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라는 나라를 사람으로 떠올려보면 어떨까. 내게 칠레는 강하고 단단한 남자다. 선이 굵은 얼굴에 풍채가 좋은, 어느 정도의 야성미를 갖춘 그런 남자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남자 곁에 있으면 설레기 마련이다. 교대역에 위치한 와인365&마릴린으로 향하는 내 마음도 그래서 좀 두근거렸다. 칠레에서 온 와이너리, 따발리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 만남,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디너 당일 와인365&마릴린의 풍경]
와인병 모양의 입구를 지나 마릴린에 들어서자 따발리를 만나기 위해 모인 20여명의 사람들로 레스토랑은 벌써 복작거리고 있었다. 먼저 쉐리 비니거를 곁들인 석화와 함께 따발리, 리제르바 샤도네이 2012 (Tabali, Reserva Chardonnay 2012)가 준비됐다. 100퍼센트 샤도네이로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에서 숙성되는 따발리의 리제르바 샤도네이는 풀빛이 감도는 투명한 노란빛이였다. 와인 메이커는 와인의 뉘앙스를 설명하며 연신 “elegance”란 단어를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고급스러운 미네랄리티가 은은하게 이어져 싱싱한 굴과 어우러졌다.
곧바로 잔에 따라진 다음 레드와인은 따발리, 리제르바 피노누아 2013 Tabali, Reserva Pinot Noir 2013 였다. 다소 칠링된 상태로 서브된 이 와인은, 피노누아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법한 여린 느낌보다 신선하고 부드러운 과실의 향과 맛이 강렬했다. 이 와인이 만들어지는 리마리 벨리는 전 세계의 와인 산지 중 가장 비가 적게 내리는 곳이다. 동시에 서늘한 기온이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덕분에 피노누아 특유의 체리, 딸기, 붉은 베리의 향은 간직한 채 스파이시, 크리미한 자두, 옅은 가죽향까지 복합적인 매력을 보이는 와인이 될 수 있었던 것. 그 감각이 인상적이라 함께 서브된 단호박 퓨레 위의 관자와 아스파라거스의 맛이 희미할 정도였다.
[시음 와인들]
그렇다면 다음 와인은 어떨까. 아직 채워지지 않은 잔에 궁금증만 찰랑였다. 이번에 소개되는 와인 중 유일하게 리마리 벨리가 아닌, 마이포 벨리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한우안심 까르파쵸와 따발리, 리제르바 까베르네 쇼비뇽 2012 Tabali, Reserva Cabernet Sauvignon 2012가 서브되자 예상대로 그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는데, 답변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따발리가 위치한 리마리 벨리는 까베르네 쇼비뇽이 충분히 익기에 너무 서늘해서, 더 좋은 퀄리티의 와인을 위해 마이포 벨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품질을 위한 따발리의 섬세함 덕분에 부드러운 오크향과 바닐라 내음, 촉촉한 흙냄새가 더해진 따발리, 리제르바 까베르네 쇼비뇽의 맛 또한 훌륭했다. 검은 베리를 중심으로 강하지 않은 타닌 덕분에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 무거운 와인을 피하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추천할 법 했다.
[디너 음식들]
메인 요리는 돼지고기 항정살 구이에 더덕퓨레와 사과잼이 곁들여진 접시였다. 거기에 피노누아가 한 번 더 나왔다. 따발리, 탈리나이 피노누아 2012 Tabali, TALINAY Pinot Noir 2012 였다. 탈리나이라는 단어의 뜻을 물었더니 “Windy place”란 답이 돌아왔다. 이 와인 또한 리마리 벨리의 차가운 기후를 살려 특징을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어감이 예쁘다고 말했더니, 그보다 맛이 훨씬 더 좋다고 하며 ‘칠레 피노누아 중 최고’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붉은 베리와 미네랄이 굉장히 부드럽고 농밀하게 느껴졌다. 따발리 리제르바 피노누아가 소녀라면 이 와인은 숙녀의 느낌이다. 둘 다 각자의 매력이 있지만 고급스럽기로 치자면 따발리 탈리나이 피노누아가 한 수 위인 것. 좋은 구조감에 좀 더 여리고 크리미하고 우아한 풍미가 입 안에 오래 남았다.
마무리는 따발리, 리제르바 에스페시알 시라 2012 Tabali, Reserva Especial Syrah 2012의 몫이었다. 2011년 빈티지로 로버트 파커에게 91점을 받은 이력이 있는 이 와인은, 블랙 베리와 블랙 페퍼 등 진한 향이 넘실거렸다. 소녀와 숙녀를 넘어 카리스마 있는 멋진 여성의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달까. 잘 익은 과실의 맛과 균형잡힌 타닌과 산미 덕분에 무리없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따발리의 와인 메이커와 수출 매니저]
디저트로 나온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으며 돌이켜봤다. 이제까지 내가 ‘칠레 와인’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들을. 그 고정관념을 하나 하나 뒤엎으며 훌륭한 맛을 보여준 따발리 덕분에 나는 즐거움을 하나 더 알았다. 선입견이란 어떤 만남에서든 방해꾼일 뿐 일테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내 앞에는 깨끗이 비워진 잔과 그릇들이 말없이 놓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