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500m에 위치한 ‘토미 노 오카’ 와이너리 포도밭]
일본 와인에 대해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현재 국내 수입 와인은 1만 5천여 가지를 훌쩍 넘고 있지만 국내 와인샵에서 일본 와인을 찾아보는 건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그들의 토착 품종을 국제와인기구(OIV)에 등재하고,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에 일본 와인을 널리 알리고 수출하기 위한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야마나시(山梨県; Yamanashi) 현과 그곳을 대표하는 고슈(甲州; Koshu) 와인이 있다.
야마나시 현은 야쓰가타케(八ヶ岳), 아카이시 산맥(赤石山脈) 그리고 후지산(富士山) 등 해발 2천미터가 넘는 산악지대로 둘러 쌓여 있으며, 현청이 소재한 고후 시(甲府市)는 도쿄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10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곳은 해발 200~400미터의 분지로 오래 전부터 포도, 복숭아, 자두 등의 과일 생산지역으로 유명하였고, 일본 와인이 처음 시작된 곳이다. 고후 시는 예로부터 수정(水晶)의 산지로 일본 주얼리의 1/3이 이곳에서 생산되며, 남쪽에 자리한 후지산(해발 3,776m) 주변의 후지 5호(富士五湖)라 불리는 5개의 호수는 일본 내 관광 및 휴양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또한, 여러 개의 온천마을과 벚꽃과 해바라기 등 산과 들에 펼쳐진 멋진 자연 풍경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가와구치코 호수에서 바라본 후지산]
130여년의 일본 와인 역사
일본의 와인역사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치적 변혁과 경제적, 사회적 변화가 시작된 근대화에 발맞춰 시작되었다. 1877년 처음으로 ‘대 일본 야마나시 포도주’ 회사가 설립되었고 유럽의 와인양조와 포도재배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츠지야(土屋龍憲)와 다카노(高野正誠)라는 두 젊은이를 유럽으로 유학을 보낸 후 1879년부터 본격적인 와인양조에 돌입하지만 당시 와인 수요가 많지 않았던 터라 회사는 곧 문을 닫게 된다. 이후 카츠누마의 재벌이었던 미야자키(宮崎光太郞)가 이곳을 인수하며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그는 1892년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첫 번째 양조장을 세우고, 1904년에는 두 번째 양조장(현 샤또 메르시앙 홍보관)을 건립하여 대량 생산 시설을 갖추는 등 오늘날 일본 와인 산업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일본 와인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가와카미 젠베이(川上善兵衛)다. 그는 19세기 후반부터 포도재배와 와인양조를 시작하였고, 1927년에는 지금의 일본 레드와인을 대표하는 ‘머스캣 베일리 A(Muscat Bailey A)’라는 교배품종을 개발하는 등 일본 와인역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32년과 1933년에 ‘포도 사전’이란 제목의 책 3권을 출판하는 등 일본 와인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주며, 지금까지 ‘일본 와인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왼쪽아래부터 오른쪽으로 츠지야, 다카노, 미야자키]
일본은 홋카이도, 이와테 현, 야마가타 현, 야마나시 현, 나가노 현, 니카타 현, 교토 후, 오카야마 현, 후쿠오카 현 등 15개 지역에서 와인을 생산하고 있으며, 전체 생산량의 24.6%(2012년 농무부 조사보고서 기준)로 1위를 차지는 야마나시 와인과 국제품종으로 품질 좋은 와인들을 만들고 있는 나가노 와인들이 크게 주목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일본에서 재배되는 대부분의 포도품종은 식용이지만 최근 젊은 사람들이 와인에 관심을 보이며 양조용 포도품종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일본 와인의 발상지, 일본 와인의 미래 ‘야마나시 현 와인들’
