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시내에서 차로 약20분.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 도착한 비비 그라츠의 고성은 빈칠리아타(Vincigliata) 마을 언덕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저 멀리 피렌체가 보였고 주변 포도밭이 한눈에 들어왔다.

[환대하며 맞아준 비비 그라츠의 빈센초 단드레아 이사]
문을 열고 환한 미소로 반겨준 이는 비비 그라츠의 마케팅 담당 이사 빈센초 단드레아(Vincenzo D’Andrea)였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지난8월 한국을 방문했던 와인메이커 프란체스코 바카로(Francesco Baccaro)가 와인을 블렌딩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와인이 담긴 병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병마다 모두 다른 와인이었는데, 품종이 다르거나 밭이 다른 와인들이었다.프란체스코는 와인을 종류별로 피펫으로 조금씩 빨아올려 블렌딩 샘플을 만들고 있었다. 샘플마다 꼼꼼하게 어떤 와인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적어가며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땅이 꺼져도 모를 정도였다.

[집중하며 블렌딩 샘플을 만들고 있는 프란체스코 바카로 와인메이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11시경. 오후가 되면 비비 그라츠가 방문해 블렌딩 샘플을 맛보고 올해의 블렌딩 레시피를 결정한다고 한다. 오늘이 프란체스코에게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인 셈이었다. 프란체스코가 집중할 수 있도록 블렌딩 룸을 나와 와인이 익어가는 셀러로 향했다.
빈칠리아타에 위치한 이곳 와이너리에서는 비비 그라츠의 최고급 와인인 테스타마타(Testamatta)와 콜로레(Colore)만 만들고, 소포코네(Soffocone)나 카사마타(Casamatta) 등은 다른 와이너리에서 양조하고 숙성한다고 한다. 빈센초의 안내로 들어간 와인 숙성실에는 배럴과 배트(vat, 큰 오크통)가 줄지어 서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그중 하나로 다가가더니 숙성 중인 와인을 잔에 조금 따라주었다.
이 와인은 라몰레(Lamole)라는 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것이었다. 고도620미터의 높은 곳에 자리한 라몰레에는 수령이70~100년에 이르는 산지오베제(Sangiovese)가 자란다고 한다. 한 모금 머금으니 우아하고 섬세한 와인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다음으로는 배럴에서 숙성 중인 와인을 맛볼 차례였다. 라몰레 밭과는 달리 이번 와인에서는 과일향이 진하고 와인에서 힘이 넘쳤다. 이 와인은 토스카나 남쪽 시에나(Siena) 부근에 위치한 밭에서 수확한 산지오베제로 만든 것이었다.

[배트와 배럴에서 숙성 중인 와인의 시음용 샘플을 채취하는 모습]
빈센초에 따르면 산지오베제에는 여러 얼굴들이 있다고 한다. 진함, 강함, 우아함, 섬세함, 향긋함 등.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밭에서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섬세하고 우아한 향이, 고도가 낮은 곳에서는 강하고 진한 맛이 나오니 여러 밭에서 생산한 산지오베제를 블렌딩해야 복합미가 뛰어난 와인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품종과 밭 별로 따로 발효하고 숙성한 뒤 블렌딩하는 과정을 실제로 보니 테스타마타와 콜로레의 맛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숙성 중인 와인의 맛만 보고도 황홀해 하는 내게 빈센초는 마침 자랑할 만한 기쁜 소식이 있다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테스타마타와 콜로레가 보르도 앙 프리머(En Primeur)에 출품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보르도 앙 프리머는 세계적인 와인들이 배럴 상태로 경매에 붙여지는 곳이다. 지금까지 앙 프리머가 선정한 이탈리아 와인은 마세토(Masseto)와 솔라이아(Solaia) 뿐이었다. 비비 그라츠가 세번째로 입성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혹시 한국 시장에서 테스타마타와 콜로레를 만나기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레 묻자, 한국은 중요한 시장이어서 물량을 따로 배정할 예정이라며 밝은 미소를 보였다.

[카사마타, 그릴리, 소포코네의 시음을 준비하는 빈센초]
와인 셀러를 나와 블렌딩이 한참 진행 중인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테이블에는 카사마타, 그릴리, 소포코네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씩 맛을 보니 와인 맛이 모두 개성이 넘쳤다. 비비 그라츠의 장점은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싶었다. 비싼 와인이 더 맛있고 저렴한 와인은 덜 맛있는 그런 단순함은 비비 그라츠와는 거리가 멀다. 데일리로 마시기 좋은 상큼함, 음미하며 천천히 맛보고 싶은 복합미 등 와인마다 용도가 다르다.
이것저것 맛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빈센초가 토스카나 와인의 빈티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2015년이 토스카나 최고 빈티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었다. 와인의 모든 요소가 균형이 잘 잡혀 최고의 맛을 보여준다고 한다. 반면 2014년에는 비가 많이 와 작황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비 그라츠는2014년에 테스타마타와 콜로레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 와인에 들어갈 포도가 모두 소포코네로 들어갔다고 하니 소포코네 2014년 산은 주목할 만한 와인이 아닐 수 없다. 2016년산은 다른 해에 비해 와인에 보디감과 타닌이 더 많아 숙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하고, 2017년산은 향미의 집중도가 뛰어나다고 하니 토스타카산 와인 구입시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와이너리를 나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나섰다. 점심은 피렌체에 위치한 해산물 식당이었다. 모든 음식이 해산물로 구성됐지만 애피타이저는 토스카나식 비프 타르타르(육회)였다. 여기에 곁들인 와인은 산지오베제로 만든 볼라마타(Bollamatta) 스파클링 로제 와인이었다. 산지오베제는 스파클링 와인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재료다. 왜 다른 와이너리는 산지오베제로 스파클링을 만들지 않을까 의심될 정도로 볼라마타는 상큼함과 탄탄함을 자랑한다. 국내에서도 자주 즐긴 와인이지만 비프 타르타르와 함께 즐기니 볼라마타의 맛이 더욱 살아나는 듯 했다.

[점심 식사와 함께 즐긴 볼라마타와 부지아]
메인요리인 생선구이에 곁들인 와인은 부지아(Bugia)였다. 부지아는 토스카나 앞바다에 위치한 질리오(Giglio) 섬에서 자란 안소니카(Ansonica) 품종100%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상큼한 과일향과 함께 느껴지는 짭짤한 바닷내음과 은은한 미네랄향은 생선요리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식사를 하며 빈센초는 부지아가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었다. 질리오 섬에서는 이름 대신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이 관습이라고 한다. 별명은 대물림까지 되는데, 부지아는 이 와인의 재료인 안소니카 포도를 기르는 늙은 농부의 별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지아의 뜻이 바로 ‘거짓말쟁이’란다.재미난 뒷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 와인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와인을 맛보자마자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아, 거짓말 같아!’라는 감탄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빈센초와 헤어진 뒤 피렌체 시내로 나와 곧장 와인샵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에도 비비 그라츠 와인을 곁들이고 싶어서였다. 평소에도 워낙 좋아하는 와인이지만 실제로 와이너리를 방문하고 나니 비비 그라츠의 매력에 더 깊이 빠진 것 같다. 아마도 당분간은 그 매력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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