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작품처럼 만드는 사람. 바로 비비 그라츠(Bibi Graetz)다. 그는 화가이자 와인메이커다. 그의 집안은 유복해 토스카나 일대에 땅이 많았다. 소작 농부들은 이곳에 포도를 주로 길렀고, 덕분에 그는 어린 시절 포도밭에서 자주 놀곤 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밭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됐다. 1990년대 중반 비비는 포도밭을 다시 일구기로 결심했다. 그의 ‘괴짜’ 근성(?)이 발동한 것이다. ‘일절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만든 그의 와인은 첫 빈티지부터 로버트 파커의 높은 평가를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비 그라츠]
비비 그라츠의 와인 이름에는 유독 마타(Matta)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까사마타(Casamatta), 테스타마타(Testamatta), 볼라마타(Bollamatta). ‘마타’란 미친 사람 또는 괴짜라는 뜻이다. 와인에 예쁜 이름을 붙이기는 커녕 ‘괴짜’라니. 이는 다분히 비비 그라츠의 예술가적 기질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 와인을 만들면서 토스카나에서 주로 재배하는 산지오베제나 카베르네 소비뇽이 아닌 안소니카(Ansonica), 카나이올로(Canaiolo), 콜로리노(Colorino) 등 알려지지 않은 토착 품종을 적극 사용해 와인을 만든 것도 괴짜다운 일이다. 와인 맛이 형편 없다면 아마도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비 그라츠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처럼 시작부터 성공가도를 달렸을 뿐만 아니라 무명의 토스카나 품종을 명품으로 끌어올린 주역이 됐다.
비비 그라츠의 품질은 밭에서부터 시작한다. 유기농으로 재배하는 포도, 건강하게 보존하는 늙은 포도나무는 비비 그라츠 와인의 기본을 구성한다. 이렇게 우수한 포도를 모아 자연 발효를 거치면 테루아와 품종의 특성이 살아숨쉬는 와인이 만들어진다. 이런 개성을 살리기 위해 새 오크의 사용을 극도로 제한하는 것은 물론이다. 완성된 와인은 비비 그라츠가 직접 그린 레이블을 두르고 고객에게 전달된다. 비비 그라츠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술작품을 만들듯 와인을 빚는 것이다.

[비비 그라츠의 와인메이커 프란치스코 바카로]
2018년 7월 18일 비비 그라츠의 와인메이커 프란치스코 바카로(Francesco Baccaro)가 한국을 방문했다. 꼼꼼한 와인메이커답게 그는 비비 그라츠의 와인들을 엔트리 레벨부터 아이콘급까지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를 통해 들은 와인 레이블과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도 흥미진진했다.

[프란치스코 바카로와 함께 시음한 비비 그라츠 와인들]
비비 그라츠, 볼라마타 NV (Bibi Graetz, Bollamatta NV)
산지오베제 100%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다. 볼라마타는 거품(Bolla)과 괴짜(Matta)의 합성어다. 괴짜가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라는 뜻이다. 레이블 그림은 비비 그라츠의 딸이 10세 때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볼라마타는 2015년에 처음 출시됐다. 2014년 토스카나는 빈티지가 좋지 않아 산지오베제의 산도가 너무 높았다. 비비 그라츠는 특유의 창의력을 발휘해 불행은 행운으로 바꿨다.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이다. 샤르마 방식으로 만든 이 와인은 산지오베제 특유의 붉은 베리류의 향이 상큼하다. 탱크에서 효모 앙금과 접촉시켜 은은한 생크림 향도 배어 있다. 식전주로 즐기기도 좋고 향이 섬세해 회처럼 담백한 해산물에 곁들여도 좋다. 2015년부터는 북향 밭에서 자란 산지오베제를 조금 일찍 수확해 이 와인을 만들고 있다. 연간 생산량은 6000~7000병 수준이다.
비비 그라츠, 까사마타 비앙코 2016 (Bibi Graetz, Casamatta Bianco 2016)
까사마타는 집이라는 뜻의 Casa와 괴짜라는 뜻의 Matta가 합쳐진 말이다. 괴짜가 만든 하우스와인이라는 뜻이다. 엔트리 와인이지만 가성비가 훌륭하다. 젊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베르멘티노 60%, 트레비아노 30%, 모스카토 비앙코 10%를 블렌드해 만들었고, 신선함을 살리기 위해 오크 숙성은 하지 않았다. 덕분에 향긋한 허브, 오렌지 꽃, 자몽, 풋사과, 라임 등 과일향이 산뜻하고 열대과일향이 살짝 섞여 있다. 여운에서 견과류의 쌉쌀함이 조금 느껴져 음식과 페어링하기에도 매우 좋다. 특히 해산물이나 가벼운 닭요리와 잘 어울린다. 와인 산도가 좋아 삼겹살처럼 기름진 육류와 즐기면 입안을 개운하게 해준다.
비비 그라츠, 까사마타 로쏘 2016 (Bibi Graetz, Casamatta Rosso 2016)
토스카나 여러 지역에서 자란 산지오베제를 섞어 만든 와인이다. 여러 지역 포도를 섞은 이유는 와인의 조화를 위해서다. 지역에 따라 포도의 산도가 높기도 하고 타닌이 강하거나 과일향이 풍부한 포도가 생산되기도 한다. 이런 포도를 고루 섞으면 전체적인 밸런스가 잘 맞고, 어릴 때 즐겨도 좋은 와인이 만들어진다. 까사마타 비앙코처럼 이 와인도 신선함을 살리기 위해 오크 숙성은 거치지 않았다. 맛을 보면 딸기, 체리, 라즈베리, 자두 등 과일향이 달콤하고 후추 같은 향신료 향이 살짝 느껴진다. 매끄러운 질감과 부드럽게 올라오는 향도 매력적이다.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엔트리급 와인이지만 품질은 매우 고급스럽다. 볼로네제 파스타처럼 고기가 들어가고 향이 진한 음식과 잘 어울린다. 간장향과도 잘 맞으므로 찜닭이나 갈비찜에 곁들여도 좋다.

