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호주 와인의 진면목을 경험할 수 있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이어진 가운데, 호주 바로사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메이커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있었다. 그랜트 버지(Grant Burge)의 수석 와인메이커 크렉 스탠스보루(Craig Stansborough)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것. 와인업계 거장의 첫 방한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올해로 와인과 인연을 맺은지 35년, 그리고 그랜트 버지의 와인을 만든지 25년이 된 그는 그랜트 버지의 명성을 일군 주역이다. 뛰어난 퀄리티의 와인을 생산하며 바로사 와인산업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14년에는 바론 오브 바로사(Barons of Barossa)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와인메이커(Winemaker of the Year)’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 10월 8일 진행한 크렉 스탠스보루와의 인터뷰는 그의 양조철학뿐 아니라 바로사 지역의 중요한 특징과 최근의 변화까지 들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그랜트 버지의 수석 와인메이커, 크렉 스탠스보루]
그랜트 버지의 역사는 1855년 영국에서 이주해온 존 버지(John Burge)가 남호주의 바로사 밸리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하면서 시작됐다. 현재 바로사 지역이 세계적 위상을 누리게 된 데는 이 지역에 일찌감치 자리잡고 와인 양조의 유산을 이어온 그랜트 버지 와이너리가 큰 기여를 했다. 존 버지의 고손자이자 가문의 5세대인 그랜트 버지는 1988년 자신의 이름을 건 와이너리를 설립했고 이후 그의 자녀들이 와이너리에 참여해 6대째 가족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크렉 스탠스보루가 그랜트 버지에 합류한 것은 1993년. 호주의 다른 와이너리에서 10년간 근무한 뒤 그랜트 버지로 옮긴 그는 당시의 선택에 대해 “가족 경영으로 이어져온 그랜트 버지의 다이내믹한 성장세에 주목했고, 좋은 포도로 흥미로운 와인들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최근 그랜트 버지는 놀라운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제임스 할리데이(James Halliday)의 와인 컴패니언(Wine Companion)에 11년 연속으로 ‘5 스타 와이너리’에 오를 정도로 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 그랜트 버지는 바로사 지역에 17개 빈야드, 약 400헥타르의 포도밭을 가지고 있으며 연간 40만 케이스의 와인을 생산한다. 바로사는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와 에덴 밸리(Eden Valley)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세부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랜트 버지의 많은 빈야드가 자리한 남부 바로사는 적갈색 토양에 강우량이 높고 기온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으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는 다른 포도보다 약간 큰 것이 특징이죠. 그래서 좋은 산도와 부드러운 타닌을 갖춘 와인을 생산하기에 적합합니다.” 크렉 스탠스보루가 와인메이킹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밸런스’다. 그래서 그의 와인은 한국의 소비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로사 쉬라즈의 특징과 다른 면이 많다. 지역과 품종만으로 묵직한 타닌과 진득한 스타일의 와인을 떠올린다면 그랜트 버지의 와인은 그 예상을 기분 좋게 벗어날 것이다. 그는 좋은 산도와 섬세한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타닌과 과실의 집중도 면에서 균형이 무너지거나 순수한 과실향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발효과정에서 과감하게 제외시킨다. 바디감이 무겁고 진한 느낌의 와인을 만드는 것이 쉬운 길이지만, 크렉 스탠스보루는 모든 것의 조화를 고려하고 세심하게 조율해 차별화된 바로사 쉬라즈를 선보인다.
그는 특히 기술력을 향상시키는 데 개방적인 마인드를 갖춘 와인메이커로 꼽히는데, 지난 25년간 그랜트 버지의 정체성을 지키는 한편, 와인메이커로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20여 년 전과 지금의 와인 양조는 많이 다릅니다. 그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고 빈야드와 양조에 관한 지식과 경험, 데이터가 많이 쌓였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매년 새로운 시도를 계속합니다.” 실제로 예전에 비해 스킨컨택을 더 길게 하거나, 이스트의 종류를 바꿔 복합미를 높이고, 아메리칸 오크에서 프렌치 오크로 바꾸며 우아한 풍미를 더하는 등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는 매 빈티지마다 시도하는 모든 변화의 기준은 사람들이 마시고 싶어하고 만족할 만한 와인을 만드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그가 또 한 가지 강조한 것은 올드 바인이다. 바로사의 가장 큰 특징이 필록세라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이라는 점.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오래된 수령의 포도나무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으로 꼽힌다. “바로사에서는 포도나무의 수령을 구분해 카테고리를 나누고 있습니다. 35년 이상이면 올드 바인(Old Vine), 70년 이상은 서바이버 바인(Survivor Vine), 100년 이상은 샌터내리언 바인(Centenarian Vine), 125년 이상의 와인은 앤세스터 바인(Ancestor Vine)이라 하죠. 