 해 주는 대로 써 내린다. 기억이 남고 남아서 마신 그 다음날, 혹은 그 여러 날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는 와인도 있다. 심지어는 어떤 와인의 경우 아예 내 마음에 떡하니 똬리를 들고 앉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와인도 있다. 단어는 아니되, 그 시간의 모든 것이 찰나와 같이 내 머리에서 영화처럼 흘러간다.

 

와인이 맺어주는 인연은 찰나이되, 내 기억에는 영원을 이야기 하니, 사물을 바라보되 인격을 바라보듯 하고, 덕분에 다시 와인을 찾게 된다. 두근거림과 설렘과 따스함, 그 모든 것이 응집된 집약체가 와인이니 오늘도 또 무슨 와인이 있는지 웹사이트를 뒤적인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프로필이미지정휘웅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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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3.05.18 07:49수정 2013.05.2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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