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프랑스 유학 시절, 전기세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비싼 유럽의 겨울은 그야말로 공포에 가까웠다. 해가 빨리 지고, 한국에 비해 겨울철 평균기온이 낮지는 않지만 특유의 흐린 날씨와 함께 늘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고나 할까. 아주 추운 날에는 전기장판을 이용했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는 손발이 시려 속수무책이었다. 문제는 나만 이렇게 춥다고 느낀다는 것. 막상 같은 기숙사에서 지내는 프랑스 친구들은 그다지 추위에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누군가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나 또한 해를 거듭할수록 유럽의 겨울에 적응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적응에 앞서 프랑스 친구들의 방한용품을 탐색하는 학습 또한 있었다. 가만 보니 실내에서 많은 옷을 입고 털신을 신고 지내는 것은 그들 역시 나와 비슷했으나, 잘 때 장판 대신 뜨거운 물을 가득 담은 고무 백을 수건으로 돌돌 말아 침대 안을 따뜻하게 하거나 손을 녹이곤 해 전기료가 드는 별다른 온열기구가 필요 없어 보였다. 또 하나, 이들 곁에는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겨울 음식이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라끌렛(Raclette)이다.
라끌렛이란?
치즈를 많이 섭취하는 유럽인들의 대표적인 겨울 음식인 라끌렛은 불어의 ‘라끌레(racler, 긁어내다)’라는 동사에서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라끌렛은 치즈를 녹여 전용 주걱으로 긁어먹는 치즈 이름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감자와 샤퀴트리(charcuterie, 육류가공품) 등을 곁들인 라끌렛 요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각종 야채와 오리고기를 곁들인 라끌렛 파티]
라끌렛 치즈는 우유를 기본으로 한 비가열 압착치즈로 스위스의 깡똥 뒤 발레(Canton du Valais) 지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 멸균되지 않은 원유로 만들어진 치즈는 2003년부터 원산지 보호 명칭(AOP)을 부여받았다. 그렇지만 라끌렛 치즈는 현재 스위스 외에 프랑스 각 지역, 캐나다 등에서도 생산되며 국내에서도 숲골 치즈 빚는 마을 라끌렛 치즈가 생산, 유통되고 있다. 국내산 치즈는 스위스 라끌렛 치즈에 비해 특유의 꼬리한 맛이 덜하고 은은하게 견과류의 아로마가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치즈가 녹으면, 스위스 치즈에 비해 기름이 많이 나오지만 쉽게 치즈 누룽지를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누룽지 상태의 바삭바삭한 치즈를 레드 와인과 함께 하는 것도 별미이니 말이다.
[숲골 치즈 빚는 마을, 국내산 라끌렛 치즈]
라끌렛, 어떻게 먹을까?
라끌렛이 좋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준비가 간단하기 때문.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손님 초대 요리도 없다. 라끌렛용 치즈와 감자, 꼬르니숑(cornichon)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오이 피클, 샤퀴트리를 몇 가지 산다면 준비의 9할은 마친 것이나 다름없다. 준비를 하는 데 있어 한가지 팁이 있다면, 유럽에 비해 육류가공품이 풍부하지 않은 한국에서는 고기와 야채를 즉석에서 구워내 치즈와 함께 먹는 것도 방법이다. 장을 모두 보았다면 샐러드 한 접시를 준비해 놓고, 삶아 놓은 감자에 즉석에서 치즈를 녹여서 전용 기구로 긁어내기만 하면 끝. 따뜻한 라끌렛 기계 앞에 도란도란 앉아 맛있게 먹는 일만 남았다.
[국내산 라끌렛 치즈로 만드는 치즈 누룽지]
라끌렛을 준비했다면 와인도 잊지 말 것!
식탁에 더해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나 와인이다. 준비된 음식과 와인이 함께 한다면 그 맛이 배가되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비결이 된다. 라끌렛 치즈와 함께 할 와인을 고르는 팁이 있다면, 라끌렛 치즈를 녹일 때 특유의 치즈 냄새가 많이 나는 편이므로 아주 비싼 와인과 함께 먹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는 것. 퀄리티가 좋은 데일리 와인이면 충분하다. 이 겨울을 더욱 겨울답게 즐기기 위한 음식, 라끌렛과 잘 어울리는 와인 몇 가지를 추천한다.
로저 구라트, 브륏 로제 2010 (Roger Goulart, Brut Rose 2010)
로저 구라트는 흔히 ‘스페인의 돔 페리뇽’으로 불린다. 이는 일본의 한 TV 프로그램에서 와인 전문가 5명을 대상으로 돔 페리뇽 로제와 로저 구라트 로제를 블라인드 테이스팅 한 결과, 3명의 패널이 로저 구라트 브륏 로제를 돔 페리뇽으로 지목해 얻게 된 별명. 유명 샴페인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의 품질을 지닌 까바라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로저 구라트 까바는 비교 대상을 이겼다는 단순한 사실뿐 아니라, 그만의 개성을 담고 있기에 더욱 빛난다. 이들은 특히 전 라인을 빈티지 까바로 출시해 명성을 드높였고, 스페인의 개성을 담은 품종을 이용해 샴페인 방식(Méthode Champenoise)으로 고급스러운 스파클링 와인을 생산한다. 하지만 가격은 편안하다는 것이 반전! 라끌렛과 함께라면 시작부터 끝까지 요리를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알로이스 라게더, 피노 그리지오 2013 (Alois Lageder, Pinot Grigio 2013)
피노 그리지오는 프랑스의 알자스(Alsace)에서 재배되는 피노 그리(Pinot Gris)와 같은 품종이지만 지역별 특징은 상이하다. 알자스의 피노 그리는 풀바디에 과일과 꿀 등의 아로마가 주로 감지되어 우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면, 알토 아디제의 피노 그리지오는 미디엄 바디에 산도가 높고, 시트러스 계열의 아로마가 상대적으로 강해 보다 발랄한 느낌이다. 알로이스 라게더의 피노 그리 또한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와인 중 하나로, 아카시아꽃을 비롯한 흰 꽃의 아로마와 함께 복숭아, 살구 등의 노트가 감미롭다. 상쾌함이 느껴지며 미네널러티가 주는 피니시가 인상적인 와인이다. 라끌렛과 함께 할 때에는 치즈가 지닌 느끼함을 산도로 확 잡아주고 곁들이는 야채와도 잘 어우러지니 좋은 선택이 된다.