올드 바인은 포도가 적게 열리지만 집중도가 매우 뛰어나고, 해마다 기후조건에 차이가 있더라도 영 바인에 비해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퀄리티의 포도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랜트 버지의 빈야드는 50년 이상 수령이 20%, 30~40년 수령이 40%, 나머지 40%는 영 바인으로 구성된다. 125년 이상 수령의 앤세스터 바인이 식재된 빈야드도 2개를 소유하고 있으며 면적은 약 4.5헥타르 정도다. 올드 바인으로 와인을 만드는 것은 고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많은 정성이 필요한 작업이므로 생산성과 경제성만 따진다면 지속할 수 없는 일. 오래 세월 바로사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중한 고목들과 땅에 대한 존경, 그리고 품질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음 와인에 대해 설명하는 크렉 스탠스보루]
그와 함께 시음한 와인은 바로사 지역의 특징과 그가 추구하는 와인메이킹 스타일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와인들이었다. 그랜트 버지 5th 제너레이션 쉬라즈(Grant Burge 5th Generation Shiraz) 2016은 바로사 밸리의 여러 프리미엄 빈야드에서 수확한 포도를 블렌딩해 밸런스를 맞춘 와인. 타닌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베리류의 아로마가 편안하게 다가온다. 그는 2016년이 바로사의 강우량과 기후조건이 좋았던 해라 설명하며 “완벽에 가까운 빈티지”라 했다. 이어진 그랜트 버지 더 홀리 트리니티(Grant Burge The Holy Trinity) 2013은 그르나슈, 쉬라즈, 무르베드르 세 가지 레드 품종을 블렌딩한 GSM 와인. 그르나슈와 GSM은 점차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데 더 홀리 트리니티는 호주의 많은 와이너리에서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2013년 빈티지는 그르나슈 57%, 쉬라즈 30%, 무르베드르 13%의 비율로, 50년에서 120년 수령의 올드 바인에서 손수확한 포도를 발효 후 블렌딩했다. 오픈 후 시간이 흐를수록 복합미와 우아함이 돋보인 이 와인은 그르나슈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 크렉 스탠스보루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그는 프랑스 남부의 그르나슈와는 다른, 마치 피노누아 같은 섬세함을 갖춘 스타일을 추구하는데 향후 100% 그르나슈 와인도 선보일 예정이라 밝혔다.
그랜트 버지 미암바 쉬라즈(Grant Burge Miamba Shiraz) 2016은 바로사 남쪽 끝에 자리한 미암바 빈야드의 포도로 생산한 와인. 그는 “뛰어난 바로사 쉬라즈의 좋은 예”라 표현했다. 와인메이커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타닌인데, 이 와인은 처음 머금었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부드럽게 타닌이 이어진다는 것. 자두와 라즈베리, 블랙베리 등 말린 과실, 초콜릿 향과 함께 100% 프렌치 오크 숙성으로 인한 바닐라 뉘앙스가 느껴지며 그의 말대로 부드러운 텍스처가 인상적이다. 다음으로 시음한 그랜트 버지 필셀 쉬라즈(Grant Burge Filsell Shiraz) 2015는 바로사 밸리에서도 최고의 빈야드로 꼽히는 필셀 빈야드에서 약 100년 정도 수령의 포도나무에서 생산된 쉬라즈를 사용한다. 자두, 다크 초콜릿, 모카, 바닐라 아로마를 지닌 풀바디 와인으로 탄탄한 구조감과 올드 바인의 뛰어난 집중도를 느낄 수 있는 와인이다. 20년 이상 숙성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으며, 올해 제임스 할리데이로부터 2015년 빈티지가 95점을 받았다. 그랜트 버지의 아이콘 와인인 메삭 쉬라즈 또한 필셀 빈야드의 포도를 사용하며 두 와인 모두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쉬라즈에 이어 마지막으로 시음한 것은 그랜트 버지 코리톤 파크 까베르네 소비뇽(Grant Burge Corryton park Cabernet Sauvignon) 2012. 바로사에서 가장 높고 서늘한 지역에 자리한 코리톤 파크 빈야드에서 재배한 까베르네 소비뇽을 사용했다. 우아하고 복합성이 뛰어난 최상급 까베르네 소비뇽으로 블랙베리와 블랙커런트, 페퍼, 민트 향과 함께 우아하고 부드러운 타닌이 이어지는 풀바디 와인. 기후적 특징이 반영된 훌륭한 피네스를 느낄 수 있다.
크렉 스탠스보루와 나눈 이야기는 바로사 지역에 일군 그랜트 버지의 역사와 함께, 변화하고 있는 ‘바로사의 현재’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랜트 버지의 와인들을 통해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밸런스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짧은 일정 동안 기자들과의 만남 외에도 두 차례에 걸친 마스터 클래스와 한 번의 공식 디너를 통해 한국의 와인애호가들과 전문가들을 만났다. “많은 이들이 와인을 접하는 데 열성적인 모습이고, 여러 애호가들이 좋은 질문을 해왔습니다. 사람들 덕분에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좋습니다. 나라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니까요.” 첫 방한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크렉 스탠스보루가 인터뷰 말미에 덧붙인 말은 ‘와인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와인은 자연에서 오지만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 사람의 비전과 상상이 반영되며 와인이란 존재가 더욱 근사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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