일조량이 길고, 밤 낮의 기온차가 크며,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강수량(연 1,100ml)이 적은 편인 야마나시는 일본의 와인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카츠누마, 시오야마, 고후, 아케노, 이치노미야 지역 등에서 총 80여개의 생산자들이 와인을 만들고 있다. 또한, 몇몇 와이너리들은 이미 프랑스, 스웨덴, 이탈리아, 영국, 싱가폴, 말레이시아, 태국, 홍콩, 호주 등 유럽과 아시아 국가에 수출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 EU국가에 와인을 수출할 때 와인 라벨에 일본 와인이 아닌 야마나시에서 만든 와인이라는 원산지 명칭도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야마나시 와인센터에 보관중인 1949년산 일본 와인]
야마나시에는 ‘야마나시 대학 와인과학 연구센터’와 ‘야마나시 와인센터’ 두 곳이 운영되고 있으며, 포도재배와 양조기술 그리고 이 지역의 기후와 토양 분석 등 다양한 연구 활동을 통해 와인의 품질 향상에 힘쓰고 있다. 1947년에 창설된 ‘야마나시 대학 와인과학 연구센터’는 발효와 미생물, 와인의 맛과 건강, 포도재배와 유전자 등을 연구하고 작은 와이너리도 함께 운영하는 등 오래 전부터 와인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 1학년부터 석사 학위 취득까지 6년간 포도 및 와인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전문가 육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 과정도 운영하고 있다. 야마나시 현에서 직접 운영하는 ‘야마나시 와인센터’ 역시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를 지역 와이너리들과 함께 공유하고, 서로간의 정보를 나누는 등 체계적인 관리와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며, 와인 품질 향상에 많은 도움과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고슈 와인의 메카, 카츠누마
야마나시 현의 고슈 시(甲州市)에 속한 카츠누마는 약29개의 생산자들이 밀집된 곳으로 고슈 와인의 메카라 불리고 있다. 이곳에서 최근 주목 받는 고슈 와인 생산자로는 그레이스 와이너리(GRACE WINERY)와 로리앙 와인(L’ORIENT WINE)이다. 그레이스 와이너리는 1923년에 설립된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로 2011 디캔터 월드 와인 어워드(Decanter World Wine Awards 2011)에서 ‘그레이스 고슈 카야가타케(Grace Koshu Kayagatake) 2010’ 빈티지가 일본 와인으로는 처음으로 실버 메달을 수상하였다. 로리앙 와인 역시 1939년에 설립되어 2대째 운영되고 있는 가족이 운영하는 와이너리로, 신의 물방울과 일본의 유명한 음식 만화에 소개될 정도로 일본 내에서도 품질 좋은 고슈 와인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매년 봄이 되면 고슈와 머스캣 베일리 A를 블렌딩하고 식용 벚꽃을 넣어 만든 ‘사쿠라 와인’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본 와인 중 하나다.
[왼쪽은 샤토 메르시앙 전시관, 오른쪽은 토미 노 오카 와이너리 가이드 투어 현장]
이외에도 야마나시에서는 일본 최고의 와이너리 두 곳이 존재한다. 일본 최대의 주류 회사인 산토리(SUNTORY)가 운영하는 토미 노 오카 와이너리(TOMI NO OKA WINERY)와 일본 와인 판매 1위를 달리는 샤토 메르시앙(CHATEAU MERCIAN)이다. 토미 노 오카 와이너리는 1909년에 설립된 후 일본에서는 가장 먼저 국제품종을 들여와 와인을 양조하였고, 1975년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귀부(roble rot) 와인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3년 보르도에서 열린 시타델 와인 국제 대회(International Les Citadelles du Vin)에서는 ‘토미 레드(Tomi Red) 1997’ 빈티지가 골드 메달을 받았고, 2012년도에 열린 같은 대회에서는 ‘토미 노블 도르(Tomi Noble D’or) 2002’ 빈티지와 ‘토미 노 오카 샤르도네(Tomi No Oka Chardonnay) 2011’ 빈티지가 골드 메달을 받기도 하였다. 1877년 일본 와인 역사와 함께 시작한 샤토 메르시앙 역시 오랜 역사만큼 와인 품질에 있어서 일본 최고의 와인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열린 국제 대회와 일본 내에서 열리는 와인 대회에서 수 많은 상을 거머쥔 명성 높은 와이너리다. 또한, 이 두 와이너리는 방문객들을 위한 다양한 편의시설과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기도 하다.