[소포코네 와인 레이블]
비비 그라츠, 소포코네 디 빈칠리아타 2014 (Bibi Graetz, Soffocone di Vincigliata 2014)
레이블 그림이 특이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인의 옆 모습이 보이고 배경에 이상하다. 뭔가 야릇한 분위기다. 소포코네는 토스카나 사투리로 오럴 섹스를 뜻한다. 소포코네가 생산되는 빈칠리아타(Vincigliata) 마을에는 드넓은 포도밭이 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남녀의 밀회 장소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소포코네 2014년의 맛은 상당히 요염했다. 잘 익은 검은 과일향과 향신료의 조화가 우아하고, 타닌이 실크처럼 매끄럽고 탄력이 넘친다. 프랜치 오크 배럴에서 15개월간 숙성하고 병입한 뒤 6개월 병숙성을 거쳐 만들어진 우아한 맛이다. 이렇게 맛이 좋지 않았다면 민망한 이름과 레이블로 성공을 거두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2014년은 토스카나의 빈티지가 좋지 않아 비비 그라츠가 플래그쉽 레벨인 테스타마타를 만들지 않아 테스타마타에 들어갈 포도가 소포코네로 다 들어갔다고 한다. 소포코네로서는 2014년이 최고의 빈티지가 아닐까 싶다.
비비 그라츠, 테스타마타 비앙코 2017 (Bibi Graetz, Testamatta Bianco 2017)
테스타마타는 비비 그라츠의 플래그쉽 레벨 와인이다. 비앙코는 2016년에 첫 출시된 와인으로 토스카나 앞바다에 있는 질리오(Giglio) 섬에서 수확한 안소니카 품종 100%로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안소니카의 수령이 100년이 넘었다는 점이다. 질리오 섬의 토양에 모래 성분이 많아 필록세라의 타격을 입지 않아서다. 이 와인은 프랜치 오크 배럴에서 발효하고 숙성해 만든다. 오크향을 이겨낼만큼 안소니카의 향이 진하고 구조감이 탄탄하다는 뜻이다. 이는 안소니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고목에서 자란 포도의 우수함이기도 하다. 산도가 높고 구조감이 좋아 병숙성이 필요한 와인이다. 2017년산에서는 마치 잘 익은 부사 사과의 가운데 꿀 부분을 먹는 듯 과일향의 농축미가 탁월했고 질감이 쫀쫀했다. 와인이 아직 어려 신선한 과일향과 구조감이 지배적이었지만 병숙성을 거치면 와인이 부드러워지면서 복합미가 증대된다고 하니 무척 기대가 된다. 참고로 안소니카의 클론 가운데 하나가 시칠리아에서 자라는 인솔리아(Insoglia)다. 인솔리아는 쉽게 마시는 와인을 만드는데 주로 쓰이지만 안소니카는 맛이 고급스럽고 구조감이 탁월해 고급 와인의 재료로 쓰인다.
비비 그라츠, 테스타마타 로쏘 2015 (Bibi Graetz, Testamatta Rosso 2015)
테스타마타 로쏘는 토스카나 여러 지역에서 자란 산지오베제 가운데 최고급품만 골라서 만든 비비 그라츠의 플래그쉽 와인이다. 포도는 모두 유기농으로 재배하며 포도나무의 수령도 90년이 넘는다. 프랜치 오크에서 발효한 뒤 36개월간 재사용한 프랜치 오크에서 숙성시킨다. 2015년은 토스카나 최고의 빈티지였고, 테스타마타 로쏘 2015년산도 제임스 서클링 99점을 받았다. 산지오베제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영혼이 잘 표현된 와인이다. 과일향이 풍부하지만 과하지 않고 매끈하게 올라온다. 붉은 베리와 검은 베리가 뒤섞인 듯 과일향이 농밀하고, 오랜 오크 숙성으로 얻은 커피, 캐러멜, 감초, 담배, 가죽 등의 향미가 복합미를 더한다. 매끈한 질감이 입안을 가득 채우지만 무겁지 않고 탄탄하다. 조화와 균형이 뛰어난 와인이다. 비비 그라츠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손색이 없다.
비비 그라츠를 잘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아름다운 레이블에 끌려 와인을 구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번 맛보면 비비 그라츠의 핵심은 와인의 맛과 향에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레이블보다 더 멋진 와인, 비비 그라츠. 이 아름다운 와인에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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