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나면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 있을 나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괜스레 설레는 마음은 역시나 감출 길이 없다. 특히 유학 시절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을 때에는 이런 마음이 더했던 것 같다. 12월 초면 어김없이 시내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인 막쉐 드 노엘(Marché de Noël)이 열리고,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 거리가 북적이곤 했다. 겨울을 맞이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와 같은 시간이라고나 할까. 사고 나면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곤 하는 장식품과 딱히 유용하지는 않지만 예쁘기는 한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아 거리를 헤매며 소소한 쇼핑을 하다 보면 어느새 추위에 손이 차가워지기 마련. 딱 이런 타이밍에 우리 눈앞에 빠짐없이 보이는 건 뱅쇼(Vin Chaud)와 시시(Chichis, 스페인식 츄러스를 불어로 부르는 말)를 파는 상점이다. 향신료가 잔뜩 들어간 따끈한 와인에 누뗄라(Nutella, 일종의 초콜릿 스프레드)를 추가해서 쌓아 올린 시시를 한입 베어 물면, 순식간에 온몸이 녹아내리며 에너지가 솟아나 한두 시간은 더 거뜬히 밖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따끈한 와인에서 전해지는 약간의 알코올 기운에 살짝 업되는 기분은 덤.
[프랑스 파리의 크리스마스 마켓]
뱅쇼, 이 좋은 음료를 한번 먹어보지 않고 겨울을 날 수는 없다. 게다가 뱅쇼는 각종 향신료와 비타민이 풍부한 오렌지 등의 과일이 첨가되어 감기 예방에 좋은 음료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아무리 맛있고 건강에 좋은 음식도 혼자 먹는다면 무슨 재미일까! 함께 나누는 기쁨을 누리고자 뱅쇼 만드는 법과 뱅쇼와 함께 먹으면 좋을 과자 레시피를 소개한다. 사실 이 레시피는 프랑스 유학시절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현지인들의 엄격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인 친구들로부터 당장 학업을 중단하고 뱅쇼 장사를 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자타 공인 ‘뱅쇼 장인’이 전하는 레시피. 눈을 크게 뜨고 따라 해 볼까.
레드와인 베이스 뱅쇼 만들기
재료 : 심플리 까베르네 쇼비뇽(Simply Cabernet Sauvignon) 750ml, 오렌지 한 개, 시나몬 스틱 1개, 황설탕 130g(취향에 따라 가감)
만드는 법: 먼저 마트에서 저렴한 와인 한 병을 구매한다. 포도 품종이나 원산지는 크게 관계가 없는데, 보르도에서는 보르도 와인으로 뱅쇼를 만들고, 부르고뉴에서는 부르고뉴 와인으로 뱅쇼를 만들기 때문. 각자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준비하면 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비싼 와인이 필요 없다는 것. 먹다 남은 레드 와인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도 좋다. 하지만 와인을 구매해야 한다면 가장 구하기 쉽고, 퀄리티가 좋은 레드 와인을 한 병 구매하면 되겠다. 나의 선택은 테스코 심플리 까베르네 쇼비뇽. 테스코 심플리는 그냥 마셔도, 뱅쇼를 만들어서 마셔도 큰 부담이 없는 맛있는 와인이기 때문이다.
와인이 준비되었다면, 이제 반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오렌지는 왁스 처리가 되어 있으므로 펄펄 끓는 물에 굵은소금 한두 큰 술과 함께 삶아 왁스를 제거한다. 꺼내 식힌 후에는 다시 한번 흐르는 물에 굵은소금으로 문질러 표면을 깨끗하게 닦아준다. 반으로 잘라 과즙을 짜내고 껍질도 칼로 살짝 저며 준비한다. 뱅쇼를 끓일 때 오렌지 껍질을 넣으면 풍미가 더 깊어지는 효과가 있다. 이제 커다란 냄비를 준비해 와인과 오렌지 즙, 오렌지 껍질, 계피와 분량의 설탕을 모두 넣고 데우면 끝.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한 가지는 뱅쇼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와인이고, 알코올이 다 날아간 것은 와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너무 센 불에서 가열하지 않는 것이 맛있는 뱅쇼를 만드는 핵심이다. 조리 용어로 시머링(Simmering)이라고 부르는 상태인 살짝 기포가 올라오기 직전의 상태가 딱 좋다.
