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베스트 컨시지어가 마시는 '푸이 주베'

[영화 속 배경이 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자기소개를 할 때면 거리낌 없이 명함부터 주고받곤 한다. 명함을 받아든 사람은 대화를 시작도 하기 전에, 명함에 적힌 회사와 직위로 상대의 신상을 대략 가늠한다. 이런 소개가 관습처럼 굳어진 사회에서 회사라는 울타리 밖을 벗어난다면 타인에게 어떻게 날 설명해야 할까.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주인공인 무슈 구스타브는 자신이 일궈온 궤적을 자랑스레 여기다 못해 우상시한다. 내 자리는 나 아니면 대체 불가하다는 신념, 어쩌면 평균의 사람들보다 일에 두는 가치의 크기가 크기 때문일 테다. 그런 그가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연루되면서, 아무런 수식도 붙지 않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해 예기치 않은 모험을 시작한다. 호화로운 호텔 안에선 모두가 다투어 찾던 유능한 컨시어지였지만, 호텔 밖에선 졸지에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도망자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떠는 마담 D와 그녀를 위로하는 무슈 구스타브]
 
만인의 연인,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 구스타브
영화는 어느 나이 든 작가가 지난 옛일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젊은 시절 휴가차 들렀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작가는 제로 무스타파라는, 주브로브카 최고의 갑부를 만나게 된다. 무스타파는 작가와 함께 '푸이 주베 26년 산'을 마시며 이야기를 펼쳐낸다(여기서 '푸이 주베'는 제로 무스타파가 모시던 최고의 호텔 지배인이었던 무슈 무스타파가 유일하게 좋아해 고집하던 와인이다. 무슈 구스타브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마저 듣기로 한다). 한낱 로비 보이였던 자신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소유한 부자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작가에게 고백한다. 
 
알프스 산자락 네벨스바드에 위치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호화롭고 웅장한 퇴폐 호텔이다. 이곳의 총책임자인 무슈 구스타브는 유독 노 부인들의 발길을 끊임없이 이끌며, 호텔 번성에 큰 몫을 해낸다. 호텔의 진정한 컨시어지로 인정받으며 대체 불가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소 엉큼하다. 돈 많고, 늙고, 불안정하며, 천박하고, 외로운 부인들의 기쁨조가 되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례함은 두려움의 표출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사랑을 받으면 꽃봉오리처럼 마음이 활짝 열리죠" 고객이 감추고 싶어하는 꼴사나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는 원칙에서 그가 롱런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다.
 
[맨들 케이크 더미에 빠진 제로와 그의 여자친구 아가사]
 
로비보이 제로는 어떻게 호텔 주인이 되었나 
"젊을 땐 살코기만 찾지만, 나이 들면 비곗덩어리도 마다 않지. 깊고 진한 맛이 느껴진달까" 여든네 살의 마담 D의 어디가 좋으냐는 제로의 질문에 이같이 답하며 인생의 깊은 지혜를 귀띔해준 구스타브. 여행갈 땐 항상 '푸이 주베' 와인을 동반하며 와인의 매력을 일깨워준 구스타브. 열차 안에서 신분 차별적인 검문이 있을 때에도 "염병할 곰보 파시스트 놈들"이라며 기꺼이 제로의 편을 들어주었던 구스타브였다. 제로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로비 보이로 무슈 구스타브의 부름을 받는 순간,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손발처럼 충성스런 부하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1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구스타브에게 사랑의 보살핌을 받던 호텔 우수고객 마담 D가 돌연사한다. 사건의 발단은, 그녀가 유언장을 통해 그녀 곁에서 위로를 주었던 구스타브에게 명작 그림인 '사과를 든 소년'을 남기면서부터다. 어머니의 모든 유산을 상속받을 줄 알았던 아들은 이 소식에 분노해 그림을 가져간 구스타브에게 살인 누명을 씌웠던 것이다. 이때부터 구스타브와 제로의 모험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는 주연부터 조연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틸다 스윈튼, 빌 머레이, 에드워드 노튼, 애드리안 브로디, 주드 로까지. 기상천외한 모험기에 감칠맛 나는 등장으로 황홀경을 선사한 배우들의 변신에 눈 돌릴 틈이 없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빛낸 화려한 출연진들]
 
웨스 앤더슨, 슈테판 슈바이크를 기리며
딸기 우유 색깔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동화 속 궁전을 보는 것도 같지만, 어찌 보면 조금 야릇한 분위기를 피워대는 성인용 모텔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에 사용된 강렬한 색감이나 시시때때로 바뀌는 화면 크기, 재구현해낸 소품 하나까지도 웨스 앤더슨 감독의 철저한 계산 속에서 이루어졌다. 쉽게 보면 영상미 어여쁜 판타지 같지만, 그 속에 담긴 상징과 은유를 살펴보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슈테판 슈바이크의 <어제의 세계>에게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 한다. 세계대전, 나치, 히틀러가 휩쓸고 간 야만의 시대를 지나면서 꿈과 이상을 상실한 지금, 예술이 살아 숨 쉬던 아름다운 그 시대를 전하고 싶었다는 웨스 앤더슨. "도살장처럼 변해버린 잔혹한 세상에도 희망은 존재하지" 아마 웨스 앤더슨이 말하고 싶던 메시지가 이 대사에 함축되어 있지 않나 싶다.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나오는 와인
- 알베르 비쇼, 뿌이 퓌세(Albert Bichot, Pouilly Fuisse): 영화 속에서 무스타파가 와인을 주문하며 '푸이 주베 26년 산'이라고 언급은 했지만, 등장하는 와인의 정확한 이름이 명시되진 않았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알베르 비쇼, 뿌이 퓌세'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했다. 부르고뉴의 TOP 5 생산자 중 하나인 알베르 비쇼는 1831년 설립되어 6대째 가족 소유로 내려온 와이너리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와이너리를 매입하며 부르고뉴 와인의 선두주자로 우뚝 서며, 건재한 거장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스웨던 왕실의 공식 와인 공급업체이기도 하다. 
 
 
 

프로필이미지서연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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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5.01.14 01:01수정 2015.01.26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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