몰리노 노코 화이트 2013 (Molino Loco White 2013)
리오하(Rioja) 지역에서는 비우라(Viura)라고 불리는 마카베오(Macabeo) 100%로 만들어진 와인이다. 스페인에서는 종종 까바(Cava)를 만드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가격대가 낮은 와인들은 자칫 흐릿한 인상을 줄 수도 있는데, 이 와인은 오히려 가격을 들으면 놀랄 정도로 퀄리티가 좋다. 신선하고 향긋한 향미를 뽐내며 가진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와인. 레몬, 자몽을 비롯한 시트러스 계열의 상큼함과 파인애플 등의 열대과일이 지닌 아로마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뜨거운 기후가 잘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충분한 산미가 느껴지며 밸런스가 좋다. 과일 고유의 풍미를 해치지 않기 위해 양조 과정에서 오크 배럴은 사용하지 않았다. 상큼함이 느껴지는 아로마와 안정된 산미로 녹인 치즈나 감자, 곁들이는 야채와 잘 어울리는 와인이다.
파네세, 그랑 사쏘 2013 (Farnese, Gran Sasso 2013)
그랑 사쏘(Gran Sasso)는 이태리 아브루쪼, 테라모 지역을 상징하는 산맥을 뜻한다. 와인의 레이블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산맥의 모양이 마치 여인이 누워있는 형상과 같이 느껴진다. 그러한 이유로 붙여진 이 와인의 별명은 바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La Bella Addormentata)’다. 검은 체리, 블랙베리 등의 아로마가 지배적인 미디엄 바디의 와인이다. 치즈와 함께 했을 때에는 오히려 구조감이 탄탄해지고 풍미가 짙어지는 상승효과를 맛볼 수 있다. 함께 곁들일 음식으로 고기나 샤퀴트리를 준비했다면 육류와도 잘 어울릴 와인.
빌라 마리아, 셀라 셀렉션 피노 누아 2011 (Villa Maria, Cellar Selection Pinot Noir 2011)
빌라 마리아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성공한 와이너리이자, 뉴질랜드에서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와이너리(New Zealand’s Most Awarded Winery)로 통한다. 마른 장미의 노트와 다크 체리, 신선한 자두, 각종 향신료의 아로마가 유감없이 표현된다. 섬세한 탄닌감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마시기에 적합한 와인이다. 미디엄 바디의 와인이므로 마찬가지로 라끌렛 치즈나 육류와 함께 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특히 라끌렛 그릴에 함께 구워 먹을 용도로 오리고기를 선택했다면 탁월한 매칭이 될 것이다.
알바로 팔라시오스, 라 몬테사 2010 (Alvaro Palacios, La Montesa 2010)
템프라니요(Tempranillo) 35%, 가르나차(Garnacha) 40%, 마주엘로(Mazuelo) 15%, 그라시아노(Graciano) 10%
알바로 팔라시오스(Alvaro Palacios)는 1980~90년대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스페인의 프리오랏(Priorat), 비에르조(Bierzo)를 개척해 오늘날 세계적인 와인산지로의 위상을 이끌었으며, 그의 와이너리 알바로 팔라시오스를 베가 시실리아(Vega Sicilia), 핑구스(Pingus)와 함께 스페인 3대 와이너리 중 하나로 꼽히는 명성을 누리게 한 장본인이다. 라 몬테사는 전통적인 리오하 와인이 지닌 깊이와 알바로 팔라시오스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와인. 블랙커런트, 체리를 비롯한 검은 과실의 풍미와 딜(Dill)을 필두로 한 허브의 노트가 인상적이며 우아하고 둥근 바디감을 지니고 있다. 촘촘한 탄닌감으로 녹인 치즈와도 잘 어울리며 특히 허브 터치가 있는 돼지고기 가공품과 함께 하기를 추천하고 싶다.
눈앞에서 보글보글 지글지글 익는 즉석요리는 종류를 불문하고 모두 맛있다. 그중에서도 라끌렛은 치즈가 천천히 녹기 때문에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오래도록 식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니 더 맛있는 음식이다. 또 치즈를 녹이는 라끌렛 그릴을 사용하는 동안, 집안의 온도가 자연스럽게 올라가 난방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 또한 큰 장점이다. 여기에 와인까지 가세하면 분위기마저 훈훈해져 긴 겨울밤이 더욱 즐겁다. 이번 주말엔 겨울철 별미인 라끌렛과 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