[카츠누마 포도의 언덕 지하 와인셀러]
카츠누마에 가면 꼭 들려봐야 할 곳이 있다. 바로 고슈 시에서 운영하는 ‘카츠누마 포도의 언덕’이다. 주변이 포도밭들로 둘려 쌓인 높은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1977년 8월에 오픈 되어 현재는 매년 60만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해진 곳이다. 이곳에는 온천과 레스토랑 그리고 숙박 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4만병 이상의 와인을 저장할 수 있는 지하셀러도 갖추고 있다. 이곳에 저장된 와인들은 모두 야마나시 현에서 발급한 품질 인증 스티커가 부착된 200여가지 와인들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1인당 1,100엔만 지불하면 이 와인들을 무제한으로 맛볼 수도 있다.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고슈 와인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카스피해 주변인 코카서스(Caucasus) 지역의 비티스 비니페라 계열인 고슈는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800년 전이란 설도 있음) 실크로드를 통해 불교 문화와 함께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그레이스 와이너리 고슈 포도밭]
야마나시 테루아에 잘 적응한 고슈는 평균적으로 9월말부터 10월초 사이에 수확되는 품종이지만, 일부는 잘 익은 과육을 얻기 위해 10월말 심지어 고산 지대에 위치한 포도밭에서는 11월 초까지 기다렸다가 수확되기도 한다. 고슈는 껍질에 자주 빛과 분홍 빛이 감도는 청포도 계열로 낮은 알코올과 무색에 가까울 정도로 맑고 투명한 연한 레몬 색을 띠고 레몬, 감귤류, 복숭아, 흰 꽃 향이 잘 나타나며, 신선하고 상큼한 과일 맛과 시트러스 계열의 산미 그리고 가벼운 바디 감을 지닌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대부분 오크통 숙성을 하지 않고 가볍고 즐기지만 최근 몇몇 생산자들은 약간의 오크통 숙성을 통해 무게 감을 더하기도 있다. 또한, 스틸 와인(still wine)뿐만 아니라 스파클링 와인으로 만들어진 고슈는 청량감이 더해지면서 상당히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슈 와인은 와인만 즐기기에 다소 산미가 두드러지게 느껴질 수 있으나 간장과 된장 소스를 이용한 일본 음식이나 해산물, 스시, 생선회, 샐러드, 초무침 등과 함께하면 최고의 마리아주(mariage)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고슈는 일본의 토착 품종으로 자리잡으며 일본 음식 문화에 깊이 스며들었고, 2010년에는 국제와인기구에 일본의 양조용 포도품종으로 등록되기도 하였다.
[왼쪽부터 머스캣 베일리 A, 카이 누아, 델라웨어, 카이 블랑]
이 외에도 일본에서는 고슈, 네오 머스캣(Neo Muscat), 델라웨어(Delaware), 카이 블랑(Kai Blanc) 비롯한 국제품종인 케르너(Kerner), 세미용(Semillon), 리슬링(Riesling),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샤르도네(Chardonnay), 뮐러 투르가우(Müller-Thurgau) 등의 청포도 품종과 머스캣 베일리 A(2013년도 국제와인기구에 일본 양조용 품종으로 정식등록), 아뮤렌시스(Amurensis), 블랙 퀸(Black Queen), 에디론닥(Adirondack), 카이 누아(Kai Noir) 그리고 국제품종인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메를로(Merlot), 까베르네 프랑(Cabernet Sauvignon), 쁘띠 베르도(Petit Verdot), 시라(Syrah) 등의 적포도 품종들도 재배되고 있다.
이번 일본 와인 팸투어 기간 동안 고후 시에서 열린 2014 일본 와인 대회(Japan Wine Competition)에서는 300여 종이 넘는 일본 와인들도 시음해 볼 수 있었다. 일본 와인 협회와 일본 소믈리에 협회, 야마나시 대학 와인과학 연구센터, 야마니시 현 그리고 나가노 와인 협회 등으로 구성된 ‘일본 국산 와인대회 위원회’는 2003년부터 이 대회를 통해 일본 와인의 품질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올해도 700여종이 넘는 와인이 출품되었고, 25종의 금상 와인이 가려져 이날 함께 소개 되었다. 금상을 받은 와인 중에는 고슈로 만든 와인도 6종이나 포함되었다.
[2014 일본 와인 대회 시음회장]
국내의 많은 소비자들은 일본 와인을 유럽이나 남미 와인들과 비교하며, 품질 낮아 경쟁력이 없다고들 말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일본은 미래를 꿈꾸며 계속해서 변화와 혁신을 거듭해 나가고 있다. 이미 그들은 국제사회에 고슈와 머스캣 베일리 A를 자신들의 양조용 토착품종으로 등록하고 그들이 만든 와인들을 국제와인대회에 출품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와인연구센터를 운영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포도재배 및 양조기술 발전에 필요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기도 하다. 3일간의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의 토착품종과 국제품종으로 만들어진 여러 지역의 일본 와인을 시음하면서 일본 와인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130여년이 넘는 역사와 함께 그들이 이어온 와인에 대한 열정과 노력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꿈꾸는 일본 와인시장을 보며 앞으로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