한두 가지 조언을 덧붙이자면, 첫 번째로 뱅쇼를 만드는 데에는 절대로 직접 짠 오렌지가 아닌 시판 오렌지 주스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시판 오렌지 주스를 사용하면 색이 뿌옇게 변하면서 맛도 좋지 않기 때문. 둘째, 계피는 꼭 통계피를 사용해야 한다. 사실 계피 외에도 정향, 아니스 등 더 많은 향신료를 넣으면 좋겠지만 집안에 늘 이런 향신료를 갖추고 있기란 쉽지 않다. 단, 절대 빠져서는 안 될 단 하나의 향신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계피인데 가루 상태의 계피를 사용하면 와인의 색이 탁해지는 것은 물론이며 맛도 텁텁해진다. 셋째, 뱅쇼는 짧은 시간 내에 끓인다. 대신 불을 끄고 나서 뚜껑을 덮어 놓은 채 몇 시간 동안 맛이 푹 우러나게 두었다가, 먹기 직전에 다시 데워 먹는 것이 좋다. 이 과정을 거쳐야 오렌지와 향신료의 맛이 충분히 우러나 더욱 깊은 맛을 즐길 수 있다. 채에 걸러서 마시는 것도 잊지 말 것!
자, 맛있는 겨울 음료가 준비되었다면 이제는 과자를 구워볼까. 앞서 언급한 시시(츄러스)를 집에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 시시는 바로 튀겨내야 제맛이기에 집에서 해 먹기보다는 길거리에서 사 먹는 편이 낫다. 대신 뱅쇼와 조금 더 잘 어울리고 만들기도 간단한 과자 레시피를 소개한다. 그것은 바로, 사블레 까넬(Sablé Canelle). 바삭한 식감과 은은한 계피의 풍미와 단맛에 자꾸 손이 가는 고급스러운 과자이다.
사블레 까넬 만들기
재료: 버터 180g, 슈거파우더 80g, 계피가루 4g, 바닐라 가루 4g, 중력분 250g
만드는 법: 버터는 먼저 실온에 꺼내놓아 준비한 후 말랑한 상태로 사용한다. 거품기로 분량의 버터를 풀어준 후 슈거파우더를 넣고 잘 섞일 때까지 저어준다. 마른 가루 재료들은 모두 채에 한 번 내려 버터에 섞는다. 잘 뭉쳐진 반죽은 냉장고에 1시간 이상 휴지시켰다가 0.5cm 두께로 밀어 원하는 쿠키 커터로 찍어낸다. 180도로 미리 예열해 놓은 오븐에 약 10분 가량 구우면 끝.
유럽은 우리나라의 겨울보다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지만 오래된 건축물로 외풍이 심하고 난방을 많이 하지 않아 유난히 춥게 느껴진다. 이런 곳에서 겨울을 나며 얻은 생활의 지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추운 겨울에는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음식을 알아서 찾아 먹는 것이었다. 식사용 음식에는 와인을 곁들여 먹는 퐁듀(Fondu)와 라끌렛(Raclette) 등이 프랑스의 대표적인 겨울 음식이고, 겨울 간식으로는 역시 따뜻한 와인인 뱅쇼와 향신료가 들어간 과자인 사블레 까넬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함께 먹었을 때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추위도 이겨낼 수 있는 음식이랄까. 달콤한 와인을 홀짝이고 과자를 먹으며 통통하게 올라오는 살은 이 겨울이 자연스럽게 가려줄 테니 칼로리 걱정은 잠시 잊어버리자. 지금은 모두가 기뻐해야 할 축제 기간이니까.
* 뱅쇼는 따뜻한 와인을 일컫는 말로 독어권에서는 글뤼바인(Gluehwein), 영미권에서는 멀드 와인(Mulled Wine)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